사망에서 생명으로
본문/ 요5:19-29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인간의 생명입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막8:36)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부도 명예도 권력도 생명보다 더 귀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요즘에 우리는 이 진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 사회적 거리를 두고 살고, 조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여행도 안 가고,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배당에 함께 모이지도 않고 있습니다. 왜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생명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도 귀하고, 다른 사람의 생명도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상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들을 우리는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신 분이십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삶과 사역과 죽음은 다 생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구원과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도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10:10)
수 많은 병자들을 치유해 주신 것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안식일에 병자들을 치료하면 유대인들에게 오해와 미움을 많이 받을 것이 분명한데도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하신 것도 사람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명에 대해, 죽음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중에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명 하면, 목숨만을 생각합니다. 즉 육체적 생명만 생명으로 생각합니다. 죽음도 목숨이 끊어지는 것, 육신의 죽음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생명에도 여러 종류의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도 여러 종류가 있고, 구원도 여러 종류의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분류해도 생명, 죽음, 구원을 각각 둘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영적 생명과 육체의 생명, 영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 영적 구원과 몸의 구원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좀더 세분화하면 셋, 넷으로도 나눌 수 있습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죽음은 네 종류가 있고, 구원은 세 종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의 인간의 타락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세 종류의 죽음이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또 한 종류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죽음 –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제일 먼저 경험한 죽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영적으로 죽게 됩니다. 엡2:1절에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인격적 죽음 –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가인과 아벨 사이는 더 나빠졌습니다. 인격적인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 –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입니다. 아담은 930세에 죽게 되었습니다.
(둘째 사망)이 세 가지 죽음 외에 신약 성경에 보면, 심판, 또는 둘째 사망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히브리서9:27절을 보세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계시록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이처럼 죽음이 네 종류가 있는데, 구원은 세 종류의 구원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가 영적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예수님을 믿으면 이미 받은 것입니다. 의인,영어로 justifica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가 인격의 구원입니다. 영혼의 구원은 단번에 일어나지만, 인격의 구원은 점진적입니다. 일생 동안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성화, 영어로 sanctification, 거룩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가 육체의 구원 즉 몸의 부활입니다. 주의 재림 때에 몸이 부활하게 되고,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구원입니다. 영화, 영어로 glorification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육신적 죽음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육신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살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우리는 세상을 바라봐야 하고 사람들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런 전인적인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집중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전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비난과 공격에 대해 변호를 하시는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친 아버지라고 하신 일로 비판을 받으셨습니다.
요5:17-18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침묵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오해) -억울해도 참고, 항상 말이 없으시고, 과묵하신 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을 좋아하신 분이십니다. 오해가 있으면 변명도 하시고, 적극적으로 자기 변호도 하신 분이십니다. 설교도 많이 하셨습니다. 산에서도 하셨고 들에서, 바닷가에서도 하셨습니다.
한국 속담에 ‘침묵이 금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항상 맞는 말은 아닙니다. 말 해야 할 때, 말하고 말하지 않아야 할 때 안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가?본문에서 왜 적극적으로 자기 변호를 하셨을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에 대해 알려 주시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오해가 있을 때,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자기 변호 과정에서 “당신이 누구신지,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 어떤 권위를 가지고 계신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과묵하신 분이었던 것이 아니라 항상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진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데, 세상에서는 그 비슷한 관계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생각할 때,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관계를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비슷한 경우를 하나 찾을 수 있는데, 그 관계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22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아브라함과 이삭은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한 신뢰 관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순종을 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리아 산으로 향하면서 이삭은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장작을 지고 길을 가면서 물었습니다. “아버지 나무도 있고 불도 있는데, 하나님께 번제로 드릴 어린 양을 어디 있습니까?”
아들 이삭이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여 주시리라” 라고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모리아 산에 도착해서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 놓았지만, 아직도 어린 양을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을 이삭의 손과 발을 묶어서 제단 위, 나무 위에 올려 놓습니다. 이삭이 지금 어떤 일을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순종하였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급한 음성으로 아브라함을 막으셨고, 이삭 대신에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을 준비해 주셔서 번제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이야기인데,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은 전적인 신뢰 관계 속에서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고, 이삭은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있습니다. 서로 뜻이 일치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께 전적인 순종을 하셔서 십자가까지 달리신 사건에 대한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아주 담대한 주장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두 가지 권한을 위임 받았다는 것입니다. 두 권한은 하나님의 절대적 권한입니다. 하나님의 권한을 다 넘겨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로부터 ‘죽은 사람을 살릴 권한, 즉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고 주장하십니다.
요5:21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를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실제적으로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던 나사로를 살리시기도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아들로서 최후의 심판권을 부여 받았다고 주장하십니다. 인간의 모든 운명의 결정권자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요5:22절을 보세요.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아들에게 넘겨 주셨을까요? 모든 사람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공경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5:23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요5:24절에서 이제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요5:24절,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절인데, 요한복음3:16절 만큼이나 중요한 구절입니다.
먼저 함께 읽어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이 말씀은 구원을 위한 두 가지 조건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의 자격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자격이 있어서 구원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어느 인간도 아무 자격 없지만, 구원받을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1)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다른 하나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믿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의 동사의 시제를 주목해야 합니다. 듣고 믿는 것은 현재형입니다.
“영생을 얻었고,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동사의 시제가 과거형, 또는 현재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어미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말씀에 옮겨 졌다는 동사의 시제는 현재 완료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그 구원 받은 상태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영혼의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복음을 통해 죽은 영혼이 살아나게 되면, 다시 얻는 생명은 다시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몸이 죽고, 무덤에 묻힌다고 해도, 다시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늙거나 질병, 또는 사고로 육신적으로 죽을 수 있지만, 영적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죽지 않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언제 완전한 구원 가운데 들어가는가?
우리가 부활절 때 나눈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과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이뤄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지막 심판과 부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5:27-29,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여기서 선한 일, 악한 일을 행한대로 생명의 부활로,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는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문맥으로 볼때, 무슨 행위 구원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선한 일은 무엇보다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악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을 길이 있는데도 그 길을 무시하고 불신의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심판은– 사실 죽은 후에 받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결정되는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 가지입니다. 죽은 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운이 좋으면 천국, 운이 없으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원과 심판의 모든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후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 이미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고, 심판 받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를 강조하셨는데요, 그 중에 하나가 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믿는 것입니다.
요5:24절을 다시 보세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1) 그런데 듣는 것과 믿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 롬10:17에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나요?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동사 중에 하나가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24절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25절,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고했습니다. 28절, 무덤 속에 있는 자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듣는 것 – 믿음과 직결됩니다.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동사 중 하나가 들으라는 동사입니다. 신구약에 들으라는 말씀만 100번 가까이 나옵니다. 요즘에 새벽마다 신명기 말씀을 듣는데요, 들으라(쉐마)로 시작하는 말씀이 많습니다.
들으라 이스라엘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비유를 들으라 등의 관용구처럼 나오는 말들도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입은 하나인데, 귀는 두 개 이유 아세요?한 번 말하고 두 번 들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귀가 한 쪽에 있지 않고 양쪽에 있는 이유? – 한쪽 말만 듣지 말고 양쪽 말을 들으라는 뜻입니다.
눈은 꺼풀이 이는데, 귀는 꺼풀이 없는 이유? – 눈은 감고 싶을 때 감으면 안보입니다. 귀는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라는 뜻이라고 믿습니다.
귀 – 의식이 있는 동안 가장 늦게까지 열려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는 이유도 최후의 순간까지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을 chance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듣는다’는 말은 단지 귀가 좋아서 분명하게 듣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해력이 뛰어나다는 뜻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듣는 것은 순종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잘 듣고 행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은 부모님의 말씀에 귀기울여 듣고, 그대로 순종한다는 뜻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천국 비유 중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중에서 결실이 일어난 씨앗은 옥토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해석해 주시길,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잘 듣고 지키고 결신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눅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씨앗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잘 듣고 지키어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듣는 자가 살아나고, 듣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2) 구원의 두 번째 조건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되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믿어지고, 부활도 믿어집니다.
어떤 분은 처음부터 믿어지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처음에는 잘 믿어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믿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느 시점에 믿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결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가?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믿음은 들음에서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다 보면,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들,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가 다 믿어지는 것입니다.
한편 믿음은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는 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신 것과 성경 말씀이 믿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 다 믿어지는 것은 성령의 은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고전12:3절에 의하면, 예수님을 주시라는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아직 믿어지지 않은 분이 있다면 오늘 믿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되 듣는데 그치지 말고 믿고 순종하여 결실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믿는 자들의 두 가지 책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복음전도와 봉사의 책임입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며 또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이 두 책임(전도와 사랑 실천)은 항상 삶으로 표현되어져야 하는데, 우리 주 예수님이 장 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항상 가르침과 복음 전파, 치유 사역이 함께 이뤄졌습니다. 전도와 섬김을 구분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치유해 주시고, 오늘 본문에서는 천국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단지 이 땅에서 건강하게 사는 것, 잘 사는 것에 초첨을 맞추지 않으셨습니다. 죄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고, 생명의 부활에 참여해야 한다고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겐 복음을 전파할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임을 소홀히 여긴다면 주님께 책망을 들을 수 있습니
에스겔서에 반복해서 나오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파수꾼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확대하면, 모든 믿는 사람들은 복음의 파수꾼의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파수꾼은 요즘말로 하면 보초병인데, 군부대에서 적군이 쳐들어 오는가를 주시하고 있다가, 적병이 나타나면, 나팔을 불어서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파수꾼이 정신을 차리고 있다가 경고의 나팔을 크게 불어서, 사람들이 듣고 대비해서 생명을 보존하면 좋겠지만, 혹시 경고의 나팔 소리를 듣고도 대비하지 않아 멸망을 받게 되면, 그 책임은 파수꾼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수꾼이 적병이 쳐들어 오는 것을 보고도 경고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면, 그 책임을 파수꾼에게 찾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피 값을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전도자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이제 복음의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해서 영원한 죽음 아래 사는 사람들을 건져 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전도와 봉사의 책임을 다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한 상급을 주실 줄 믿습니다. 다니엘12:2-3절을 같이 보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 요5:29절과 비슷한 구절이 나옵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칭찬과 상을 받게 되는지 정확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위대한 전도자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는 책무이기 때문에 전혀 자랑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또한 바울은 그 어떤 고난도 복음전도의 사명을 막을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행20:23-24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길지 않은 인생 속에서 사람들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시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여 마지막 때에 주님께 칭찬과 영광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빛나시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