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본문/ 요4:1-26
인간에겐 여러 욕구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 중에 무슨 욕구가 가장 강렬할까요?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성적 욕구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육신과 관련해서는 물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려는 욕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배가 고플 때 음식에 대한 욕구도 강하지만, 음식보다 갈증 해소 욕구가 더 강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상에서 “내가 배고프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조금 있다가 더 말씀을 나누겠지만, 인간에게는 육체적인 욕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욕구도 있고, 무엇보다 영적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채워져야, 진정으로 만족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3장과 비교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3장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면, 4장에는 예수님과 어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입니다.
(1) 니고데모는 유대인 남자, 종교적으로 바리새인이요, 신분이 고귀한 산헤드린 회원었습니다. 부자였습니다.
(2) 사마리아 여인은 이름도 나와 있지 않으며, 유대인들로부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사마리아 여자였으며, 도덕적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던 비천한 여자였습니다.
이 둘은 천양지차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각각 어떻게 예수님과의 만남이 성사 되었을까요?
니고데모는 밤에 찾아오긴 했지만, 그가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먼저 찾지 않고, 니고데모가 먼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 예수님이 직접 찾아가서 만나 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사람의 맘 속까지 아시는 주님께서 사마리아 우물 가에서 정오에 그 여인이 나타나실 것을 아시고, 그곳에서 만나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마음은 낮은 자리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부모에게 여러 자녀들이 있을 때, 부모의 마음은 부족한 자녀에게 가 있는 것입니다.
1) 먼저 본문 요4:1-4절을 읽어봅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셔야 하겠는지라.”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사 갈릴로 다시 가시려고 하신 이유에 대해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과 세례 요한의 사역이 경쟁 관계처럼 비춰지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일부러 떠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지난 주 말씀을 나눈 것처럼), 굉장히 겸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만 높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더 겸손하면 겸손했지 그보다 못하지 않으셨습니다. 조금도 이기심이나 경쟁심, 허영심이 없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빼앗아가는 것처럼 비쳐지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어서 서둘러 갈릴리로 가셨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서로를 세워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경쟁하지 않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세워주는 이런 관계를 세워갔으면 합니다. 우리도 성도들 간에, 사역자들 간에, 교회와 교회 간에 서로 경쟁하기 보다 서로 사랑하며 세워주는 관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그런데 본문에서 저자는 예수님이 유대지방에서 갈릴리로 가실 때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 가시고자 하셨음을 강조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다른 길로 가지 않고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시고자 하셨을까요? 중요한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나실 사람이 있었습니다.
(1)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에서 몹시 피곤한 상태로 우물 가에 앉아 계셨습니다. 한 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도보로 몇 시간을 걸었기 때문에 지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치고 목마른 상태에서 우물 가에 앉아 계셨던 것입니다. 시간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한 낮이었습니다.
(2) 바로 그 시간에 한 여인이 물을 길러 나타났습니다. 보통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에 물 길러 다니는 법인데, 좀 이상합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우리가 모르지만,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스스로 조금씩 오픈해가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그녀는 굉장히 외롭고, 불안하고,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 피하는 상황에 놓인 여자였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요4: 7-9절을 함께 읽어봅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세상에 유대인들처럼 배타적이고, 혈통을 중요시하는 민족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이방인의 피가 섞여 있다고 하며, 철저히 배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지역을 통과하시고자 하셨지만, 일반 유대인들은 유대지방에서 갈릴리 지방으로 갈 때, 사마리아 땅을 통과해서 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중해를 따라 가든지, 아니면 요단 강 길을 따라 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마치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처럼 경계했습니다. 이방인의 부정이 감염되지 않을까 경계했던 것입니다.
“상종하려 하지 않았다” – ‘함께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로 보면, “Jews do not share things in common with Samaritans.” 즉 유대인들은 같은 기구나 시설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까지 미국에서 백인들은 흑인들과 아무 것도 공유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식당, 화장실, 심지어 Water fountain까지 공유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왜 차별하고 따돌렸을까요?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주전 722년 북왕국이 앗수르에 멸망 받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앗수르 왕은 이스라엘 사람의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 다른 민족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켜 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혼혈민족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 이후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같은 유대인으로 보지 않고 이방인 취급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철처히 배척을 받던 사마리아 여인이 유대인 남자인 예수님께서 말을 걸어오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3)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만민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특히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마태를 불러 제자를 삼으시고,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마9:12-13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눈엔 가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처 받은 영혼은 더 소중합니다.
세상에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가서 구원해 주시고자 하십니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소외 당하고 배척 받는 자가 있다면, 주님은 그런 사람을 우선적으로 찾아 만나주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4) 요4:10-14절을 보세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아이에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요4:10절, 예수님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앞에서는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하셨는데, 이제 예수님이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려운 말씀은 아니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겐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었는데, 사마리아 여인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요4:11-12절, 사마리아 여자 :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
사마리아 여자는 생수를 마시는 물로 이해했습니다.
요4:13-14절,예수님 : 예수님은 그 여자를 나무라지 않고, 다시 생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5)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의 주제가 점점 더 핵심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처음에 갈증과 물을 소재로 대화가 시작되었는데, 이제 다른 종류의 갈증과 물에 관해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가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이 여자의 문제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 여자를 부끄럽게 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그녀의 외로움과 두려움, 영적 갈증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이 여자가 솔직하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남편이 없나이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여자는 요즘 말로 하면, 성중독자인지 모르겠습니다. 외로움으로 인해 성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공허함, 외로움은 남자가 채워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새로운 남자를 만나도 가슴에 뚫린 구멍을 메울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셔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인간의 갈증, 목마름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사마리아여자와 똑 같지는 않지만, 채울 수 없는 영적 갈증을 다른 무엇인가로 채워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술이나 마약, 일, 돈, 지식 등을 통해 채워보려고 하지만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인간의 영적 공허함을 채워 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공허함, 갈증을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요4:13-14절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6) 사마리아 여인은 의도적이었는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났는지 모르지만 예수님과의 대화의 주제를 예배로 옮겨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배에 대한 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요4:19-20절을 보세요.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하더이다.”
(a) 예수님은, 예배는 어디서 드리느냐 장소적 개념보다 누구에게 드리느냐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알고 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요4: 20-22절을 다시 보세요. “우리 조상들을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우상에게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세상에 예배를 받으실 유일하신 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b) 누구를 통해서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엔, 구약의 시대와 달리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벨이 어린 양을 잡아 피 있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처럼,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c) 또한 예배자의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요4:23-24절을 보세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벨을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물의 차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예배자의 자세의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장인 히브리서11장에서 말합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나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이번이 코로나바이러스사태로 인해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많이 있는데요, 비록 예배당에 나오지는 못하지만, 가정에서도 예배드리는 자세에 따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배가 아벨의 제사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배 때에 사람을 의식하기 보다 영이신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 영으로 예배한다는 뜻 – 마음과 혼이 담긴 예배를 말합니다. 형식적인 예배에 대한 반대 개념입니다.
- 진리로 예배한다는 뜻 – 사마리아 여자가 자신의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마스크(가면)을 쓰고 나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이런 마스크는 괜찮지만, 다른 종류의 마스크-가면-은 안됩니다. 예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죄가 교만과 위선(hypocrisy)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 처음부터 영적 존재요, 영적 갈증을 갖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 외에는 메꿔줄 수 없는 구멍이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채울 수 없는 갈증, 예수 그리스도만이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영적 욕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전3:11a,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사람은 짐승과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며,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으며, 죽어도 육신은 흙으로 돌아갈지라도 영혼은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전3:20-21)
(결론)
세상에서 어떻게 말하든, 과학에서 어떻게 말하든, 변할 수 없는 진실은 인간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채워지지 않은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으시다, 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시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인간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요4:25-26절을 보세요.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사마리아 여자가 얼마나 놀랐을까요? 얼마나 기뻤을까요?그 메시야를 직접 만난 것입니다.
(너무 기뻐서 물 길러 왔던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달려 갔습니다.)
인간이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영적 공허함, 갈망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예배를 통해서 영적 갈증이 해소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실패하면 다 실패하는 것입니다. 가인을 보세요. 왜 그가 시기와 미움으로 가득 찼으며, 동생을 죽이기까지 했나요?예배에서 실패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니, 마음의 시기, 미움을 다스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를 소홀히 하지 마시고, 예배의 실패자들이 아닌 성공자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예배 때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인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마시며 사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