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10:1-18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대로 목축업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창세기에 나와 있는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요셉이 이집트에 내려온 형 다섯을 데리고 바로에게 갔을 때, ‘너희의 생업이 무엇이냐?’ 라고 바로가 물었습니다. 그 때 어떻게 대답했나요?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가장 흔한 비유 중에 하나가 목축과 관련된 비유입니다. 농사와 관련된 비유도 많지만 소나 양, 염소와 관련된 비유도 꽤 많습니다. 그 중에도 목자와 양에 관한 비유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들 가운데서도 목축과 관련된 비유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목자는 지도자를 의미하고, 양은 백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양치는 목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목자(왕)으로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삼하7: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목자)로 삼고”(나단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
막14:27(슥13:7), 예수님이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고 하시며, 스가랴서를 인용하시면서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목자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의 제자들이 흩어질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라.”
그런데 목자 중에는 선한 목자도 있지만, 나쁜 목자(지도자)도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삯꾼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에스겔34장에 보면, 나쁜 목자(불의한 지도자들)에 관한 심판의 말씀이 나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리더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겔34:1-6,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0장에 이르러서 자신의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알 때, 누군가 아는 것과 어떤 사람인가 아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직업이나 직책은 누군가를 말해주지, 어떤 사람인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좋은 목자)라고 하시면서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지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1) 첫째로, 예수님은 양의 문을 통하여 우리에 들어온 양의 목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문을 통하여 들어오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온 절도요 강도라는 것입니다.
요10: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참 리더와 거짓 리더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 중에 하나는 리더십의 정당성입니다. 참 리더는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정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리더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 리더는 권력을 탐하여 스스로 쟁취하려고 합니다. 수단 방법을 가지지 않고 권모술수를 쓰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목자와 절도와 강도가 같을 수 없듯이 참 리더와 거짓 리더는 같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두드러진 차이점으로 관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참 목자와 양- 서로 알고 신뢰하고 따르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목자가 아닌 사람과 양은 서로 관계가 없기 때문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도망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10:3-5절을 보세요.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TV프로그램- 직접 보지는 않았는데, 어떤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행자가 실험을 해 보았다고 합니다. 목자가 양을 부르고 앞서 가니 양들이 따라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행자(낯선 사람)이 목자의 흉내를 내면서 불렀지만 양들은 따라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르는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 – 서로 음성을 통해 친밀하게 아는 관계입니다. 양에게 있어서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르는 것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면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받을 수 있지만,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하여 타인(절도나 강도)을 따라가면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알되,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아십니다. 각각의 이름을 알고 부르십니다. 단 한 마리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이름을 불러 다 나오게 한 후에 앞서서 가면 양이 따르는 것입니다.
2) 둘째로, 예수님은 단순한 목자가 아니라 양의 문이 되어 주시는 목자라고 하십니다. 즉 목자가 문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이라고 하면, 나무나 쇠로 된 문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양떼를 지키는 우리의 문은 목자가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돌이나 목책으로 우리를 만들고, 양을 그 안에 가둔다면, 밤에 목자가 문이 되어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리나 들짐승이 양 떼를 공격하려면 문이 되는 목자를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은 목자가 문을 지키는 한 안전한 것입니다.
본문 요10:7-10절을 보세요. 예수님이 양의 문이 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 예수님은 구원의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문이 오직 하나이듯이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 예수님은 이 문은 좁은 문이지만, 생명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마7:13-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
- 베드로 사도는 예수의 이름이 우리가 믿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유월절 때 문 상하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른 양의 피가 생각이 납니다. 그날 죽음의 천사가 애굽 전역을 다닐 때에 오직 문의 피를 보고 건너 뛰어 문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구원이 임했듯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능력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선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날 다른 무엇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구원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문 설주와 인방에 바른 피 때문에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그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문들로 들어가면 안됩니다.
목자 되신 예수님은 문으로 들어가는 양에게 생명의 구원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얻습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십니다. 요10:9-10저을 보세요. 이것은 예수님을 믿은 자들에게 죽은 후의 구원, 영생의 선물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갈 때에도,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물질적인 풍성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 되신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누리는 생명의 풍성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기쁨, 성령의 기쁨을 누립니다. 이 기쁨을 누리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신기해서 묻게 되고, 전도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 마음의 평안을 누립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십니다. 환경과 상관 없이 마음에 평안이 물밀듯이 몰려 오는 것입니다.
- 그래서 이 행복은 세상의 그 무엇과 바꿀 수 없습니다. 다 팔아서 사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천국 비유 가운데, 값진 보화의 비유와 값진 진주의 비유인 것입니다.
농부가 밭을 갈다가 바닥에 보화가 담겨 있는 항아리를 발견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만일을 대비해서 보화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땅을 파고 감추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전쟁이 나거나 불의의 사고로 주인이 죽으면 땅에 묻힌 보화를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발견한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데, 일차적으로는 밭의 주인의 것이 될 수 있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밭을 사야 했던 것입니다. 값진 보화를 발견한 기쁨에 모든 소유를 팔아 밭을 사면서도 즐거워하였다는 것입니다.
값진 진주 비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상인이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진 소유를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누리는 풍성한 삶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요한복음10장 10절보다 더 잘 말해주는 성경 구절은 없습니다. 요한복음의 요절 중의 하나입니다. “도둑이 온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3) 셋째로,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요10:11-15절에서 예수님은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나도 양을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선한 목자와 삯꾼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버리는 대상이 다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그러나 삯꾼은 자기 목숨을 위하여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성경에서 목숨까지 양들을 위해 버리려 했던 선한 목자의 예를 찾는다면 다윗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칠 때, 사울 왕 앞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목자로서 어떻게 했는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 곰이나 사가가 양의 새끼를 물어가며 쫓아가서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냈다”라고 했습니다. 과장된 표현 같긴 하지만 사실이라면, 다윗은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선한 목자입니다.(삼상17:34-35)
예수님 -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선한 목자는 없습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 주신 주님을 사랑하며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넷째로, 예수님은 우리에 들지 아니한 (우리 밖의)양들까지 생각하시는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요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 안의 양들뿐 아니라 우리 밖의 양들, 위험에 처한 양들을 잊지 않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양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100마리 양 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렸을 경우,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목자 이야기입니다.(눅15:3-7)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 –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아흔 아홉이 있는데, 한 마리 정도 잃어버리면 어떻냐,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잃어버린 한 마리에게까지 마음을 쓰시는 분이십니다.
어떻게 보면, 자와 여러분이 하나님 없이 살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멸망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서 잃어버린 양들, 사회에서 소외 받은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25장의 유명한 비유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주님께 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 – 교회 안에 있는 성도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 밖의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선교적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의 마음은 길은 잃은 양들에게도 가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5) 다섯째로, 선한 목자는 목숨까지 내어 주시는데, 억지로 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10:17-18절,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았노라 하시니라.”
참 섬김의 특징 중에 하나가 자발성입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헌신은 언제나 자발적입니다.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무조건적입니다.
선교사님들- 본국에서 편안하게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타국, 타문화권에 가서 고생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엔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특히 목자/목녀들이 큰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발적으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오셨고, 목숨까지 내어주셨음을 기억하시고,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일할 때, 항상 기쁨으로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예수님은 참된 리더십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거짓 리더십을 보여 주었습니다.
참된 리더십은 선한 목자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당한 권위를 행사합니다. 권력 욕심이 없습니다. 섬기는 리더십, 희생적인 리더십을 보여줍니다. 한 영혼, 연약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갖습니다. 인격적입니다. 자발적입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성실하게 섬깁니다.
반면에 삯꾼 목자와 같은 거짓 지도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권위주의적입니다. 위기가 닥치면 도망칩니다.
(결론)
양과 목자의 비유의 핵심은 관계의 친밀성입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알되, 도매급으로 알지 않습니다. 한나 하나 개별적으로 아십니다. 각각의 이름을 부른다고 했습니다. 목자에게 귀하지 않은 양은 없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해도 목자에겐 귀한 양이 됩니다.
성도 중에 어떤 분은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한 사람들과 비교하면 한 없이 작아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각자의 이름을 아시고 불러 주시는 주님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사랑 많은 부모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자녀가 없듯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부모의 관심이 더 가듯이,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자들을 더욱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본문 요10:14-15절에 보면, 목자가 양을 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노라.”
여기서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양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양이 미련하다는 것, 양의 값이 얼마라는 것, 양이 몇 마리인지 이런 것을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옥한흠목사님은 두 가지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
(1) 양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는 뜻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목자 입장이 아니라 양의 입장에서 양을 안다는 것입니다. 양이 얼마나 연약한지, 목자 없으면 얼마나 불쌍한지를 알고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이야기 가운데, 감동적인 장면이 두 개 나옵니다. 하나가, 요셉과 형제들이 만나 화해하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야곱과 에서가 만나 화해하는 이야기입니다. 에서가 야곱을 만나러 올 때, 야곱은 두려워서 밤새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며 기도했습니다.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화해가 이뤄졌습니다. 야곱이 준 선물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에서는 자기가 야곱을 호위하겠다고 합니다. 그때 야곱이 어떻게 말하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을 것입니다. 청하건데, 형님이 먼저 가세요. 저는 천천히 자식들과 가축들을 몰고 세일로 가서 형님을 뵙겠습니다.”
야곱이 좋은 목자인 것은 양의 입장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에서의 제안대로 양 떼를 급하게 몰면 지쳐서 죽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좋은 목자이신 것은 인간의 입장을 이해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당하는 시험도 받으시고 경험하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다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2) 목자가 양을 안다고 하는 것은 “도와 줄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무엇을 구했을 때, 아버지가 어떻게 말합니까? ‘아들아, 안다, 걱정하지 마라’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안다고 하는 것은 도와주겠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빌4:6-7절을 보세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러분,우리가 할 일은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기고 주께서 하시는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주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 살아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주님과 사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지 않는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절도와 강도와 같는 거짓 리더에 속을 수도 있습니다. 삯꾼 목자를 따르다가 멸망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날마다 주님과 기도와 말씀을 통해 깊이 교제하며, 친밀한 관계 속에 살아갈 때, 악한 마귀의 유혹과 세상의 소리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며 일평생 믿고 따라야 할 선한 목사는 주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들으시며 주님께 순종하며 사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