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파수꾼의 사명

(겔 3:16-21)

 

  일전에 초등학교 6학년아이를 둔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이가 글쓰기숙제를 도와달라고 왔더랍니다. 글쓰기제목이 무엇인지 보니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답니다. 그런데 아이는 선생님께서 이 숙제를 내준 의도를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이 제목의 뜻도 잘 모르고 있더랍니다.

  아이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답니다. 아이가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하더랍니다. 이번에는 왜 의사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답니다. 아이가 멋있어보여서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의사가 돼서 뭘 하려고 하느냐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싶다고 답하더랍니다. 그래서 네가 살아가는 이유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라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해주었답니다.

  그런데 이분은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스스로에게 묻게 됐답니다. “나는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고 보니 자기는 스스로에게 살아가는 이유를 물었던 기억이 별로 없더랍니다. 오래 전 학창시절에 생각해 보고는 사는 것이 바빠서 잊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처럼 아이 때문에 자기가 살아가는 이유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것이 바쁘고 살아내는 일이 벅차기 때문에 살아가는 이유를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분명히 살아가는 이유를 붙잡고 살아온다고 왔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철학에서는 두 종류의 인생을 말합니다. 하나는 ‘생존’(生存)입니다.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에 급급한 인생을 말합니다. 하루하루 밀려드는 일상을 마주하고, 해결해야 할 삶의 과제와 씨름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실존’(實存)입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찾으려고 힘쓰고, 그 이유에 충실하게 살려고 애쓰는 인생을 말합니다. 일상 속에서도 살아가는 이유를 놓치지 않고, 그 이유를 좇아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철학에서는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는 생존을 넘어서 실존으로 나가야 한다고 권합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실존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합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는 이 살아가는 이유를 ‘사명’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이 사명은 특별히 예수를 믿고 난 뒤 발견한 살아가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명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살아가는 이유라고 믿는 그 무엇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잘 믿으려면 예수 믿고 난 뒤 새롭게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에스겔서 전체로 볼 때 본론이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앞의 겔 1:1-3:15까지는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그 내용은 에스겔이 부르심 곧 소명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왜 부르셨는지를 말씀하시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에스겔에게 사명을 주시는 이야기요, 에스겔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뒤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주의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명의 발견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우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을 깨우치라는 것입니다. 결국 에스겔은 이스라엘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치는 파수꾼의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에스겔은 원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바벨론이 침공을 받아서 멸망해 가고 있었습니다. 먼저 주전 605년에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유다의 지도자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8년 뒤인 주전 597년에 다시 쳐들어와서 또 지도층 인사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에스겔이 이 때 26살 젊은 제사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에스겔은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에서 눈물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에스겔은 제사장이었지만 성전이 없는 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린 채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주전 593년 그가 포로로 끌려온 지 5년째 되던, 그가 나이 서른이 되던 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습니다. 바로 선지자로의 사명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성전 없는 곳에서 허울뿐이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명이 에스겔을 다시 새로운 삶을 살게 일으켜 세워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줍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고 살던 사람이 분명한 살아야 할 이유를 알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일은 의미 없는 노동이요 먹고 살기 위한 호구지책이지만, 그 일 가운데서 사명을 발견하게 되면 그 일은 더할 수 없는 축복이요 기쁨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자식들은 자기를 힘들게 하는 골칫거리요 짐이지만, 양육의 사명을 발견하게 되면 그 자식들은 보배가 됩니다. 누군가에게 가사노동은 도망치고 싶은 무거운 짐이지만, 가족들을 섬기는 사명을 발견하게 되면 그 일은 사랑의 일거리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명은 우리의 인생을 바꿔놓습니다. 의미 없는 삶을 의미가 가득 담긴 삶으로 바꿔놓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가 넘치는 삶으로 바꿔놓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명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칠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에스겔이 소명을 받은 뒤 칠일 후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그에게 사명이 무엇인지 그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런 부분을 읽게 될 때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으니까 사명인 줄 알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못한 나는 어떻게 사명을 알 수 있을까? 내가 사명이라고 믿는 것은 혹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도 않았는데 내가 스스로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성경에서 사명을 받았다는 사람들 이야기를 읽어보면 거의 대부분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의심하거나 고민할 필요 없이 사명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 오늘 그들처럼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우리는 어떻게 사명을 알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성령입니다.리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면서 우리에게 사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해 주십니다. 때로는 설교말씀을 들을 때, 때로는 성경을 읽고 기도할 때, 때로는 어떤 사건을 경험하면서 내 마음 속에 깨달음이 생깁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어떤 결심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결심을 따라 살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우리는 ‘성령의 감동’이라고 부릅니다.

 

   벧후 1:21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이 말씀은 성경기록 과정에 관한 말씀입니다. 자기가 들은 이야기, 자기가 체험한 사건, 그리고 자기가 써야 할 내용들 이런 것들을 마치 책을 쓰는 저자들이 자기가 구상해서 자기 생각대로 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대신 저들은 성령의 감동을 따라 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성경저자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온 존재 전체를 사로잡으셔서 쓸 마음을 갖게 하시고, 쓸 것을 생각나게 하셔서 그들은 성령에 순종하여 쓴 것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깨달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자는데 꿈속에 환상을 보고 신비한 음성을 듣고 사명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다가, 무엇인가를 위해 기도하다가, 어떤 사건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감동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고 결단하게 하시고 그 길로 나가시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라는 분이 쓴 책 가운데 [이것이 사명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명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남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축복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사명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고통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사명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보다 설레는 꿈이 있는 사람은 단지 그것을 망상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사명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보다 부담되는 어떤 것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짐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사명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남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을 축복으로 여기고 말거나, 남다른 아픔이 있는 것을 고통으로 느끼고 말거나, 남에게 없는 설레는 꿈을 망상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거나, 남다른 힘든 일을 그저 부담으로만 느끼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성령이 감동하시면 이것들 안에서 우리는 사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을 발견하려면 성령의 감동에 민감하십시오. 성령의 역사로 내 안에 일어나는 변화를 살펴보십시오. 특히 성령께서 가슴 뛰게 하시는 일에 주목해 보십시오.

 

 

영적파수꾼의 사명

 

   이제 에스겔이 발견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7절을 보면 “이스라엘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여기서 파수꾼은 성벽이나 망대 위에서 망을 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요즘말로는 군의 경계병을 말합니다. 이 경계병은 적군의 공격이나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미리 대처하도록 알리는 임무를 띤 사람을 말합니다. 이 말은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에스겔을 실제 파수꾼으로 세우셨다는 뜻이 아니고, 영적인 파수꾼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파수꾼의 사명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상황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17절에서 “내 입의 말을 듣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파수꾼의 우선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현재 이스라엘백성들의 상황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잘 듣고 이스라엘 백성의 현재 영적상태를 잘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관점에서 현 상황을 잘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른 관점에서 현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 상황을 잘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공부했던 한 신학자의 명언이 떠오릅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손꼽히는 칼 바르트가 한 말입니다. “한 손에는 성경을 그리고 한 손에는 신문을” 그리고 또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우리에게는 성경과 신문이 정말로 필요하다. 신문은 인간이란 뭔가에 대한 일상적인 기사를​ 매일 제공한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 인간이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다.”

 

   그렇습니다. 영적파수꾼은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또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읽으면서 현재 상황을 남다르게 영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경만 들고 읽기만 하면 세상물정을 잘 모르게 됩니다. 반대로 신문만 들고 읽기만 하면 세상 사람들이 보는 시각만 가지게 됩니다. 이 둘을 함께 들고 읽으면 영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저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 코로나19 사태에 대해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이 일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메시지는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과 신문을 함께 읽으며 영적메시지를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특히 창세기의 바벨탑사건을 읽으면서 신문을 통해 현 상황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우선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 인간이 쌓아온 현대문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기루같이 허망한 것인지를 새삼스럽게 보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첨단과학에 기반을 둔 현대의료체계가 생각지 못했던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맥을 못 추고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제, 사회, 문화 등 현대사회의 눈부신 발전성과들이 속절없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마치 바벨탑 사건에서 보듯이 인간이 쌓아온 현대문명이 무너져 내린 저 바벨탑과 같아 보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악함을 보게 됐습니다.

 

   다른 하나는 알리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듣고 깨달은 점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고대 시대에 파수꾼은 나팔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높은 망루에서 망을 보다가 적군이 쳐들어오면 나팔을 불었습니다. 적이 쳐들어온다고 나팔을 불어 알렸습니다. 영적파수꾼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속에서 깨달은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무엇을 알려야 할까요? 우선 상황을 알려야 합니다. 자다가 깰 때임을 알려야 합니다. 대적 마귀가 다가오고 있는데 졸고 있는 사람들에게 때를 알려야 합니다. 충성하고 헌신해야 하는데 쉬고 있는 사람들에게 때를 알려야 합니다.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이 구원받을 때라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다음으로 죄를 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려야 합니다. 죄 짓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죄 인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를 분명하게 알려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려운 말씀이 나옵니다. 18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파수꾼이 알리지 않을 때 준엄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파수꾼이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지 않아서 예수 믿어야 할 사람이 믿지 못한다면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않아서 회개해야 할 사람이 회개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권하지 않아서 헌신할 사람이 헌신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즉 사명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가 영적파수꾼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의 눈으로 상황을 잘 파악하고, 그리고 잘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