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가 말을 한 이유

민 22:21-30

 

   교훈을 주기 위해 사용하는 이야기방식 가운데 ‘우화’(fable)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로 동물을 등장시켜서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게 하고, 그 동물들이 빚어내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교훈을 주려는 설화(說話)를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이솝우화가 있습니다.

 

   이 우화의 특징은 등장하는 동물들이 사람처럼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앵무새처럼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똑같이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 사자, 황새 등 수많은 동물들이 사람처럼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나귀가 말을 합니다. 마치 이솝우화에 나오는 동물이 말을 하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것도 직접 사람과 대화를 합니다. 그러면 본문 이야기가 우화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우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작가가 만들어 낸 가상의 동물일 뿐입니다. 마치 만화영화에 나오는 동물들이 말하는 것처럼 꾸며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나귀는 진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을 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우화가 아니라 이적 이야기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나귀가 말을 하게 됐을까요?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광야행군을 한 지 40년이 다되어갈 때입니다. 저들이 요단강동편 모압평지에 진을 치게 됐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때 모압의 왕 발락이 겁이 났습니다. 주변나라 아모리와 바산이 이스라엘에 맞서다가 땅을 빼앗겼고 나라가 망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당시 유명하다는 점술가를 초청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함으로써 이 상황을 모면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신들을 유브라데 강가 브올에 살고 있던 점술가 발람에게 보냈습니다. 사신들이 복채를 주며 함께 가기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발람이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거절했습니다. 발락 왕이 이번에는 더 높은 지위의 사신을 보내서 원하는 것 다 해줄 테니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갈 테면 가는데 말씀하신 것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발람이 나귀를 타고 두 종과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 길을 막으셨습니다. 나귀가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갔습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포도원의 좁은 길에서 길을 막았습니다. 나귀가 보고 몸을 담에 대고 피했습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피할 데가 없는 좁은 길에서 길을 막았습니다. 나귀가 발람 밑에 엎드렸습니다.

   발람이 화가 나서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서서 말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발람이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고 말했습니다. 나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발람이 “없었느니라”고 답했습니다.

 

   그제야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자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습니다.

   그러면 나귀는 왜 말을 하게 됐을까요? 나귀가 말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눈 뜬 장님

 

   나귀가 말을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발람이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면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배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라고 되어있고, 25절을 보면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라고 되어있고, 그리고 27절을 보면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라고 되어있습니다. 나귀가 세 번이나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죽이려고 앞에 서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발람은 나귀가 본 것을 보지 못하고 나귀를 세 번이나 때렸습니다. 왜 가지 않느냐고 때린 것입니다. 나귀도 본 것을 발람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답답한 마음에 나귀가 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말에 “눈 뜬 장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무엇을 보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을 이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보면서도 실제로는 보지 못하는 답답함을 느끼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연암 박지원의 [요술이야기 후지]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화담 선생이란 분이 외출 나갔다가 길에서 울고 있는 자를 만났다오. "너는 왜 우느냐?" 물으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오.

  "저는 세 살에 눈이 멀어 지금 마흔 살입니다. 예전에 길을 갈 때는 발에 보는 것을 맡기고, 물건을 잡을 때는 손에 보이는 것을 맡기고, 소리를 듣고서 누구인지를 분간할 때는 귀에다 보는 것을 맡기고, 냄새를 맡고서 무슨 물건인가를 살필 때는 코에다 보는 것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길을 가는 도중에 두 눈이 별안간 맑아지고 눈동자가 저절로 열렸습니다. 천지는 드넓고 산천은 뒤섞여 온갖 사물이 눈을 가리고 온갖 의심이 마음을 막았습니다. 손과 발, 코와 귀는 뒤죽박죽 착각을 일으켜 온통 예전의 일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집이 어디인지 까마득하게 잃어버려 홀로 돌아갈 방법이 없기에 울고 있습니다."

  그러자 화담 선생이 말했다오. "네가 지팡이에게 물어본다면 지팡이가 응당 저절로 알 것이다." 그러자 소경이 말했다오, "제 눈이 이미 밝아졌으니 지팡이를 어디 쓰겠습니까?" 화담 선생이 말했다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바로 거기에  네 집이 있을 것이다.

 

   40년간 소경으로 살 던 사람이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눈으로 들어온 보이는 것들이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눈 감고 있을 때 찾아갈 수 있던 집을 오히려 눈을 뜨고는 찾아갈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뜨고 오히려 과거에 보던 것을 보지 못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눈 뜬 소경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발람이 그랬습니다. 높은 자리를 보장 받고,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마음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온통 마음은 높은 자리에 올라 목에 힘줄 일들 생각에 들떠있습니다. 그리고 무슨 소원을 말할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약속을 듣기 전에 얼마든지 볼 수 있었던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약속을 듣기 전까지 여호와의 음성을 듣던 사람인데 여호와께서 보내신 사자를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눈 뜬 장님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겨 버리면 영안이 닫히고 영적인 감각이 마비되어버립니다.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하게 됐던 것처럼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고 영적인 것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을 묵상해도 영감을 얻지 못하고 주의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기도의 문이 닫히고 주님과의 영적 소통이끊어집니다. 그래서 막 8:18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라고 책망하신 것처럼 그렇게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오해

 

   본문을 보면 나귀가 말을 했지만 말을 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2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귀를 통해서 발람에게 말씀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귀를 통해 발람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셨을까요? 어렵지 않게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발람을 책망하려 하신 것입니다. 먼저 발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것을 책망하려 하셨습니다.

 

   발락 왕이 처음 보냈던 사신들이 왔을 때 발람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을 자들이니라” 발람이 이 말씀을 듣고 분명하게 가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신들이 왔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니 당연히 거절해서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파격적인 제안을 받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하도 가고 싶어하니까 갈 테면 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가서 절대로 그들이 해 달라는 대로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말씀은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발람은 이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가라는 말씀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분노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셔서 길을 가로막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가지 말라는 것인데 발람이 가도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왜 발람이 이렇게 오해를 했을까요?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파격적인 제안을 받고 보니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그 말씀을 오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우수개소리가 기억이 납니다.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모처럼 곱게 단장을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햇살이 고운 한적한 길을 걸으며 오랜만에 처녀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립니다. “같이 가 처녀!” 누구한테 그러나 살펴보니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또 소리가 들립니다. “같이 가 처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니 생선장수 소형 트럭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씩씩하게 생긴 청년이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 뒷모습이 처녀같이 보여서 그러나 착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가방을 뒤적거려 보청기를 찾아서 귀에 끼고 다시 들어보았습니다. 잘 들립니다.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문의 발람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합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못 파악합니다. 그 이유가 듣고 싶은 대로 듣기 때문입니다. 차분하게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들으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욕심이 문제

 

   그러면 앞에서 살핀 대로 발람이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제대로 듣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귀가 말을 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귀를 통해 발람의 욕심을 책망하려 하신 것입니다.

 

   사실 발람은 처음에 발락 왕이 보낸 사신이 찾아왔을 때 복채를 가지고 왔지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절하여 저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직급이 높은 사신들이 와서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민 22:17을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높은 관직도 줄 것이고, 또 무슨 소원을 말하든지 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발람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발람이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신 길을 따라나선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욕심이 눈을 가려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욕심이 귀를 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을 욕심,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욕심 이 욕심이 문제였습니다.

 

   약 1:14-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이 욕심에 사로잡히면 죄를 짓게 되고 죄를 짓게 되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시작이 욕심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미혹됨이니”는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로 ‘델레아조’(δελεάζω)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미끼’라는 뜻의 ‘델로’(δέλλω)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미혹된다는 말은 물고기가 미끼를 물어 낚인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욕심이 그렇습니다. 물고기가 미끼가 탐이 나서 덥석 물고 나면 물 밖으로 끌려나오게 되고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욕심을 뿌리치지 못하고 마음에 품으면 죄를 짓게  되고, 결국은 죄인이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욕심을 제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우리교단의 큰 어른 가운데 한 분이셨던 청량리중앙교회 원로목사이신 임택진 목사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한 번은 이분이 큰 교회의 청빙을 받고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 교회 선임 장로님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가시지 말라고 간청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말씀을 했습니다. “목사님! 그 교회가 사례비를 많이 드린다고 해서 가시려는 것입니까? 그러면 우리교회도 다음 달부터 그 교회가 준다는 것만큼 드릴 테니 가지 마십시오.”

  목사님께서 그 말을 다 듣고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시장의 소는 부르는 사람에 따라 값이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지만 나는 소시장의 소가 아닙니다.” 결국 목사님은 기도 끝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고 큰 교회로 가시지 않았고, 그렇다고 사례비를 올려 받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교회를 끝까지 목회하시다가 명예롭게 은퇴하셨습니다.

 

   임 목사님께서 탐나는 제안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선임 장로님으로부터 뜻밖의 제안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시면서 둘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셨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제안을 다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미끼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둘 다 미끼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 미끼들을 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여기저기 미끼가 널려있습니다. 자칫 덥석 그 미끼를 물기 쉽습니다. 물면 끌려가는 것입니다. 욕심에 사로잡혀 죄를 짓게 되고, 그러다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미끼를 물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인가 욕심나는 것이 나타나면 긴장해야 합니다. 그것이 미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차분하게 먹이인지 미끼인지를 확인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으로 나가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도 잘 모르겠거든 멘토나 기도 동역자들과 상의해 보십시오. 함께 기도하며 확인해 보십시오. 그들은 나귀처럼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내가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욕심이 문제입니다. 아담이 인류최초로 죄를 짓게 된 것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싶은 욕심이 발단이었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 주변에도 따먹고 싶은 열매가 널려있습니다.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이 흔들리고 욕심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욕심인 줄 알아야 하고, 그 욕심을 떨쳐버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