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19-25) 평화를 깨는 큰 죄(3): 분노
곽창대 목사
전문
올해 우리교회의 표어는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고 나누는 우리가정 우리교회”입니다. 그렇게 표어를 정한 것은 우리의 가정은 물론 교회와 우리나라에 평화가 정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올해가 6.25 동난 70주년을 맞는 해이기에 다시는 우리나라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내치가 안정되고 주변의 나라들과 평화를 유지하면서 남북의 평화적인 통일에 진전이 있기를 우리 모두는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평화를 깨는 주범이 죄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누려면 죄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죄와 싸워 이기려면 먼저 죄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연구한 바대로 평화를 깨는 죄 가운데 대표적인 죄, 7가지가 있습니다.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입니다.
3개월 전에 교만과 시기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코로나19 비상사태를 맞아 지난 3개월 동안 다른 주제로 설교했는데 오늘부터 다시 “평화를 깨는 7가지의 큰 죄”에 관하여 시리즈 설교를 재개합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로 분노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현대를 가히 “분노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5월 25일에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한 흑인남성이 백인 경찰관의 강압적인 체포 과정에서 질식사했습니다. 그로 인해 여러 지역으로 시위가 번졌고, 일부에서는 폭력과 방화와 상점 약탈 등으로 도시들의 치안이 무너졌습니다. 미국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민족과 집단 간에 분노가 폭발하여 폭력과 전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종교와 이념과 정파 간의 갈등과 대치로 인해 도처에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집단적인 분노의 표출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분풀이도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불편함과 손해를 참지 못하여 성급하고 과도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원한관계가 아닌데도 행인이나 여자나 약자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하는 이른바 “묻지마 폭행”이나 “우발적 살해”도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족과 친지들 간에도 분노를 삭이지 못하여 상습폭행과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악스러운 소식을 자주 듣습니다. 인터넷과 같은 가상공간에서 악의의 글을 올려 분노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분노를 적절하게 표출하지 못하고 마음에 울분이 쌓여 화병이나 우울증으로 시달리다가 자살을 감행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살벌한 세상, “분노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회가 도래할 것을 오래 전에 예고했습니다.
(딤후 3:1-5)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분노의 정의
[네이버 지식백과] “분노, 분하여 몹시 성을 냄. 사람의 분노는 죄의 원인이 되며,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성경은 분노를 삼가고 마음을 지키도록 경고한다(잠 14:17, 29, 16:32, 27:4, 29:22). 그러나 불의를 향한 분노, 즉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의로운 분노는 선한 것으로 여겨진다(출 32:19. 레 10:16, 민 31:14, 삼하 12:5, 왕하 13:19, 요 11:33, 38, 행 17:16). 성경에는 하나님의 분노(진노)를 자주 언급한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에게 분노하시는데, 이는 죄인을 파멸하기 위한 분노가 아니라 곁길로 나가는 자식을 경책하는 부모의 심정, 곧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 볼 수 있다(신 6:15, 시 79:5, 막 3:5). 여기서 사람의 분노와 하나님의 분노에 큰 차이가 있다. 사람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반면에(약 1:20)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뜻을 이룬다(롬 1:18).>
[라이프성경사전] “분노는 원어(‘아프’)로 ‘코로 숨을 내쉬다’는 뜻인데, 인간의 내면(內面)에서 극심한 증오와 복수의 감정이 일어나 거친 숨을 거듭 몰아 내쉬는 상태를 뜻하는 표현이다. 히브리어로는 ‘코가 불타올랐다’로 표현된다(창 30:2, 출 4:14).”
분노의 종류 (세 가지)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존 플라벨(1628-1691, 내 마음 다스리기 Saint Indeed, 미션월드)은 세 종류의 분노가 있다고 했습니다. 자연스러운 분노, 거룩한 분노, 악한 분노입니다. ‘자연스러운 분노’는 자기도 모르게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분노로서 죄라기보다는 감정의 자연스러운 표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잘 조절하여 분을 내면 죄가 아닐 수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하나님의 공의로 촉발된 의분으로서 불의에 항거하는 분노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두 가지 경우에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악한 나라들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심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의로 압제한 애굽에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시편 78:43-53 참고).
다른 하나는 배은망덕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징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우상들을 열렬히 숭배했으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힘없는 서민들을 괴롭히고 압제했습니다. 이방인들보다 더 악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방 나라들인 앗수르와 바벨론을 불러 징계하셨습니다(왕하 23:26-27).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몇 번 분노하셨습니다.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상인들과 결탁하여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크게 화를 내셨고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서도 엄중하게 책망하며 저주하셨습니다. 십자가를 길을 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아선 베드로에게 정신이 버쩍 들도록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시며 화를 내셨습니다(마 16:23).
신앙의 선배들도 분노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십계명 두 돌판을 받고 하산했을 때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절하며 축제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모세는 십계명 돌판을 산 아래로 던지며 분노했습니다(출 32:19). 다윗도 소년시절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능욕하고 조롱하는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에게 분노하여 외쳤습니다(삼상 17:45-47). 느헤미야도 가난한 동족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을 놓아 자기 배를 불리는 귀족들과 민장들에게 분노했습니다(느 5:6-7).
이처럼 불의에 대한 분노, 선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분노입니다. 즉 거룩한 의분입니다.
분노의 종류 가운데 또 한 가지, ‘악한 분노’는 도에 지나친 분노로서 자신과 이웃을 해치는 과격한 분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노가 악으로 쉽게 변질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창 34장에 나오는 야곱의 두 아들, 레위와 시므온의 복수극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으로 외출 나갔는데 그때 세겜의 추장 하몰의 아들이 디나를 강간하고는 연모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디나와 결혼을 하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몰이 아들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야곱의 집에 왔을 때 야곱의 아들들이 들에서 듣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분노했습니다(34:7). 디나를 자기 아들과 결혼하게 해주면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고 크게 보답하겠다고 제안하는 하몰에게 야곱의 아들들이 나서서 말합니다. 우리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통혼할 수 없으니 너희 족속의 모든 남자가 우리처럼 할례를 받아야 통혼이 가능하다고 속였습니다. 세겜의 남자들이 할레를 행한지 사흘째 되는 날에 야곱의 두 아들, 레위와 시므온이 성읍을 기습하여 칼로 세겜 족속의 남자들을 모조리 살해합니다. 마음에 품은 분노가 폭발하여 대 복수극을 낳은 것입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야곱은 가나안에 거주하는 이방인들이 힘을 합쳐 자기 가족들을 응징할까봐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이처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폭발하면 이웃과 자신을 해치는 분노로 변질됩니다.
분노의 원인 (세 가지)
신원하 교수는 그의 책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에서 분노의 원인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상처와 좌절된 욕구와 교만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인류의 역사에서 첫 살인사건이 발생합니다.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가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올린 제사에 믿음이 결여된 것을 반성하기는커녕 아벨이 드린 제사 때문에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다고 오해했습니다. 그 오해가 깊어져 마음에 새겨진 큰 상처와 피해의식으로 분노하다가 동생을 들로 유인하여 살해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근 10년간 다윗을 죽이려고 방방곡곡을 찾아다녔습니다. 사울이 시기심과 분노의 노예가 된 것은 그가 바랐던 욕망이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욕망은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칭찬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받아야 할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칭찬을 다윗이 받는 것을 보고는 다윗에게 분노를 쏟아 부었습니다.
교만한 자일수록 자신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자존심이 상하고 크게 모독을 당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쉽게 화를 내고 앙갚음을 하려고 합니다.
과도한(악한) 분노의 결과 (세 가지)
1) 과도한 분노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를 드러내지 못합니다(약 1:20).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온유함과 인내로 이끈 지도자 모세가 한순간을 참지 못하여 분을 내었습니다. 므리바 물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는데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 때문에 너무 화가 나서 외쳤습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그리고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반석에서 큰 물이 솟아나서 회중과 가축들이 흡족히 마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분노한 모세와 아론에게 하나님께서 징계하셔서 가나안 땅에 입성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민 20:12).
2) 과도한 분노는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성경은 성내는 것이 마귀에게 틈을 주어 죄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씀합니다.
(엡 4:26-27)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앞서 언급했던 존 플라벨은 <내 마음 다스리기>라는 책에서(p.126), “사탄은 불만이 가득하고 분노하는 영이기 때문에 화를 품고 있는 마음에 머물기를 좋아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환경 가운데 하나는 악한 분노가 들끓고 있는 마음입니다.
숯불이 화로 안에 있을 때에는 안전하고 유익하지만, 화로가 넘어져 숯불이 방안에 쏟아지는 순간, 불길이 방바닥을 태우고 금방 집 전체로 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화로를 쓰러뜨리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분노의 숯불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서 “악한 분노”가 터져 나오려고 합니까? 그렇다면 지금 사탄이 여러분의 마음을 휘저어 분노의 불길을 거세게 지피고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거기서 지나쳐 마음의 화로를 쓰러뜨리면 분노가 밖으로 분출됩니다. 그러면 사탄이 춤을 춥니다. 삽시간에 주변이 분노의 불바다가 됩니다. 자신은 물론 이웃까지도 큰 해를 입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죄와 불의에 대한 거룩한 분노, 의로운 분노가 있지만 그 거룩한 분노, 의로운 분노조차도 급히 화를 내서는 안 됩니다. 성급하게 화를 내면 실수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로 인해 형제가 실족하게 된다면 아주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처럼 급히 성을 내면 관계가 깨어지고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고 공동체가 파괴될 가능성이 큽니다.
3) 과도한 분노는 자신을 파괴합니다.
분노는 부메랑처럼 자기에게로 돌아와 자신의 내면에 깊이 박힙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몸도 상하고 마음의 병이 들 가능성이 큽니다. 영적으로도 침체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살았다 하나 영적으로 죽은 자처럼 됩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잘 처리해야 합니다.
분노의 극복
사회심리학자들은 분노를 처리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들을 제시합니다. 화가 난 원인, 화를 표출한 방식, 그로 인한 변화 등을 꼼꼼히 조사하고 기록해보라고 합니다. 이것을 인지치료라고 합니다.
성경은 분노가 폭발하려고 할 때 의식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서라고 권합니다.
(시 37:7-8)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가장 좋기는 분노의 강렬한 에너지를 생산적인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분노의 에너지를 자기를 세우고 공동체를 세우는 에너지로 전환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안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결론으로 분노를 극복하기 위한 성경적 처방을 네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라.
오늘 봉독한 야고보서 본문에서 말씀에 대한 올바른 태도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말씀을 받으라, 말씀을 들여다보라, 말씀을 실천하라고 합니다.
약 1:21절에서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으라고 합니다. 말씀을 순전한 마음으로 환영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에 심겨진 말씀을 거듭 환영하라(기쁘게 수용하라)는 뜻입니다. 말씀 속에 푹 잠겨 살라는 뜻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많은 열매를 맺듯이 말씀을 기쁘게 환영하는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이 되라는 것입니다.
약 1:25절에서는 말씀을 들여다보라고 합니다. 여기 들여다본다는 뜻은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서 몸을 굽혀 본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들여다보기 위해 주의해야 할 세 가지를 야고보는 말씀합니다(19절).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듣기는 속히 하라는 뜻은 말씀을 듣는 일에 부지런 하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준행하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경청하라는 뜻입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에 말해도 늦지 않다는 뜻입니다.
(전 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기에 앞서서 먼저 배우기에 힘쓰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약 3:1-2)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는 듣는 것보다 말하는데 얼마나 조급한지 모릅니다. 상대방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도중에 말을 가로채어 자기 생각을 쏟아 붓기에 아주 바쁩니다. 그로 인해 관계가 나빠질 때가 종종 생깁니다.
(잠 10:19)『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뜻은 쉽게 흥분하거나 화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전 7:9)『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잠 14:17)『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어떤 과학자가 자신의 집 연구실에서 오랜 기간 중요한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실험이 거의 끝나갈 때 잠시 집을 비웠습니다. 그 사이에 과학자의 어머니가 작업실에 잠시 들어갔다가 실험 도구를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외출에서 돌아온 과학자는 연구실의 모습을 보고 몸이 굳었습니다. 그 동안의 실험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실험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옆에는 과학자의 어머니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서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바라보던 과학자는 바깥으로 나갔다가 5분 후에 돌아왔습니다. 다시 돌아온 과학자의 표정은 온화했고 다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친구가 찾아와 위로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습니다. "5분 동안 어머니를 사랑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네."
자신의 업적보다 어머니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실험의 좋은 결과보다도 부모공경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더 우선적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잠깐 묵상하면서 마음을 다잡으면 화를 삭일 수 있습니다.
급히 말하고 싶을 때 더욱이 화가 치밀어오를 때 마음에 심겨진 말씀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은 물론 형제와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울 수 있습니다.>
약 1:22절과 25절에서는 말씀을 실천하라고 합니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추적하는 사울에게 10년 동안 인내와 온유함으로 대했습니다. 요셉도 자기를 팔아넘긴 형들을 용서했을 뿐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최선을 다해 보살폈습니다. 스데반도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무리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순교했습니다. 남아공의 성공회 주교, 데스몬드 투투는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의 백인정권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정책)의 주모자들을 단호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분노하는 흑인 군중들에게 용서 없이는 결코 남아공의 매래가 없다고 외치면서 화해운동을 펼쳤습니다. 이들 모두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원수에게 분노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이처럼 분노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무기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 기도하라.
앞서 언급했던 존 플라벨은 분노를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조언합니다. “입을 급히 열지 말고, 성급하게 칼을 빼지 말고, 화로를 발로 차 넘어뜨리지 말고, 그저 엎드리십시오.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분함과 원통함에 대해 하소연하고 소리 내어 우십시오.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기억하시고, 나를 바라보시며, 내게 귀를 기울이시는, 정말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오랜 기간 동안 아이를 임신하지 못하고 있는 엘가나의 첫째 부인 한나가 아이를 낳은 둘째 부인 브닌나로부터 멸시를 당했을 때 한나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서 그 분함과 원통함을 극복했습니다. 결국 한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아들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분노를 극복하기 위하여 남자들에게 기도가 더더욱 필요합니다.
(딤전 2:8)『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남자들에게 아주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분노와 다툼입니다. 졸장부들의 특성은 조그만 일에도 분을 내고 싸웁니다. 하지만 대장부들은 좀처럼 분을 내지 않습니다. 시시한 일 따위로 결코 싸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열정 없이 무덤덤한 것은 아닙니다. 열정이 있어도 가볍지 않고 묵직합니다. 따뜻하면서도 듬직한 영성의 소유자가 바로 분노와 다툼을 극복하는 믿음의 대장부들입니다.
그런데 묵직한 대장부의 영성이 기도에서 나온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교회의 형제들이 시기와 분노와 다툼의 시대적 조류에 대항하기 위해 가장 주력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그래야 믿음의 대장부가 됩니다.
기도하되, “각처”에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남자들이 우선적으로 주력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그래야 자기는 물론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살릴 수 있습니다.
기도하되,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그 당시 성도들의 기도하는 자세 중의 하나였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기도하는 겉모습을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면의 자세를 중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세상의 풍조를 거슬러 살겠다는 결단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도와주시기를 겸손하게 간구하는 내적 자세를 뜻합니다.
남자 교우들이 깨어 일어나 거룩한 손을 들고 각처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대장부가 됩니다. 그래야 분노와 다툼을 극복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정과 교회와 조국에 희망이 있습니다.
다윗이 쓴 시편들을 보면 다윗이 기도로 분노를 극복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시 55편 참고). 다윗은 기도를 통해 믿음의 대장부가 되었습니다.
설교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관 데렉 쇼빈이 비무장 흑인남성 조지 플로이드를 강압적으로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릎으로 목을 짓눌러 질식사했는데 그 사건으로 미국 전역에서 시위가 번지고 있고, 일부 지역에서는 폭력과 방화와 상점 약탈 등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에 플로이드가 사망한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오랜 기간 사역해 온 존 파이퍼 목사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기도문을 발표했습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미니애폴리스에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교회, 정치, 스포츠, 음악, 영화, 산업, 미디어, 천국, 지옥에서 모든 이름 위에 당신의 이름만이 존귀와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
우리는 이 도시(미니애폴리스)를 사랑합니다. ... 이 도시의 사람들, 오래 전에 스웨덴에서 온 이민자로부터 소말리아에서 온 새로운 이민자들, 흑인과 아시안, 남미계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 우리는 거류민과 나그네와 같이 이 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베드로전서 2:11). 그래서 우리는 ... 묻습니다. 주님, 무엇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 우리의 마음을 열어 당신의 답을 듣게 하소서.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예레미야 29:7).’ 그렇습니다. 주님, 이것이 미니애폴리스를 향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 도시를 위해 기도합니다.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의 친지들을 위로해주십시오. 8분 46초 동안 플로이드의 목을 무릎으로 짓눌렀던 경찰관 데렉 쇼빈을 위해 기도합니다. 회개의 긍휼을 구하게 하시고 정의의 심판이 내려지게 해주십시오. 그 옆에서 동료의 가혹행위를 방치한 3명의 경찰관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슬픔과 공포가 정의로운 회한으로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그 심각한 살인과 비겁한 공모가 적합한 형벌로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
경찰서장 메다리아 애러돈도, 카운티 검사 미이크 프리맨, 시장 제이콥 프레이, 주지사 팀 윌즈 등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에게 ...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이 도시의 리더들로 하여금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게 하시며 힘들거나 위험한 상황에도 진리를 위해 굳건히 서게 해주십시오. ... 어떤 권력이나 특권들로 인해 진리가 숨겨지거나 왜곡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진실이 특권층이나 부자나 힘 있는 자나 가난한 자 등 어느 누구라도 어둠의 불의로부터 정의의 빛으로 인도되게 해주십시오. 증오하는 자와 쓴 뿌리를 간직한 자, 적개심으로 충만한 자와 참소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고린도전서 4:4)’를 보게 하시옵소서. 그 복음의 광채로 인해 교만과 인종주의와 이기심의 어두움이 사라지게 해주십시오. 그들 모두 상한 심령을 품게 해주십시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주님께서 멸시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시편 51:17). 미니애폴리스가 진리와 의의 길에 기초를 둔 화해의 기적과 영원히 지속될 조화로움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코로나 비이러스의 재앙으로 인해 미국에서 10만 명 이상이 죽었고 지금도 매일 20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우리 경제를 무너뜨리고 있고 이제는 폭동으로 인해 평생 일해야 할 직장이 화염에 휩싸이고 있어 우리의 일상을 산산조각내고 있습니다. 다양한 슬픔이 우리 죄를 경감시키지 않게 하시되 우리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부활하신 구주,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오 예수님, 이를 위해 당신이 죽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절망적이고 적개심 강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고 서로 간에도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 주님, 이 도시 미니애폴리스에서 그 일을 행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마 5:43-44)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렇게 기도를 강조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몰았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분노를 잠재우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3.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 신앙의 친구나 선배에게 도움을 청하라.
우리가 자주 들었던 말씀대로 죄는 미워해야 하지만 죄인은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죄인을 살릴 수 있습니다. 형제를 향해 화를 낼 때에도 형제와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화를 내지 않고 형제를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도 분노를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신앙의 친구들과 선배들을 우리 주위에 두셔서 도움을 받게 하십니다. 즉 극심한 분노를 극복하기 위하여 상담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달아날 때 사울의 아들이요 자신의 진실한 친구였던 요나단과 먼저 상의함으로써 다윗은 요나단의 적극적인 격려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윗에게 큰 힘이 되어 그 이후 10년간의 역경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딤후 2:22-26) 『[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24]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4. 분노를 일으키게 한 자에게 찾아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라.
말씀과 기도와 상담을 통해 어느 정도 분노가 가라앉았으면 분노를 극복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는 분노를 일으키게 한 자와 화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분노를 제대로 극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효과적인 의사소통입니다. 소통의 효과적인 기술 가운데 하나가 "I-Massage 전달법"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을 때 나는 아주 슬펐습니다. 크게 놀랐습니다. 가슴이 정말 아팠습니다. 여러 날 밤을 잠을 설쳤습니다. 지금도 슬픔과 고통의 쓰라린 앙금이 제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편도 공격적인 언행으로 반응하는 대신에 자신의 감정상태를 얘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로써 상대방과 화해가 이루어진다면 마음에 쌓인 울분이 해소되고 평안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분노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네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라, 기도하라, 신앙의 친구나 선배에게 도움을 청하라, 분노를 일으키게 한 자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라.”입니다.
이 네 가지를 하나로 종합하면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 예수님께 달려가 그 품에 안기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결론입니다. 분노의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예수님의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마 26:52-54)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마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품에 안길 때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분노를 극복하게 하실 뿐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분노를 안고 괴로워하고 있는 이들, 분노를 분출함으로써 가족과 이웃과 자신까지 해치는 이들을 품고 치유하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분노를 극복하고 치유함으로써 평화를 확산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찬송 424장
요약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존 플라벨은 세 종류의 분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연스러운 분노, 거룩한 분노, 악한 분노입니다. ‘자연스러운 분노’는 자기도 모르게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분노입니다. 이러한 분노는 잘 조절하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하나님의 공의로 촉발된 의분으로서 불의에 항거하는 분노입니다(시편 78:43~53). 선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이러한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악한 분노’는 자신과 이웃을 해치는 과격한 분노입니다. 분노는 악으로 쉽게 변질될 수 있습니다(창 34장)
신원하 교수는 분노의 원인으로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상처’와 ‘좌절된 욕구’와 ‘교만’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일로 인해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아 분노하여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백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사울은 다윗이 백성들로부터 칭찬받는 것을 보고는 다윗에게 분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도한 분노(악한 분노)의 결과는 어떨까요? 첫째, 과도한 분노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를 드러내지 못합니다(20절).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끈 모세가 한순간을 참지 못하여 분을 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며, 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민 20:12). 둘째, 과도한 분노는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성내는 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어 죄로 발전하게 합니다(엡 4:26~27). 성급하게 화를 내어 형제가 실족하게 된다면 아주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을 내면 관계가 깨어지고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고 공동체가 파괴될 수 있습니다. 셋째, 과도한 분노는 자신을 파괴합니다. 분노가 지속되면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몸과 마음에 병이 들고, 영적으로도 침체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잘 처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분노를 멈출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려면 말씀을 항상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21절). 말씀에 푹 잠겨 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25절).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준행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경청하라는 뜻입니다(19절). 그리고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22, 25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원수에게 분노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이처럼 분노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무기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 기도해야 합니다. 분노와 다툼의 시대적 조류에 대항하기 위해 주력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딤전 2:8). 교회와 가정, 일터에서 남자들이 우선적으로 기도에 주력하면 자기는 물론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살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세상의 풍조를 거스르며 살기 위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내적 자세를 뜻합니다. 이러한 자세로 기도해야 가정과 교회와 조국에 희망이 있습니다. 다윗은 기도로 분노를 극복했습니다(시 55편). 기도를 통해 믿음의 대장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이처럼 기도야말로 분노를 잠재우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셋째, 신앙의 친구나 선배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도하는 것으로도 분노를 극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신앙의 친구들과 선배들을 우리 주위에 두셔서 그들에게 도움을 받게 하십니다(딤후 2:22~26).
넷째, 분노를 일으키게 한 자에게 찾아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와 상담을 통해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면, 분노를 일으키게 한 자와 화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효과적인 의사소통입니다. 소통의 효과적인 기술 가운데 하나가 ‘I-Massage 전달법’, 쉽게 말해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상대편도 자신의 감정상태를 얘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로써 상대방과 화해가 이루어진다면 마음에 쌓인 울분이 해소되고 평안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마 11:28~30; 26:52~54). 예수님의 품에 안길 때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분노를 극복하게 하실 뿐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분노를 안고 괴로워하고 있는 이들, 분노를 분출함으로써 가족과 이웃과 자신까지 해치는 이들을 품고 치유하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분노를 극복하고 치유함으로써 평화를 확산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