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단아람에서 다시 고향으로
창세기31:1-20
1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2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3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4 야곱이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 있는 들로 불러다가 5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6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7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8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9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으니라 10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었더라 11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3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14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15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16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17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약대들에게 태우고 18 그 얻은 바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 아비 이삭에게로 가려할새 19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20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그리스에서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는 일반적 의미의 시간입니다. 1분 1초 하루 한 달 등 시계로, 달력으로 계산되는 시간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는 제우스 신의 아버지였습니다. 크로노스 신은 자식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예언을 듣습니다. 그래서 크로노스 신은 자녀가 태어날 때마다 먹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의미입니다. 시작이 있는 모든 것을 끝장을 내는 것이 시간입니다. 시간 앞에 장사는 없고 누구도 예외 없이 죽음으로 갑니다. 그러나 제우스가 태어나자 그 어머니는 그 아들을 숨기고 대신 돌덩이를 크로노스에게 주고 살립니다. 나중에 제우스는 장성하여 아버지를 죽이고 지하세계에 가둡니다. 이 결과 시간은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통제할 수 있는 신은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모든 것을 삼키고 또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시간입니다. 예배 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가고 또 우리는 나이를 먹습니다.
또 다른 의미의 시간은 카이로스 입니다. 이는 결정적인 때나 기회를 뜻합니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든 역사에 있어서든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나 기회가 임했을 때 바로 이 때를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크로노스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가지만 카이로스 시간은 갑작스럽게 일어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 기록된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지만 그 생애는 단 몇 구절로 그칩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매우 길었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은 거의 없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생애는 33세로 마쳤습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짧았지만 그 생애는 카이로스적인 사건으로 가득합니다.
카이로스도 그리스의 신 중에 하나입니다. 이 신은 기회의 신이라고도 하는데 이 신의 형상이 의미하는 바가 매우 깊습니다. 카이로스 신은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기회는 주어집니다. 그 양손에는 칼과 저울이 들려 있습니다. 이는 기회라고 생각될 때 냉철한 판단을 하고 과감한 결단을 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깨에는 커다란 날개가 있고 두 발에도 작은 날개가 있어 망설이는 순간 가차 없이 네 날개로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또 앞머리는 매우 무성하여 그것이 기회인 줄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뒷머리는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민머리라서 한 번 지나가면 쉽게 붙잡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회라는 것이고 이것이 카이로스라는 시간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과일이 익어가는 것처럼 너무 일찍 따면 맛이 없고, 너무 늦게 따면 맛이 상하고 맙니다.
카이로스 시간을 그리스 신화로 설명을 하였지만 우리는 모든 시간과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다고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첫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때가 찼고’에서 ‘때’가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은 아담의 때부터 예언되었지만, 정확히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때에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임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에도 때가 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범사가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3:1-8) 모든 것이 때가 있고 이 때에 맞추어 사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때가 언제일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전도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그 정확한 때를 모르니 인간은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이 그 때인가? 아니면 조금만 더 기다려야 하는가?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야곱의 고민이 바로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떠나야 할지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할지? 그런데 야곱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 때를 가르쳐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우리 인생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을 들려주시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때를 알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가?
오늘 성경 말씀은 무엇보다 야곱의 경우를 통하여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계획하신 때가 있다는 점을 명확히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훈련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이 땅에서 그의 집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닦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을 20년으로 잡으신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이 때를 기다리며 인내와 성숙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할 때 섣불리 판단하고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때에 이곳으로 보내신 이유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그 목적을 이룰 때까지 참고 견뎌야 합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실력을 닦으며 준비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섣불리 결정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자기감정이나 욕망을 통제하고 하나님의 뜻과 시간에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의 사인이 오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야곱에게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지만 그 전부터 일반적인 사인이 있었습니다. 2절과 5절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라반의 안색이 변한 것이 한 두 번이겠습니까? 야곱과 계약을 열 번씩이나 바꾸었던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야곱이 떠나기를 결정하기 전의 안색은 달랐습니다. 그 게 느껴진 것이지요. 아마 야곱은 “아 이곳에 더 이상 있기는 힘들겠구나.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구나” 하고 강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결단을 해야 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어떤 불안함이나 조바심을 일으키십니다. 환경적으로 우리가 결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십니다. 그런 사인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더 많이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 지 잠잠히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 싶으면 과감히 결단하고 나가야 합니다. 머뭇머뭇하다가는 하나님의 정확한 타임 곧 카이로스의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야곱은 그때가 되자 과감히 결단을 했습니다. 줄탁동기(啐啄同機)란 말이 있습니다. 줄(啐)은 알 속에 있는 병아리가 때가 되자 안에서 껍질을 깨는 것을 줄이라고 합니다. 어미 닭이 이 소리를 듣고 밖에서 껍질을 동시에 깨기 시작하는 것을 탁(啄)이라 합니다. 이 줄탁이 잘 맞아야 병아리가 알을 깨고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서로 맞지 않으면 지치고 말거나 아니면 설익은 채로 끝나고 맙니다. 야곱의 내적인 고민이 ‘줄’이 되었습니다. 라반의 핍박이 ‘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탁’이 되었고 야곱의 결단이 ‘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때와 이때에 맞는 결단을 행하지 않으면 카이로스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을 맞추지 못할까 염려는 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려는 자에게, 또 준비되어 있는 자에게 그 때는 빗겨가지 않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2-3) 도적이 예상치 못한 시간에 오듯 주님의 재림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살전5:4-5) 빛의 아들들에게는 더 이상 주님의 임재는 도적 같이 갑자기 벌어질 일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기도로, 말씀 순종으로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사 잠깐 졸았다 할지라도 신랑이 오신다는 소리에도 당황하지 않고 맞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준비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정확한 때에 우리를 옮기실 것입니다. 아쉽게 지나간 것들은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받을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주십니다.
아내들과 함께
야곱이 지혜로운 것은 그 위기의 때에 자기 아내들과 함께 상의했다는 점입니다.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함께 어려움을 나누고 도와 줄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것은 큰 복입니다. 더구나 그가 자기 바로 곁에 있는 배우자라면 더 좋을 것입니다. 아내나 남편은 동역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배우자를 돕는 배필로 지으셨습니다. 돕는 배필은 바로 동역자란 뜻입니다. 나의 부족함으로 채워주는 사람입니다.
야곱은 자기 아내 레아와 라헬을 몰래 들로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그 동안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5)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6)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7a) 그러면서 자기가 이렇게 무사하고 부를 이루게 된 것은 하나님 은혜임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7b)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으니라”(9) 마지막으로 그 하나님께서 이제 이곳을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전합니다.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13)
이 말을 듣자 레아와 라헬은 야곱의 뜻에 동조합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14-16) 아내가 이렇게 자신의 뜻에 동조하고 함께 하겠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부부는 함께 상의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행동해야 합니다. 부부 간에 서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어떤 결정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서로의 동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충분히 설명해야 하고 또 그동안 충분한 신뢰가 쌓여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 라반은 아무리 아버지일지라도 자기 욕심에 빨랐기 때문에 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야곱이나 그 아내들이 라반의 집을 떠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 아내, 내 재산이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달아난 야곱의 가족을 쫓아서 라반은 칠일 길을 밤낮으로 달려올 정도로 집요했습니다. 천리길을 쫓아온 것입니다. 43절에서 라반은 야곱에게 자기 소유권을 분명히 말합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나의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라반은 자신을 대가족의 수장이라 생각했고 야곱을 그 식솔이나 소유물 중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야곱이 달아나 것은 마치 자기 노예 중 하나가 탈출한 것처럼 생각하고 이렇게 죽기 살기로 쫓아온 것입니다. 야곱은 또 그러한 형편을 잘 알기에 몰래 그 집을 탈출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을 떠나는 과정은 마치 이스라엘의 작은 출애굽을 미리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바로가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후 아까워서 군대를 거느리고 뒤쫓아 왔던 것처럼 라반은 야곱의 일족을 추적한 것입니다.
모든 결단에는 이처럼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머뭇거리거나 그것이 두려워서 결단을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다른 하나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과 그 가족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안락함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라헬은 완전히 과거에 대해서 결단하지 못했습니다. 라헬은 아버지 집에서 나올 때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쳤습니다. 드라빔은 작은 크기의 우상으로 그 집의 수호신이면서 라반이 점을 칠 때 사용하는 도구였습니다. 라헬은 아마 이 드라빔이 있으면 자기 가족에게 복이 될 줄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가족을 위기로 몰았던 것은 바로 이 드라빔이었습니다. 라반이 죽기 살기로 쫓아온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드라빔 때문입니다. 라반이 아무리 뒤져도 이 드라빔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드라빔은 라헬이 자기 나귀 안장 밑에 깔고 앉았고 자기는 월경 중이므로 일어날 수 없다는 거짓말로 라반을 속였습니다. 야곱은 드라빔을 가져온 사실조차 몰랐고 이후 창세기에서 드라빔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붙잡고 있는 세상의 정신이나 미신이 있으면 버려야 합니다. 라헬은 여전히 세상의 것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서 양 다리를 걸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결단을 촉구했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18:21) 라헬이나 라반이 섬겼던 드라빔은 마음대로 훔쳐 올 수도 있고, 사람의 엉덩이 밑에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신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인들이 불결하다고 생각했던 피에 의해서 이미 모욕을 당한 신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믿는 신에 대해서 그렇게 조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들도 그렇게 어리석은 것들은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사주팔자나 점이나 조상신을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그 깊은 곳에 다른 것을 숨겨 두고, 그것을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신앙인은 신앙인답게 살아야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셨다
야곱을 지키셨던 것은 야곱의 능력이나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곱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위협으로부터 자기를 지키셨던 것은 하나님임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5절입니다.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7절입니다.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야곱은 부요케 하셨던 것도 하나님이셨습니다. 9절입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으니라” 라반의 추적으로부터 야곱 가족을 지켰던 것은 어떤 인간적인 선심이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라반이 거의 야곱을 따라잡으려 할 때 하나님께서 꿈속에 나타나셔서 막으셨습니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24) ‘선악간 말하지 말라’는 것은 좋은 말이든지, 나쁜 말이든지, 야곱에게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29절에 라반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야곱은 이에 화답하듯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42)
야곱이 밧단아람에 오기 전에는 온통 자기로만 충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벧엘에서 드렸던 서원기도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에게 이런 조건을 이루어주시면 믿겠다는 식의 서원으로 중심이 온통 ‘I' 였습니다. 그런데 이 밧단아람의 20년 동안 그 입술은 하나님이란 말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말끝마다 ‘하나님’입니다. 그는 자기 인생을 지키시고 복을 주셨던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음을 체험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결단하며 나아가는 우리 인생에 말할 수 없는 위기들이 닥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라반의 맹렬한 추격과 32장 이후에 전개될 형 에서의 공격에 맞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신28:7)
데이빗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였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 30년 동안 아프리카 내륙을 횡단하며 오지에 문명과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가 처음 아프리카에 간 11년 동안은 어떤 개종자를 얻지도 못했고 선교지도 개척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선교사들 간의 알력에 시달렸고 가족과 환경에 매어 지냈을 뿐입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때가 되자 그는 아프리카 내부로 본격적인 탐험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직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수천의 마을들을 향하여 내륙으로 내륙으로 들어갔고 결국은 최초로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맹수와 질병과 원주민들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습니다. 그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친구들이 몇 사람을 파견하여 도우려 하였습니다. 친구들은 편지에서 “자네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우리가 자네를 도와줄 사람을 몇 명 그곳으로 보내려 하네. 그러니 그곳까지 가는 길을 상세히 적어 다음 편지에 보내 주면 좋겠네.” 하고 써 보냈습니다. 그러자 리빙스턴은 정중하게 그 제의를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냈습니다. “마음은 고마우나 이곳까지 오는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이곳에서 진정 필요한 사람은 길이 없어도 스스로 찾아오겠다는 사람이거든.” 언젠가 한 번은 리빙스턴이 사자에 물려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때 그 위기 앞에서 리빙스턴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사명자는 그 사명을 이루기까지 죽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정글 속을 탐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도전정신을 잃고 있습니다. 앞에 있을 장애물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때를 허락하심으로 새로운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려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런 도움 없이 절벽 끝으로 몰아세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밧단아람에서 20년 동안 야곱을 지키셨던 하나님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며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복을 받고 또 승리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