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들어 주시는 주님
(시 37:23-24)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성공회 대성당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영국의 국립묘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원 안에 영국을 빛낸 위대한 인물들이 잠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이 사원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제 눈에 띠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존 웨슬리입니다. 이분은 영국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사람이자 감리교의 창시자입니다. 사원 안에 이분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동상을 살펴보는 중에 이분이 남긴 유명한 말이 기록되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 마디입니다.
하나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이고, 둘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은 땅에 묻으시나 당신의 일은 계속해 나가신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말이 이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이분은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면서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 88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평생을 주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덧입었습니다. 위대한 부흥도 체험했습니다. 이분은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영향력도 끼쳤습니다.
그런데 임종을 앞두고 한 평생을 돌아보며 가장 좋았던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셨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제 마음 속에 아직도 큰 울림이 되어 남아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내게 가장 좋았던 일은 생각할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우리가 지금 한 해의 끝자락에 서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그 많은 은혜들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잘못했던 일들도 생각이 날 것입니다. 또한 금년에 내게 가장 좋았던 일들도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금년 한 해도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혹 의식하든지 못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금년 한 해 내게 가장 좋았던 일을 꼽는다면, 웨슬리처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 일이라고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노년에 자신의 생애를 뒤돌아보면서 깨닫게 된 지혜를 노래하고 있는 시입니다. 특히 가장 복된 삶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몇 가지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본문 23절을 보면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다윗이 노년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자기가 걸어야 할 인생의 여정을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대로 그 길을 걸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는 것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선 하나님께서 사람의 길을 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인생길을 정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예정론’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사실 이 예정론에 대해 오해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을 ‘숙명론’과 혼동합니다. 숙명론이란 인간의 운명은 이미 작정되었고, 그 작정된 길로 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사주팔자’를 들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운명이 여덟 숫자 안에 다 담겨있고, 그 운명대로 살도록 되어있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숙명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의 길을 정해 놓으셨다면, 아마도 사람은 로봇이나 배우와 같을 것입니다. 정해진 프로그램이나 각본에 따라 살아갈 테니까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로봇이 죄를 지을까요? 결코 로봇은 프로그램을 어기며 자기 멋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다만 고장이 나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프로그램을 자기 뜻대로 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짓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유의지가 있어서 자기 뜻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시고 그 뜻을 알려주셔도 인간이 어길 수 있습니다. 그 정해진 대로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숙명론적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 하나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을 ‘결정론’과 혼동합니다. 결정론이란 우리의 미래는 인과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일들은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 따라 일어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원인들 가운데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그리고 내가 과거에 저지른 일들의 결과 같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를 당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시련이 계속되고 어려운 일이 많이 생기면,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 없는 의인이 고난당하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리고,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고난을 겪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게다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그러니 결정론적 주장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정론의 가르침 즉 우리의 길을 정하셨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잠 16:9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우리가 저마다 인생을 나름대로 잘 살아보려고 계획도 하고 작정도 하고 노력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길로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엄마가 아이와 산책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산책길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뛰어놉니다. 엄마는 지켜보다가 자동차가 다가오거나 개가 달려들면 보호해 줍니다. 위험한 길로 갈 때는 알려줘서 다른 길로 가게 합니다. 그러다 다 놀고 나면 안전하게 다시 집으로 데리고 돌아옵니다.
금년 한해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이렇게 우리의 걸음을 정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이 말씀에서 그의 길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정하신 그 길로 가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뜻을 깨닫고 순종하며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요즘 내비게이션이 발전해서 우리 생활을 무척이나 편리하게 해줍니다. 대부분의 운전자들이 차에 타면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는 일부터 합니다. 그리고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어떤 길로 안내를 하는지를 살펴봅니다.
운전을 시작하면 내비게이션은 상냥한 목소리로 안내를 시작합니다. 제 차에는 내비게이션이 아름다운 아가씨로 둔갑해서 친절하게 안내합니다. 그런데 제가 가끔은 나름대로 판단해서 경로를 제 마음대로 바꿀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금방 알아차리고 새로운 경로를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경로를 다시 시작합니다.”
그런데 결코 화를 내지 않습니다. 몇 번을 바꾸더라도 늘 친절하게 새로운 경로를 보여줍니다. 아마도 저 같았으면 화를 내거나 “네 맘대로 가라”고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때로는 미안한 마음까지 들면서도 기계라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십니다.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고 성령의 감동으로 갈 길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길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갈 때 하나님께서 당장 화를 내지 않으시고 다시 길을 안내해 주십니다. 이러기를 반복해도 하나님께서 호통을 치시거나 길 안내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실망하십니다. 참으시고 인내하시며 마음 아파하십니다. 롬 8:2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이 탄식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나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한 해를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혹시 하나님을 탄식하시게 하지는 않았는지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걸어온 2019년 한 해의 걸음을 보시고 기뻐하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년에는 꼭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걸으시기 바랍니다.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본문 24절을 보면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하나님의 백성이 인생길을 걷다가 넘어지기도 하는데 완전히 엎드러지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넘어질 때 하나님께서 손으로 붙들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선 넘어지지만 엎드러지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넘어지는 것은 무엇이고 또 엎드러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넘어진다는 것은 ‘눕다’라는 뜻의 ‘나팔’(נפל)이란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끄러져서 바닥에 눕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에 비해서 엎드러진다는 것은 ‘내동댕이치다’라는 뜻의 ‘유탈’(יוטל)이란 말의 수동형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동댕이쳐져서 다시는 일어나기 힘들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복싱경기를 보면 선수가 넘어지는 경우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운’이고, 다른 하나는 KO입니다. 다운은 미끄러져 넘어지는 슬립다운이 있고, 펀치를 맞아서 넘어지는 다운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운당한 선수는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심판이 볼 때 다시 경기할 수 있다고 판단돼서 경기가 재개됩니다. 그러나 KO를 당한 선수는 넘어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일어난다고 해도 심판이 볼 때 다시 경기를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경기가 바로 종료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인생을 살면서 다운당할 수는 있지만 결코 KO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도 넘어집니다. 때로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집니다. 품지 말아야 할 마음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후회하고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낙심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했는데 열매가 없습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뒤에서 수군거립니다. 계획하고 추진해 오던 일들이 무산되고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빈센트 반 고호의 그림을 좋아합니다. 사람의 내면을 누구보다도 잘 표현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린 그림 가운데 [울고 있는 노인]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노인이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는 모습을 연필로 그렸습니다. 마치 우는 소리가 그림 밖에서도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이 작품 속의 주인공은 헤이그에 살고 있던 아드리아누스 자더란트라는 노인입니다. 이 사람은 전쟁 참전용사였는데 참전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가운데 지냈습니다. 이 노인의 고통을 알던 고흐가 모델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고흐가 거의 같은 그림을 8년 뒤에 또 그렸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람을 모델로 이번에는 유화로 그렸습니다. 그리고 2년 뒤 고흐는 자살했습니다. 평론가들은 고흐가 이 작품의 노인을 통해 고통 속에 울고 싶은 자신을 표현하려 했을 것이라고들 추측합니다.
혹시 금년 한 해 동안 이 노인처럼 울고 싶을 때가 있지는 않으셨습니까? 너무 힘이 들어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리고 그저 통곡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으셨습니까?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아파서 견디기 힘들 때가 있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그림의 노인처럼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래도 엎드러지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자칫 미끄러져 넘어졌을지라도 또는 펀치를 맞고 넘어졌을지라도 KO로 경기를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넘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붙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 우리 손을 잡아주시고 그리고 다시 일으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손” 또는 “주의 손”이라는 표현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옵니다. 사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손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왜 성경에 이 말이 그렇게 많이 나올 까요? 한 마디로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사님 가운데 한 분이신 고한경직 목사님의 구술 자서전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젊은 시절 북한에서 목회할 때 너무 힘들었던 때가 있었답니다. 너무 낙심이 돼서 “이제는 목사 사표내고 목회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 엎드려있는데 비몽사몽간에 자기가 험한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더랍니다. 너무 피곤해서 오른쪽으로 쓰러지려고 하는데 갑자기 큰손이 나타나서 일으켜 세우더랍니다. 또 험악한 길을 걷는 중에 이번에는 왼쪽으로 쓰러지려고 하는데 또 큰 손이 나타나서 일으켜주더랍니다. 또 죽을힘을 다해 걸어가다가 이번에는 앞으로 쓰러지려고 하니까 두 손이 나타나더니 일으키더랍니다.
그러다가 눈을 떠보니 잠을 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재도 아니었습니다. 환상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큰 깨달음이 생기더랍니다. “아 목회는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는구나!” 그래서 다시 힘을 내서 목회에 정진하기 시작했고, 그 후 평생 붙들어주시는 주님의 손을 의지해서 무사히 달려갈 길을 다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잡아주십니다. 특히 우리가 넘어질 때 우리를 붙잡아주십니다. 그래서 넘어졌을지라도 엎드러지지 않게 해 주십니다.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금년 한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아주셨습니다. 우리가 넘어지려 할 때 우리를 붙잡아주셨습니다. 우리가 넘어졌을 때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차분하게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와 함께 하신 주님의 손길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더더욱 굳건하게 주님의 손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마치 달력을 다 넘기고 새 달력을 달듯이 2019년을 역사 저 너머로 넘기고 새해 2020년을 맞을 시점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우리와 함께 하신 주님께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를 붙잡아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굳게 주님의 손을 붙잡고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