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서 빛으로
본문/ 요9:1-12
찬송가/ 305장
인생을 살면서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누구나 원치 않게 불행한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많이 병들었고 고장이 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의 사고나, 질병이나 자연 재해를 통해 불행을 만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불행한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 입니다. 또한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입니다. 왜냐하면 똑 같은 사건을 만나도 어떤 관점으로 보고 해석하느냐,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극복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자포자기에 빠질 수도 있고, 반면에 불행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목적을 발견하면서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불행을 안고 태어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사랑하는 부모의 얼굴도 볼 수 없었습니다. 본인도 힘들었지만, 그의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당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생계가 막막해서 걸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면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지나가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보셨습니다. 요한은 성경에서 그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9: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아마 제자들도 그 사람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냥 지나가려고 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가가서 그 맹인을 유심히 보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불행이 닥치면 아무도 나의 불행을 모른다, 아무도 나를 보아 주지 않는다, 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안 본다고 해도 우리를 바라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누구시죠?
예수님이십니다. 자비로우신 예수님은 어둠 속에 사는 인간, 불행 가운데 울고 있는 영혼을 보시며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같은 사람, 같은 사건을 보면서도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을 긍휼히 보시며,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 사람의 불행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셨고, 제자들은 제3자의 입장에서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의 불행을 보면서, 분명히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면, 깊이 생각하지 않고 판단을 먼저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하며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 침묵해야 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위로와 기도인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의 실수를 기억할 것입니다. 욥에게 닥친 재앙이 그의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며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이 맞고 너희가 틀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욥에게 가서 용서를 빌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점과 전혀 다른 관점으로 그 맹인을 보셨습니다.
요9:2-3절을 보세요. 같이 읽어봅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이니이까? 그의 부모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여기서 제자들의 질문은 신앙인으로서의 질문은 아닙니다. 당시 일반 사람들이나 오늘날의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한 질문입니다. 무슨 불행한 일이 생기면, 죄의 결과로만 보는 것입니다. 어떤 불행은 죄의 결과로 생겨나지만, 모든 불행이 죄의 결과는 아닙니다.
세상에는 죄 없이 선하게 사는 사람도 고통을 겪고 불행한 일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에 악한 사람이 건강하고 잘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의인의 고난에 관한 말씀이 있고, 악인이 잘 되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37:1,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여러분,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 나에게 무슨 죄가 있기 때문인가, 또는 부모의 죄 때문인가? 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니다, 그 사람이나 그의 부모의 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의 문제점이 뭔지 아세요?누구의 잘못인가를 생각하게 되면 헤어나올 수 없는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강영우 박사) – 유엔에서도 일했고, 부시 행정부 때에 백악관의 고위직을 지낸 분이십니다. (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그는 청소년기에 사고로 실명하게 됩니다. 얼마 후에 누나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납니다. 고아가 됩니다. 그 때 강영우박사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왜 나는 이렇게 불행한가? 왜 나는 저주를 받았는가?’라는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생각은 점점 더 불행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그 때 기독교 방송의 어느 목사님이 요한복음 9:3절, 본문에 나오는 구절을 이야기하면서, 맹인이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기 위함이라는 말씀을 듣고,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죄책감과 저주 받은 느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용기를 가지고 살았고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인가? 자신의 죄인가, 부모의 죄인가?”라고 묻는 것은 과거지향적인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더 악화시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거 지향적 생각이 아닌 미래 지향적 생각을 하게 하십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이나 역경이 오히려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타내다’ - 파네로우-예수님께서 부활 후 자신을 나타내실 때 사용된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요21:1,14) 부활하신 주님이 뜻이 있어서 나타내셨듯이 특별한 목적으로 보여주시다, 계시하시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고난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섭리적 의미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우연히, 재수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있다, 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현재 고난 가운데 처한 분이 계십니까? 왜 나에게 불행이 찾아왔지, 왜 나의 자녀에게 이런 장애가 생겼지, 불행의 원인을 찾으며 자책하시는 분은 없으신가요? 그렇게 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으세요. 그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혹시 제2계명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 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시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저주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부모의 책임에 대한 말씀입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도 우상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실제적으로 고난이 하나님의 일의 도구가 된 예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나면서 맹인 된 사람 –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 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죄로 인해 어둠 속에 사는 자들을 구원하여 빛 가운데 살게 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 주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다메섹 도상에서 밝은 빛을 보았기 때문에 사흘 동안 맹인이 된 적이 있는데요, 그 사건 때문인지 모르지만 바울은 일생동안 고쳐지지 않은 지병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질병의 치유를 위해 세 번(여러 번) 간구했지만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지 않고 연약한 몸을 가지고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히려 약한 것들을 자랑하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유명한 고린도후서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후12:7-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화니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1820-1915)에 대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 제일 많은 찬송가를 작시한 분이십니다. 23곡이 들어 있습니다. 그녀는 생애동안 9000개 이상의 찬송시를 썼다고 합니다.
화니는 생후 6개월 때, 의사의 실수로 실명하게 되는데, 30세 때 찬송가 “웬말인가, 나를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찬송을 듣다가 회심합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께서 수많은 찬송시를 쓰게 하셨습니다.
그녀는 앞을 보지 못하였지만, 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부흥 집회에서 간증을 하였는데, 사회를 보던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화니 크르스비 여사에게 많은 은사를 주셨지만, 볼 수 있는 눈을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 유감입니다.”
그 말에 화니는 어떻게 대답했는지 아세요?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천국에 갔을 때, 새로 주신 시력으로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제일 먼저 볼 수 있게 될 것을 생각하니, 너무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보게 된 눈으로 주님을 처음 보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도 했다고 합니다. “만약에 태어나기 전에 기도할 수 있다면, 맹인으로 나게 해 주세요.”
그만큼 앞을 못보면서도 성령과 기쁨으로 충만하였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1장에서 바울은 위로의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 있는 우리를 위로해 주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후1:3-4절,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자신의 사명과 관련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9:4, “때가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에는 아무도 일 할 수 없으리라.”
예수님 – 사명적 존재이시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일을 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 할 수 없는 때가 온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때에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 어떤 사역을 하셨을까?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열심히 일하셨는데, 제자들을 훈련하셨고,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병든 자들을 보실 때엔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귀신 들린 자, 맹인, 청각 장애인, 말 못하는 자 등 온갖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 사명을 받은 후 복음을 위해 얼마나 수고했을까요? 얼마나 많이 걸었을까?그는 복음을 위해 2만 킬로미터 이상을 걸었다고 합니다. 산이나 강이나 사막이나 바다나 그 어떤 장애물도 극복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1) 왜 바울이 열심히 사역했을까? 은혜에 대한 감사 때문입니다.
(2) 시간에 대한 긴박성 때문입니다. 엡5장 15-18절에서 바울은 시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월을 아껴야 한다고 했습니다. 때가 악하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3) 롬13장 11-14절에서는 당장 일어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라고 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아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고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영적인 잠을 자는 분이 있다면 일어나서 주의 일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밤이 되면 일할 수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
본문 요9:6절부터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치료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말씀으로만 치료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져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는지, 우리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물로 눈을 씻는 행위를 통해서, 죄로 어두워진 인간의 영적 눈을 주님께서 씻어서 밝게 해 주신 것을 깨닫게 하려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육체적인 맹인을 치료하시면서 영적인 맹인들인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일을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 본문 요9:8-12절은 맹인이었다가 보게 된 사람과 동네 사람들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걸인이었던 맹인이 눈을 뜨게 된 사건으로 인해 동네 사람들 사이에 적지 않은 언쟁이 일어났습니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요, 믿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길,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닌가?”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 비슷한 사람이지, 그 걸인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 아니다. 기다, 아니다, 기다’ 언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말입니다. 당사자는 “네, 제가 맞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네 눈이 떠졌느냐?” 그는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라고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해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변화- 걸인이었던 사람,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보게 되고 새롭게 된 것은 너무 놀라워 믿어지지 않았으며, 그래서 사람들이 언쟁까지 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변화를 받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신분이 변하고, 생각과 가치관이 변하고, 삶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걸인이었던 맹인이 몰라볼 정도로 변한 것처럼, 변하는 것입니다.
삭개오 – 예수님을 만난 후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리 마태도 마찬 가지이고, 사도 바울의 경우, 180도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박해자가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5:17절에서 이 변화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런 변화를 직접 체험하였던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전도할 때, 예수님께 직접 받은 사명을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께 받은 사명은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눈을 뜨게 해서,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역이라고 하였습니다.
행26:16-18절(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된 맹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너무 기뻐서 가슴이 벅차올랐을 것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예수님을 증거하며 다녔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의 공통점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갇혀 살던 사람이 빛 가운데 나왔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기뻐하며 주를 찬송하고, 주를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즐거이 헌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뜬 맹인이 만약 찬송가 305장을 알았다면, 이 찬송을 감격적으로 불렀을 것입니다.
같이 이 찬송의 가사를 생각하면서 불러보겠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여러분,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어둠 가운데, 사탄의 권세 아래 신음하고 있습니다 . 이들에게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서 눈을 뜨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또한 오늘 우리들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아직도 어둠 속에 살아야 했던 저와 여러분이 이제 빛 가운데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어둠 가운데 사는 영혼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사명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