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명자의 삶 9

“받은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라”

(사무엘하 5:1-3)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영화를 좋아하십니까? 지금까지 보신 영화 중에 가장 감동적인 것을 하나 뽑으라고 한다면 어느 영화를 뽑으시겠습니까? 저는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을 뽑겠습니다. 3부작으로 된 이 영화는 원래 톨킨(J. R. R. Tolkien)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것인데, 엄청난 대작이고 원작부터가 굉장한 대작입니다.

 

지난 2001년의 1부, 2002년의 2부에 이어, 2003년에 나온 3부 <왕의 귀환(The Return of the King)>으로 끝났는데, 최근에 <호빗(The Hobbit)>이라는, 그보다 전에 쓴 작품을 가지고 만든 속편 영화가 또 나와 요즘 상영되고 있습니다. 그 영화가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 오죽하면 그때 저와 제 아내가 한 살도 안 된 우리 아이를 누구에게 맡기고 가서 볼 정도였습니다.

 

그 영화가 감동적이었던 것은, 인간 세계를 없애려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악의 우두머리인 사우론(Sauron)이 만든 절대 반지를 없애기 위해, 일반 사람보다 작은 호빗 족의 프로도 배긴스(Frodo Baggins)라는 청년과 그의 세 친구가 그 임무를 맡아서 길을 떠나 마침내 그 사명을 완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중간에 수많은 위험을 만나고 죽을 뻔한 위기를 수없이 넘깁니다. 또 반지 때문에 골룸이라는 괴물도 만나 배신을 당해서 죽기 직전에 친구의 도움으로 살아나는 등, 온갖 어려움을 다 극복하고 마침내 그 반지가 만들어졌던 악의 세력의 중심부로 들어가 그 불길 속에 반지를 떨어뜨려 없앰으로 사명을 다합니다.

 

이렇듯 사명은 평범한 사람의 인생을 감동적으로 만들어줍니다. 사실 인생 가운데 사명이 들어가지 않으면 별 감동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많이 벌었다, 그래서 그냥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리고 그냥 죽었다... 여기에 무슨 감동이 있습니까. 어떤 사명을 받아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 가는데, 그 길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그 사명 때문에 멈추지 않고 가다가 마침내 그것을 이루었다... 이런 이야기에 감동이 있습니다.

 

사명이 있어야 감동이 있습니다. 또 사명이 있을 때 그 인생이 남들에게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 인생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의 가슴이 뜨거워진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의 삶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사명도 함께 주셨습니다. 정확히 구분해서 말하자면, ‘소명’은 부르심(calling)이고, ‘사명’은 임무(mission)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사명을 함께 주셔서 그것을 이루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사명이라는 단어는 우리 인생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사명이 없이는 인생이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명이 없으면 우리 삶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알려줍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낭떠러지를 향해 빨리 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멸망입니다. 그런데 사명은 꼭 필요한 삶의 방향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나가면서 어려움을 만날 때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까지 줍니다.

 

그래서 사명이 중요합니다. 사명을 받는 순간부터 그 사람에겐 삶의 방향이 생깁니다.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처럼, 중간에 수많은 어려움을 만날 수 있지만,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그래서 어려울 때면 더욱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그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어렵다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넘어지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사명을 모르는 겁니다. 사명을 안다면 그냥 불평하고 절망하고 주저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명을 안다면 일어서서 나아갑니다.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1.  사명을 이룬 사람들

 

성경을 보면,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사명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것을 위해 인생을 산다’고 한마디로 그 인생 전체를 정의할 수 있는 그런 사명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인생을 살지? 나는 왜 살지?’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한 문장으로 사명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 아브라함

 

그 중 하나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 하면 생각나는 게 뭐가 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가장 뚜렷한 것은 복의 근원입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장). 이 한 문장으로 그의 삶이 정의됩니다.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가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거기 또 기근이 들어서 애굽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그 긴 여정을 통과하면서, 물론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질렀지만, 그가 결코 중간에 완전히 빗나가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멈추지 않고, 제대로 믿음의 길을 갔던 이유와 비결이 뭡니까? 그것은 복의 근원이 되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과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그의 평생 있었습니다. 사실 아직 자녀가 하나도 없을 때 그는 그에게 주신 사명을 붙들었습니다. “네 후손들이 저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자녀가 하나도 없을 때 믿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험한 세상에서 버티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그는 복의 근원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사명에 있었습니다.

 

 

2) 세례 요한

 

신약에서 보면 세례 요한이 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입니까? “주의 길을 예비하라!” 이 사명 때문에 그는 삶 가운데 자칫 잘못하면 완전히 빗나갈 수 있었던 때에도 놀랍게 그 길을 지킨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의 삶 가운데 가장 위기가 언제였습니까? 헤롯에 의해서 핍박을 당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죽음의 위협을 당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그의 위기는 그가 한창 성공할 때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가 메시야인가 아닌가 주목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받기 위해 다 나올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때 일반 백성들만 그에게 나온 것이 아닙니다. 군인들, 세리들, 바리새인들, 제사장들까지 다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다 나와서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을 때, 그가 성공의 길을 가고 있었을 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을 때, 바로 그때가 사실은 그에게 최대 위기였습니다. 그때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그래, 바로 나다. 내가 그 사람이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등장하시는데, 그럴 때 꼭 옆에서 자극을 하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안 해도 될 이야기를 아주 열심히 해주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 3:26)

 

얼마나 듣는 순간 갈등이 일어나겠습니까? 나에게 오던 사람들이 다 그에게 간다? 순간적으로 얼마나 갈등이 되겠습니까? 잘못하면 넘어가는 겁니다. 타락하는 겁니다. 요한이라고 사람들이 자기에게 오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요한이라고 자기 세력을 늘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세례 요한이 뭐라고 말합니까?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 3:27-30)

 

정말 기가 막히게 멋진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 외에 성경에서 가장 멋진 말입니다.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받을 수가 없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사람이 바로 너희가 아니냐. 그러니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제대로 증거하라. 나는 친구의 기쁨으로 충만하다.” 그래서 그런 세례 요한에 대해 예수님은 지체하지 않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보다 더 나은 이가 여기 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사람이 그 사람이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는 그 사명이 세례 요한을 붙들어주었습니다. 그 사명이 없었으면 그는 이단의 괴수가 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받은 사명 때문에 다 내려놓고 자기 길을 그렇게 아름답게 걸어갔습니다. 이게 사명입니다.

 

 

3) 베드로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큰소리 치더니, 바로 가서 세 번을 부인했습니다. 그 후 실망하고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간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세 번을 물어보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고 하니까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고 목양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후 그는 성령을 받고 나서 담대히 외치며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 중 베드로의 외침을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외치며 점점 더 교회가 일어나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또 베드로의 가장 위기가 언제였는가? 말씀을 전하다가 잡혀서 감옥에 갇혔을 때가 아닙니다. 사도들 중 요한의 형인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데, 그것을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좋아하니까 헤롯은 베드로도 잡아서 감옥에 집어넣습니다. 다음 날이면 이제 그도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가 그의 위기가 아닙니다.

 

물론 천사가 와서 그를 풀려나게 해줍니다. 하지만 그렇게 핍박 받고 어려울 때가 그의 위기가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엄청나게 자라고 있는데,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요즘 말로 담임목사였고, 베드로도 그 교회의 가장 핵심 리더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다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 중심으로만 나아가고 선교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니까, 원래 주님의 뜻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에서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안 하니까, 핍박을 일으키셔서 다 흩어지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선교의 중심축을 옮겨서 안디옥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디옥 교회의 바나바와 또 바울을 크게 쓰셨습니다. 바로 그때가 위기입니다.

 

베드로 입장에서 보면, 눈에 가시 같은 사람이 바울입니다. 사사건건 베드로를 물고 넘어진 사람이 바울입니다. 사실 바울은 베드로에게 맞설 ‘급’이 안 됩니다. 그는 교회를 핍박하다가 나중에 들어온 까마득한 후배이고,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편지를 쓰면서 주님이 자기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가는 곳곳마다 큰 소동을 일으키는데, 그래도 교회를 계속해서 세워갑니다. 베드로가 인간적으로 보면, 바울은 자기 세력을 점점 더 확장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를 보면,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같이 밥을 먹다가 예루살렘의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오니까, 사실은 교회의 질서와 화목을 위해서 쓸 데 없는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으니까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위선자라 그런 게 아닙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은 어차피 유대인 중심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는 이방인 중심의 사역을 하고 있었으니까, 유대인 사역과 이방인 사역 사이의 간격을 잘 메우고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 잘해보기 위해 그 자리에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일어난 것인데, 바울이 거품을 물고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위선자라고 막 몰아붙였습니다. “네가 유대인으로 살지도 못하면서...” 여러분, 이런 말을 들을 때 참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그렇게 인신공격을 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십니까?

 

베드로를 굉장히 기분 나쁘게 하고 공격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게다가 “나와 바나바도 게바(베드로)처럼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한이 없는 줄 아느냐?”라고 하질 않나. 아니 장가 못간 건 자기 잘못이지, 남이야 아내를 데리고 다니든 말든, 자기가 무슨 상관입니까. 그걸 뭐라 하질 않나, 편지에 쓰지를 않나, 정말 화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루살렘 회의에서 바울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그를 세워주지 않습니까. 바울을 세워주고 자기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집니다. 무엇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어떻게 베드로가 그럴 수 있었습니까? 베드로는 감정이 없나요? 상처 안 받는 사람인가요? 그도 감정이 있고, 상처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과 상처보다 더 큰 게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내 양을 치라.”는 주님의 사명입니다.

 

사명은 사람을 그렇게 바르게 합니다. 사명은 신앙인으로 하여금 제대로 믿게 해줍니다. 결코 감정이나 상황에 휘둘리지 않게 해줍니다. 왜 사소한 일을 가지고 감정이 상하고 마음이 틀어지고 서로 안 보겠다고 난리를 치고 그럽니까? 사명을 모르는 겁니다. 사명을 아는 사람, 사명을 붙드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 기분 나쁩니다. 마음이 상합니다. 화도 납니다. 그러나 사명이 그것보다 더 큽니다. 그래서 참고 인내하고 다 내려놓으며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자기 기분이 상했다고 홱 돌아서고 다시는 안 보겠다고 하고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받은 사명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함께 뛸 수 있는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렇게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복음이 우리까지 오지도 않았습니다.

 

 

4) 바울

 

그렇다고 바울이 완전히 형편없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실 바울이 얼마나 대단한 사도입니까. 그에게 주신 사명은 뭡니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는, 특히 이방인들에게 전하라는 것이 사명입니다.

 

수많은 역경을 겪으면서, 갈등하고 싸우면서, 몸이 아프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까지, 그는 절대 멈추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를 읽어보십시오. 그는 수도 없이 어려움을 당하고, 아프고, 40에 한 대를 감한 매(39대)를 여러 번 맞았고, 배도 파선되고, 엄청난 시련들을 당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도와주든 떠나든, 한결 같이 그 길을 걸어갔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사명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행 20:24)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빌 3:12-14)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딤후 4:7-8)

 

이 말씀들을 보면서 떠오르는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오직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사도 바울의 그 헌신된 모습입니다.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그 사명 때문에 그는 멈추지 않고 달렸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힘 있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가 받은 사명입니다.

 

 

2.  다윗의 사명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에게도 이런 사명이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전일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는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라.” (2-3절)

 

여기서 백성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사명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목자,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 다윗에게 주신 사명이라는 것을 다윗 자신도 알고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 이 사명이 그의 삶의 방향을 잡아주었습니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나침반처럼 방향을 잡아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이전에 다윗에 대해 살펴볼 때 보았지만,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때 분명히 인간적으로는, 감정적으로는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옆에서 부하들도 “죽입시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안 죽일 수 있었습니까? 사명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하는 사명. 만약 왕인 사울을 죽였다면 쿠데타로 왕이 되는 것인데, 그러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지 못합니다.

 

나중에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해서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 피해서 갈 때, 시므이라고 하는 사울의 친족 베냐민 지파 출신 사람이 나와서 다윗을 저주합니다. 사람이 제일 나쁜 게 뭐냐 하면, 그렇게 어려울 때 와서 짓밟는 겁니다. 시므이가 다윗이 어려울 때 그에게 그렇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때도 부하들은 죽이자고 했고 그럴 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를 안 죽입니다.

 

나중에 일이 잘 풀려서 다시 왕좌로 돌아왔을 때, 시므이가 또 나타나 살려달라고 합니다. 다윗은 ‘네가 한 일을 네가 알지?’ 하면서 당연히 죽일 수 있었지만, 다윗은 시므이를 그때 또 안 죽입니다. 만약 시므이를 그때 죽였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 전체에 분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베냐민 사람들이 또 떨어져 나갈 수가 있습니다. 안 죽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로 너희가 오늘 나의 대적이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삼하 19:22)

 

스루야의 아들들은 요압과 아비새와 같은 장군들이고, 자기 조카들입니다. “저렇게 우리를 힘들게 한 놈이니까 죽여 버립시다.”라고 했을 때 “너희가 왜 내 원수가 되려 하느냐?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합니다. 이게 뭡니까? 사명입니다. 자신은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라는 사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일부의 왕이 아니라 전체의 왕입니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왕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명이 다윗으로 하여금 방향을 잃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2) 다윗에게 사명은 기다릴 수 있고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기간을 정해주고 몇 년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정말 힘든 겁니다. 어떻게 그는 10년을 기다릴 수 있었을까? 그 사울이 언제 죽을지 알 수도 없는데 10년을 어떻게 참았습니까? 사명 때문에 기다릴 수 있었던 겁니다.

 

가드 왕 아기스에게 망명을 해서 가 있을 때, ‘그래, 이스라엘에서 환영받지 못하니까 그냥 블레셋에서 살지. 왕은 무슨 왕? 그냥 이대로 블레셋에서 신하로 살면 편하지.’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사명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글락에서 아말렉에게 약탈당했을 때 절망적이었습니다. 자기 사람들이 자기를 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힘을 내서 일어나 갈 수 있었는가? 사명 때문입니다. 사명이 돌파하는 힘입니다. 사명이 뚫고 나가는 힘입니다.

 

 

3) 뿐만 아니라 사명은 상황을 이해하는 지혜를 줍니다.

      

사명 있는 사람이 지혜롭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명 있는 사람은 방향을 보기 때문에 상황을 이용할 줄 압니다. 그러나 사명을 모르면 상황을 이용할 줄 모르고 오히려 환경 탓만 하게 됩니다.

 

시글락에서 다윗이 적들을 쳤을 때, 치고 나서 돌아온 후 아기스 왕에게 보고할 때는 유다를 쳤다고 했습니다. 그 지혜가 어디서 나왔는가? 방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이스라엘 왕이 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 아말렉을 치고 빼앗은 전리품들을 유다 장로들에게 보낼 지혜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사명 때문입니다. 사명 있는 자가 방향을 알고 사명이 지혜를 주고 사명이 해결 방법을 찾습니다. 결국 사명이 다윗을 올바르게 세웠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사명이 중요합니다.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사명이 없으면 절대로 우리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3.  사명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사명이 있는 건 알겠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어떻게 발견합니까? 이 질문이 남습니다. 많이 있겠지만, 특히 이 세 가지를 통해 우리는 사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역할, 위치)이 사명입니다.

 

제 아들이 저를 아빠라고 부릅니다. 그게 제 사명입니다. 제 아내가 저를 남편이라고 부릅니다. 그게 제 사명입니다. 아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은 그게 사명입니다.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진 분은 그게 사명입니다. 아들이라는 이름을, 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그게 사명입니다.

 

목사라고 사람들이 저를 부르는데 그게 제 사명입니다. 장로라는 것이 사명입니다.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가 사명입니다. ‘저는 아무 직분이 없는데요.’라고 하십니까? 성도! 그리스도인! 그게 사명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내게 주어진 어떤 이름, 역할, 위치가 사명입니다.

 

어떤 이름을 갖고 계십니까? ‘난 아무 이름도 없어요.’ 그럴 순 없습니다. 다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이름이든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나의 주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기대와 시선이 사명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위선적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이목을 의도적으로 끌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며 기대하는 눈길이 있습니다.

 

제가 목사인데, 목사를 바라보며 기대하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 시선을 실망시키면 안 됩니다. 목사인데도 “오늘은 제가 마음이 상해서, 기분이 나빠서, 컨디션이 안 좋아서 설교를 못하겠습니다.”라고 할 수 없는 겁니다. 그 기대를 짓밟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사명입니다.

 

여러분의 가족들, 주변 사람들, 아는 사람들, 성도들, 친구들이 여러분을 바라보면서 기대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이름과 연결되어서 말이죠. 그게 사명입니다. 만일 그들의 기대와 시선이 있는데 그것을 채우지 못하고 빗나가는 행동을 하면 그들에게 실망과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건 사명을 망가뜨리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혼자 사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게 힘들어서 개인주의로 나갑니다. 남들은 생각 안 하고 내 맘대로 삽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자기는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살고, 하고 싶은 일 다 하며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개인주의는 이 시대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 중 하나입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지 내 맘대로 산다, 그건 바른 게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그 기대가 사명입니다.

 

 

2) 주어진 환경이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것, 하나님이 나를 심어놓으신 곳, 그게 사명입니다. 운명론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삶을 간섭하신다면, 정말로 내 삶을 인도하고 계신다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우연히 있게 된 자리는 아닐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심으신 자리고, 이 일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일 것입니다. 그럼 그게 사명입니다. 아무리 하찮게 보여도, 아무리 별것 아니게 보여도, 아무리 우스워 보여도, 그게 사명입니다.

 

 

3) 생각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가고 거룩한 부담을 가지게 되는 것이 사명입니다.

 

기도하라고 하면 내 속에 기도가 나오는 것,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 이야기할 때마다 자꾸 나오게 되는 이야기가 사명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그 마음을 주시는 겁니다.

 

 

이러한 세 가지 정도면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그 사명을 발견하셔야 되고 그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받은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인생은 분명히 가장 아름다운 인생, 가장 고귀한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