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에는 괴물이 들어앉았는데 겉은 천사로 위장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고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전혀 다른 사람일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신 인간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라고 말씀합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간의 마음은 세상의 부패한 것 중에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썩은 것 중에 가장 썩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는 세상을 보십시오. 겉으로는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입니까? 그러나 모두 훌륭한 가면을 쓴 것뿐입니다. 가면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 가면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교만’입니다. 자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교만의 가면’입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가 바로 교만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외모에서는 교만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겸손 그 자체입니다. 꾸미지 않았는데 멋진 것이 진짜 멋있는 것입니다. 잠언 31장 30절에는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외모보다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현재 영적 상태를 미화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주님의 겉모습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연약하고 볼품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화려한 것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복음서에서 만나는 주님의 외적인 모습은 참으로 초라했지만, 매력적인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끄는 매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내적인 아름다움입니다. 주님에게서는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주님에게로 달려올 만큼 부드러움을 가지고 계셨고,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이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외적인 것들로 치장한 세상에서 우리는 다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영성추구는 겉모양이 아니라 내면세계를 가꾸는 일입니다. 겉으로는 좀 허름해 보이고 약간 촌스러워 보여도 영혼의 힘을 가지고 있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름이 늘고, 얼굴은 좀 망가져도 인격은 주님을 점점 닮아가면 그것이 최고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속사람입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을 돌보지 않으면 금방 추해집니다. 그러면 갈수록 파괴되고, 결국 삶이 무너집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이 바깥으로 흘러나와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나이가 마흔 이전에는 얼굴을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마흔이 넘으면 당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내면의 인격이 바깥으로 흘러나온다는 뜻입니다. 겉만 화려한 모습으로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위장하지 말고, 가면 쓰지 말고, 껍데기를 미련 없이 벗어던져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겉모양을 바꾸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갈수록 우리의 영혼은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본문 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며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핵심적인 것은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을 말합니까? 십자가는 거절과 저주의 상징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공생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절에서부터 거절로 끝납니다. 예수님의 가족마저도 주님을 따돌립니다.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습게 여깁니다. 동네 사람들의 거절, 유대인들의 박해,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의 그런 멸시 속에서 사셨습니다. 주님은 환영받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멸시와 거절에 환경 속에 둘러싸여 계셨습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하면서 가끔 누가 무시하거나 인정해 주지 않으면 당장 그만두겠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받은 핍박을 생각해본다면, 핍박당하지 않고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수의 복음이 가는 곳은 언제나 거절과 배척이 있습니다. 한국의 초장기에도 얼마나 순교자들의 피가 흘러졌는지 모릅니다. 예수를 믿고 선한 일을 하면 사람들이 손뼉을 쳐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해받고 무시당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주님의 생애가 그랬습니다. 주님은 거절 받으실 때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멸시와 배척과 혹독한 거절의 경험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거절 중에서도 거절임을 예수님의 절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셨습니다. 누구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까? 바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요단강을 올라오실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지금 십자가에서 버리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아들을 버리시는 사건입니다. 아버지로부터의 버림받은 고통이 어떤 것인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인류 최초에 에덴에서 일어난 일은 죄에 대한 심판으로서 에덴에서 추방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절 받음,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순간, 인간은 우주적인 고아가 됩니다. 우주 바깥으로 떨어져 나간 것과 같은 깊은 고립과 고독.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몸도 마음도 둘 곳 없습니다. 위안을 얻을 곳도 소망을 둘 곳도 없고, 아무리 해도 지워지지 않는 깊은 불안이 내면속에 자리 잡게 됩니다. 깊은 불안, 외로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증상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우리 안에는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하나님 형상의 빈 공간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탐욕, 채워지지 않는 불만족,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욕구, 인정과 사랑에 대한 집착… 이것 모두 거절로 인하여 찾아온 두려움을 인간 스스로 극복하려고 하는 몸부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거절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거절 받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환대 받게 되었습니다. 거절이 환대로 바뀐 사건,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나의 수준과 조건, 상태, 과거, 현재,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두 손을 펴시고 끌어안아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떠올려 보십시오. 세상에서 버림받았던 자들을 품어주시고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거절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무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 따돌림을 받지 않기 위해 어디엔가 끼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괴로움을 경험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상처로 얼룩진 백성들을 끌어안아 주시고, 우리를 복음 안에서 초대해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오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경험되어야 하는 것은 이런 사랑입니다. 교회 안에는 벽이 없고 서로 간에 층이 없어야 합니다. 모두가 존중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의 실수와 연약함이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 사랑방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 큰 아들은 돌아온 탕자를 거부하고 배척합니다. 과거를 묻고 자격을 따집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환영합니다. 마치 실성한 아버지처럼 돌아온 아들을 위해 모든 잔치를 베풀고 받아들여 줍니다. 그 받아들여줌, 환대, 수용, 이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은 냄새나고 불결한 우리를 기꺼이 끌어안아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거절 받고 상처를 입었다 해도 주님은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거절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고, 예수의 이름을 믿고 나오는 자들을 그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환대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로 인해 주어진 하나님의 환대를 깊이 경험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경험한 환대를 거절과 무시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드러내며 살아가십시오. 회복된 나를 통해 가족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떨고 있는 영혼들을 품고 사랑하고 섬기기를 바랍니다.
본문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에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며 또 양이 나옵니다. 7절에 나오는 양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어린 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셨다는 것은 3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를 위하여, 둘째는 우리를 대신하여, 셋째는 우리의 대표로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어진 죄의 짐은 너무 커서 우리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에게 모든 죄의 짐을 대신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릴 위해 치르신 대가가 얼마나 큰지 값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지불하신 값이 너무 엄청나서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지해서 우리가 지은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맹렬할지도 모릅니다. 십자가상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죄로 인한 저주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를 아들에게로 돌리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심으로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대리적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아들의 어깨에 인류의 죄의 짐을 다 지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전적으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본문 4절-5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에서 계속해서 무엇이 강조되고 있습니까? ‘우리의 질고’ ‘우리의 슬픔’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저주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를 가라앉히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죄의 저주가 다 떠나갔습니다! 더 이상 저주와 고통이 남아있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 모든 저주를 다 쏟아부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진노의 잔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시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로 인하여 받아야 할 저주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를 흔적을 지워버렸습니다. 십자가는 저주를 소멸시켜 버렸습니다. 놀라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계속해서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놓치면 안 됩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저주가 떨어져 나가고 자유를 얻게 됩니다. 도무지 벗겨질 수 없는 저주가 한순간에 사라집니다. 더 이상 남겨진 저주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간단한 주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삶에 미친 가장 지대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상,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은 영생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더 이상 갈증을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수가 되십니다! 더 이상 악에 희생당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요한1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또 로마서 5장 8절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32절에도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분의 죽으심이 우리의 죽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예수의 십자가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습니다. ‘내 안에 예수가 산다’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 이것은 전혀 다른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은혜는 놀라운 삶입니다. 이제는 저주의 영향력이 사라지고 참 생명의 영향력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것을 믿으십시오. 세례를 받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그냥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옛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죄로 지배를 당하는 자아, 이기심으로 가득한 자아, 욕심으로 가득한 그 자아, 그 자아가 죽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는 내 안에 새로운 주인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내 안에 참 생명으로 오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 사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냥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연명이 아닙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약동합니다. 성도 여러분, 봄이 오면 온 땅에 생명이 약동하듯이, 이제 우리는 부활의 생명체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삶이란, 그저 모질고 길게 늘어진 의미 없는 삶의 연장이 아닙니다.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하십니다. 저주가 없는 상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13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정말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이 축복들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또 세상 가운데 이 복음을 선포하며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참된 기쁨과 평안, 자유함들을 경험할 때, 십자가의 능력에 두 손 들어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