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져 주심
본문/ 막10:13-16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시는 분들에게 “하나님께 가장 감사해야 할 제목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자녀들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자녀의 축복은 축복 중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어요.
또한 자녀를 키우는 분들에게, “가장 힘들고 마음 아픈 일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역시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이라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그만큼 자녀들은 부모들에게 보람이고, 감사의 이유, 삶의 이유가 되면서도 속을 썩이고 아픔을 주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죠.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성경의 핵심 주제는 구원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죄에서 구원을 받을 것인가에 대해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성경 전체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구원에 관한 가르침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즉 성경은 삶의 지침서도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자녀들을 양육하는 분들을 위한 말씀도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자녀 교육에 관한 말씀도 성경에 있어요. 오늘 본문은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주 짧은 이야기지만 우리는 여기서 자녀 교육에 관한 몇 가지 아주 중요한 요소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까 읽어드렸지만, 다시 한 번 읽고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막10:13-16입니다.
1) 첫 번째로,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당시 부모들이 왜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는가 하는 점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것은 예수님께서 만져 주심을 바랬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고 안수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길 원했습니다.(첫째 키워드 : 만져 주심)
13절,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그런데 제자들이 막았습니다. 마가는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노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이 오는 것을 꾸짖는 제자들을 되레 꾸짖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아이들을 ‘만져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보면, 만져 주심은 touch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져 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 만져 주는 것입니다. 터치해 주는 것입니다.
만져 준다는 것은 단지 손으로 만지는 것만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지고, 토닥거리고, 쓰다듬어주고, 안아주고, 뽀뽀해 주고, 흔들어주고, 업어주고 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합니다.
여러분, 아이들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단계에서부터 부모의 만져 주심으로 인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서도 아이들의 심리적, 신체적 건강을 위해서 부모의 손길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말은 못해도, 부모가 만져 줄 때, 사랑 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리적 정신적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일수록 부모의 손길이 더 중요합니다.
대가족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가족들의 손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이 사람이 안아주고, 저 사람이 안아주면서 키웠습니다. 문제는, 요즘 아이들은 그런 사랑의 터치를 받는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핵가족 사회라서, 부모가 바쁠 경우, 아이를 많이 안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겸 소아과 전문의였던 로스 캠벨(Ross Campbell) 은 그의 저서, “진정한 자녀 사랑”에서 자녀들이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하기 위해 세 가지를 부모들이 많이 해 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 그 중에 하나는 눈길입니다. 눈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감정의 그릇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사람들의 마음 속엔 감정의 그릇이 있는데, 이 그릇은 무조건적 사랑과 관심으로 채워집니다.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않으면 감정의 그릇이 고갈되어,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삶의 의욕을 상실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2) 둘째가, 손길입니다. 모든 종류의 신체적 접촉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손으로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세 번째가 집중적인 관심이라고 합니다. 자녀가 여럿일 경우, 각각의 아들에게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여서 사랑을 많이 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칭찬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각 제자들에게 집중적인 사랑을 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마다 주님이 자기를 가장 사랑한다고 착각할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요한은 자신을 표현할 때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닌데도, 요한이 볼 때, 주님이 자기를 가장 많이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집중적인 사랑입니다. 자녀들 하나 하나가 부모님이 자기를 가장 사랑한다고 느낄 정도의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 시절에 사랑과 칭찬을 많이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자랄 때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다든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할 경우, 사춘기나 어른이 되었을 때도 치유 받기 전까지 정서적인 많은 혼란을 겪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부모님들이여, 자녀들에게 눈길, 손길, 집중적인 관심을 통해 사랑을 많이 부어 주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오늘날 자녀 교육에 대한 관심이 참 높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자녀 교육법일까요?
하나의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교육 학자들마다 각각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엄격하게 키워야 한다고 말하는 학자,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학자, 반대로 어렸을 때는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기 보다 많이 놀게 해 줘야 신체적으로도 건강하고 창의적인 아이가 된다고 가르치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자녀 교육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요?
성경은 한 쪽으로 치우지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데, 자녀 교육 철학에 있어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기 보다는 균형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성경에서는 자녀 교육에 대해 훈육하되 사랑이 있는 훈육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무 엄격해서도 안되고, 너무 방임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중간, 균형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1) 왜 사랑 없는 훈육이 문제가 되는가?사랑 없는 훈육, 감정적인 훈육은 아이들에게 마음의 상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훈육은 상처를 준다)
이렇게 양육 받은 아이들은 어렸을 때엔 말을 잘 듣는 아이 같았다가 사춘기를 지나면서 억눌렸던 감정이 분출되면서 통제하기 어려운 청소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자녀 양육에 대한 말씀에서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엡6:4)고 한 것 같습니다.
부모들 중에서 자녀들을 혼낼 때, 사랑하기 때문에 하지, 미워하기 때문에 하는 부모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자녀들이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화를 내고, 자유를 통제하고, 비난하는 것이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미워해서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들을 훈육할 때, 그 동기가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녀들에게 감정의 그릇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용납 포용을 통해 그 감정의 그릇이 채워진다고 합니다.
(2) 반대로 훈육이 없는 사랑으로 인해 아이들이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요즘의 많은 한국의 부모들이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나 싶습니다. 아이의 기를 죽이지 않으려는 의도로 오냐오냐 키우다 보니, 버릇 없고 나약한 아이로 키우는 것입니다. (훈육 없는 사랑은 버릇 없는 사람을 만든다)
그래서 잠언서에는 아이들의 훈육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세 구절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13:24,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현대인들에겐 좀 과하게 들리는 말씀도 있습니다.
잠23:13,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회초리)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예)엘리 제사장은 자녀 교육에 실패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사무엘서에 보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얼마나 나쁜 행실을 범했는지 자세히 나옵니다.
재물로 바쳐지는 고기를 빼돌리기도 하였고, 심지어 회막 문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과 동침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엘리가 자녀들의 악행에 대해 들었을 때, 나무라면서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엘리 집에 하나님의 저주가 내렸고, 결국 전쟁에서 두 아들을 잃고, 법궤도 빼앗겼고, 엘리제사장 자신도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심장마비와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우리가 엘리제사장이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는지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앞뒤 문맥으로 살펴볼 때, 그는 훈육 없는 사랑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무엇이 어떻게 잘못했는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지 않고, 덮어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성장하다 보니, 선과 악의 분별력이 없는 망나니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연구에 의하면, 모든 아이들이 다 같지 않다(다르다)는 것입니다. 쉬운 아이가 있고 어려운 아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머니들도 다 같지 않습니다. 아이를 잘 보살펴 주는 엄마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엄마도 있는 것입니다.
· 체스와 토마스의 연구(미국 정신과 의사 부부)
| 잘 보살펴 주는 어머니 | 잘 보살펴 주지 못하는 어머니 |
쉬운 아이(easy baby) | + + | + - |
어려운 아이(difficult baby) | + - | - - |
이 중에 제일 좋은 경우는 쉬운 아이를 잘 보살펴 주는 엄마와의 관계입니다. 서로 복입니다.
제일 나쁜 것은 어려운 아이인데 불행하게도 잘 보살펴 주지 못하는 엄마를 만난 케이스입니다.
그런데 쉬운 아이를 잘 보살펴 주지 못하는 엄마의 관계보다는 어려운 아이인데 잘 보살펴 주는 엄마를 만난 경우가 휠씬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3) 본문에 또 하나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용납이라는 단어입니다. (둘째 키워드 : 용납)
막10:14절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제자들이 제지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안전상의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역에 지친 예수님을 지키기 위한 이유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어떤 이유로도 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을 얼마나 좋아하시고,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셨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용납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비록 말로 표현하지는 않아도) “엄마, 아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세요!”
용납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허용하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남의 잘못이나 입장, 형편 따위를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물론 여기서 용납이라는 단어는 아이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것을 허용하고 막지 말라는 뜻입니다. )
하지만 저는 이 단어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서로 용납해 줘야 한다는 말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직 많이 어립니다. 경험도 없습니다. 성장 과정에 있지, 다 자란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해 주고 받아줘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 줘야 합니다.
자녀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녀는 처음부터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 자녀들을 각각 다르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둘이면 둘 다 다릅니다. 셋이면 셋이 다 다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신 것처럼 자녀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이 세상에서 사셨던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복음서에 보세요. 예수님께서 거부하거나 거절한 사람이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창녀들, 세리들,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는 두 팔을 벌리고 온 인류를 다 받아 주셨습니다.
눅15:1-2절을 보세요. 사람들이 예수님의 포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군수군거렸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종교적인 바리새인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으로 보였겠습니까?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던 그들에게 예수님이 세 가지 중요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는데, 그 비유가 바로 “잃은 양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들을 사랑하시며, 지금도 회개하고 돌아오길 두 팔 벌려 기다리시는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로서, 용납해야 할 대상 중에 자신도 포함됩니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해 미안해 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지 모릅니다. 모르긴몰라도 오늘 설교를 듣는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이런 죄책감에 시달리는지 모릅니다. 특히 아이들이 어떤 장애를 가졌다는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을 경우, 그것이 부모인 자기 탓이 아닌가 자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께서 부모님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녀 양육에 있어서 과거의 잘못이나 실수로 인해 생긴 죄책감을 내려 놓으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완전한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도 인간입니다. 연약합니다. 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실수까지도 덮어주시고, 자녀들의 성장에 도움이 되게 하셨을 줄 믿습니다.
(간증) 저는 가끔 아내와 이야기하면서 젊었을 때, 부모로서 미숙해서 아이들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준 것은 아닌지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큰 아이(진하) -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당시 아이가 활발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너무 많이 혼을 내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군대에서 목회할 때, 설교 시간에 강단으로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예배를 방해했습니다. 아이 입장에서 너무나 자연스런 행동이었는데, 당시 엄마나 아빠로서 용납하지 못하고 심하게 혼내기도 했던 것 같아요.
자녀들을 키우면서 의외로 부모로서 죄책감에 시달리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많은 부모의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친히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 생각해 보면 바쁘다는 핑계로 잘 돌보지 못할 때가 많았어요. 선교지로 데리고 다닌 것, 수 없이 많은 이사, 우리 부부가 늘 새벽기도 다니느라,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는 아침 밥도 스스로 차려 먹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케어를 많이 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해주지 못한 것들이 많은데도, 잘 커준 것, 대학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는 것 등등을 생각해 볼 때,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이상한 일 중에 하나는 때로는 위대한 인물이 문제가 많은 가정에서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아무 문제 없고, 건강해 보이는 가정에서도 나오지 못하는 인물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한 일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 요셉 – 정말 문제 많은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데요, 도저히 인물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한 아버지에 아내가 넷이 있었습니다. 네 어머니에게서 나온 배 다른 형제들 12명 사이에서는 끊임 없는 시기 질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부르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첫째 큰 어머니, 둘째 큰 어머니 이런 식이었겠죠!)
아버지의 편애로 형제들 사이의 우애가 없었습니다.
결국, 형들이 시기로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가서도 노예 생활, 억울한 옥살이도 2년 이상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가정 환경에서 어떻게 훌륭한 인물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성품 면에서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에스더- 에스더도 세상적으로 보면 도저히 훌륭한 인물이 되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 왕비가 되었습니다.
나라는 망했고, 고국을 떠나 페르시아에서 살았습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사촌 오빠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은혜로 잘 자랐습니다.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었고, 민족의 위기 가운데,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제가 뭘 얘기하고 있습니까?
세상에 완전한 부모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녀 양육의 전문가가 된 후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서툴고 부족하고 때로는 실수하면서 아이들을 키우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1) 자녀들이 자라면서 받는 상처도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십니다.
(2) 상황과 환경도 하나님께서 섭리해 주십니다. 요셉의 경우, 형들의 시기와 악행까지도 하나님께서 섭리해 주셨습니다. 에스더의 경우도 이방 땅에서 고아로 자랐지만, 외모와 와스디 왕비가 폐위되는 과정, 왕의 마음을 얻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섭리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님들이 부족하고, 때로는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솔직히 연약함을 고백하며 자비를 구할 때,하나님께서 치유도 해 주시고, 선하게 섭리해 주신다고 믿습니다. 혹시 자녀로 인해 죄책감에 시달리는 분이 있다면, 오늘부터 내려 놓으세요.
2) 본문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단어가 ‘축복’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은 만져 주시고, 축복해 주시길 원해서 였을 것입니다.
막10: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세째 키워드: 축복)
예수님은 부모들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에 아이들을 안고 안수하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자녀에 대한 최우선적인 축복의 권한을 가진 분은 부모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 특히 아버지의 축복- 100% 자녀에게 이뤄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야곱과 에서가 서로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기필코 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축복은 고도의 믿음의 행위입니다. 믿음으로 축복하면 신기하게도 그대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자녀들에 대한 꿈을 그리면서 믿음으로 축복해 주시면 그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시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막을 때 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축복을 받아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아이들도 축복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예수님을 대신해서 부모님들이 많이 안아 주시고 많이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여러분의 자녀들을 축복해 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자녀를 양육할 수 있다는 것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아이들보다 부모들이 더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성숙해 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습니다. 기도하게 됩니다. 아이들 때문에 신앙적, 인격적 성숙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애 아이를 키우니까, 장애우를 둔 부모들은 항상 불평하고 원망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장애우의 부모는 그 장애 아이를 통해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바꾸고 싶지 않아요. 이런 아들이 있어 오히려 다행이예요.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테니까요. 아이를 생각하면 정상 상태가 좋겠지만, 그간 내가 배운 것을 생각하면 유감이 없어요.”
여러분,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죠.
건강한 아이든, 장애를 가진 아이든, 아이를 키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힘든 아이를 키우게 되면, 영적으로 더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부모의 마음은 똑같을 것입니다. 아이가 건강하고 순하고, 똑똑하여 뭐든지 다 잘하면 좋겠지만, 그러나 자녀를 우리가 초이스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힘든 아이를 맡겨 주셨다면, 기억하세요. 어렵고 힘든 아이일수로 부모로서 키우면서 받는 은혜는 더 크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귀한 아이들을 맡겨 주심에 감사하시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아이들- 사랑으로 키우셨으면 합니다. 만져 주시고, 용납하시고,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함께 기도합니다.
(1) 귀한 자녀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자녀들을 축복하는 기도 드립니다.
(2) 코로나 19 사태가 속히 지나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3) 가정의 달을 맞아서 각 가정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부부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회복을 위해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