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요한복음 4:19-26)
예배(禮拜)는, 문자적으로는 ‘예를 갖추어 절한다’라는 뜻으로, 종교에서 신앙의 대상에게 존경과 숭앙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어느 종교이든지 기본은 예배입니다. 그들의 신 앞에 나아가는 겁니다. 예배라는 말은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가치(Worth)’와 ‘지위’(신분, Ship)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최고의 가치가 있는 분에게, 최고의 가치를 드린다’는 것이 예배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라는 고백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습니다. 그렇기에 만들어진 존재는 만드신 분을 경배해야 합니다. 찬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96:8-9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주님께 돌려라. 예물을 들고, 성전 뜰로 들어가거라.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께 경배하여라. 온 땅아, 그 앞에서 떨어라.”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찬양과 경배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감사와 찬양과 경배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런 감사와 찬양과 경배로 주님 앞에 살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만들어진 존재가 자기를 만드신 분을 찬양하는 겁니다. 그것은, 만들어진 나를 찾는 겁니다. 그분이 나를 만드신 그 의미를, 그 목적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따라 사는 겁니다. 이것을, ‘인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없으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 43:21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 시편 150:6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숨 쉬는 사람마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우리는 레위기가 ‘제사’에 대해서 말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성구대전>에서 보면, 레위기에서 ‘제사’라고 하는 단어는 레위기 7:18; 8:28에 있습니다. 이럴 때에 ‘제사’는 히브리어로 ‘제파흐’라고 하는데, ‘희생물’, ‘헌물’, ‘제물’을 의미합니다. 그 말의 어근이 ‘자바흐’ 인데, ‘동물을 살해하다’라는 말입니다. 보통 제사에서는 동물을 살해하기에, ‘제사 드리다’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레위기 6:26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그 제물을 먹는다.” 이럴 때에 ‘제사’는 히브리어로 ‘차타’라는 말인데, ‘속죄 물을 드리다’, ‘속죄하다’는 이미를 가집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림은 제사가 아닙니다. ‘제물을 드림’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2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너희 가운데서 짐승을 잡아서 나 주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누구든지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쳐라.” 예, ‘제사를 지내라’ 아니라, ‘제물을 드려라’는 겁니다. 그게 그거라고요?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람이 하나님께 아들을 드립니다. 그럴 때에도 아들을 묶어서 단위, 장작을 쌓아놓은 곳 위에 얹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죽이면 불로 태울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제사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예배입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드리는 겁니다.
당시 가나안 원주민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바쳤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곳곳마다 ‘제사’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대체적으로 하나님을 달래려는 몸짓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려는 몸짓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드리는 제사를 마다하셨습니다. 호세아서 4:13, “산꼭대기에서 희생제물을 잡아서 바친다. 언덕 위에서 분향한다.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의 그늘이 좋다고, 거기에서도 제물을 잡아서 불살라 바친다. 너희의 딸들이 음행을 하고, 너희의 며느리들이 간음을 한다.” 호세아서 8:13-14, “희생제물을 좋아하여 짐승을 자아서 제물로 바치지만, 그들이 참으로 좋아하는 것은 먹는 고기일 따름이다. 그러니 나 주가 어찌 그들과 더불어 기뻐하겠느냐?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고, 그들이 허물을 벌하여서, 그들을 이집트로 다시 돌려보내겠다. 이스라엘이 궁궐들을 지었지만, 자기들을 지은 창조주를 잊었다. 유다 백성이 견고한 성읍들을 많이 세웠으나, 내가 불을 지르겠다. 궁궐들과 성읍들이 모두 불에 탈 것이다.”
이사야서 66:3-4, “소를 죽여 제물로 바치는 자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자와 같다. 양을 잡아 희생제물로 바치는 자는 개의 목을 부러뜨리는 자와 같다. 부어드리는 제물을 바치는 자는 돼지의 피를 바치는 자와 같다. 분향을 드리는 자는 우상을 찬미하는 자와 같다. ‘이러한 제사장들은 나의 뜻을 묻지 않고 제 뜻대로 한 자들이다. 오히려 가증한 우상숭배를 즐겼다. 가증한 우상들을 진정으로 좋아하였다. 그러기에, 나도 나의 뜻대로 그들을 혹독하게 다루어, 그들이 겁내는 것을 그들에게 들이닥치게 하겠다. 내가 그렇게 불렀으나 그들이 응답하지 않았으며, 내가 그렇게 말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않았으며, 오히려 내가 보는 데서 악한 일을 하며,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골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요, 그들의 제사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여기시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선 제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그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죄사함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제사를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압니다. 이럴 때에도 우리는,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다고 말합니다.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4:3-4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다.” 창세기 8:20, “노아는 주님 앞에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집짐승과 정결한 새들 가운데서 제물을 골라서,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쳤다.” 예, 예배를 드렸습니다. 짐승을 바치고, 자기의 소원을 아뢰는 제사가 아닙니다. 내 죄를 용서받으려고, 짐승을 드리는 정도가 아닙니다. 짐승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면 용서하시겠다고 하셔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 그런 짐승을 하나님께 드리기 훨씬 전에 그들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세기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새 번역, “셋도 아들을 낳고, 아이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하였다.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세기 12:8,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는 말을, 새 번역은 “아브람은 거기에서도 제단을 쌓아 주님께 바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라고 번역합니다. 이 몇 개의 구절을 보면, 제사드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을 드림입니다. 그렇게 바치는 방법이 불로 태워서 드리는 번제가 있는 겁니다. 곡식을 드리는 소제가 있고 그런 겁니다.
시편 84:1-12, “만군의 주님,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 만군의 주님,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참새도 주님의 제단 곁에서 제 집을 짓고, 제비도 새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 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 뵐 것입니다. 주 만군의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야곱의 하나님,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 주신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 주님께서는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 길에 오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에 시온의 순례 길에 오른 사람은, 이미 그 마음이 성전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 길을 쉬운 길은 아닙니다. 우리처럼, 어디든 교회가 있어 아무 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가야 합니다. 그러니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전을 향해 갈 때마다 경험했습니다. 눈물의 골짜기이지만, 샘물이 솟아서 마셨습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워서 마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 뵈었던 겁니다.
그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성전에 나아가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주 만군의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야곱의 하나님,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 주님께서는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랬는데, 어쩌다 ‘예배드림’이 별 볼일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귀찮은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하도 많이 드리니까. 우리 어렸을 때에는 낟알이 귀했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설거지에서 쓸려나가면 천 벌을 받는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그리 귀중하지 않습니다. 많으니까요. 그래서 예배도 그런가 싶어요. 꼭 그렇게 예배드려야 하나 싶은 생각도 있나봅니다. 가까운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면서 주일 오후 예배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처음엔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번엔 목사님이 오후예배 드리자고 하니 모두들 반대하더랍니다. 몸에 익었거든요. 학생들이 학교 안 가는 날을 좋아하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배시간에 예배드리지 않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 겁니다. 분명히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만군의 주님,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나요? 시간마다 하나님께 예배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주셨다고 간증할 뭐가 있나요? 가정예배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주셨다고 간증할 뭐가 있나요? 그렇게 오랫동안 예배드렸어도 복은 못 받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무 생각이 없으신 것 보니, 예배드림으로 받은 복은 없는가 보네요? 그러면 무얼 해서 복을 받은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셨다면, 무엇을 했기에 복을 주신 것 같습니까? 생각이 나는 게 없어요? 그러셨군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이 없나보군요. 결국 여러분이 애쓰고 노력해서 살아온 거군요. 여러분이 고생해서 일하므로 살아온 거군요. 그래서 두렵습니다. 그 믿음이 두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해주신 게, 아무 것도 없다고 시치미 떼는 그 믿음이 두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해주신 거라고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그 믿음이 두렵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에 수가라고 하는 성이 있었는데, 그곳에 야곱이 팠다고 하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여인과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대답합니다.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바로 말하였다.” 아마도 여자는 속으로 깜짝 놀랐나 봅니다. 그래서 얼른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예배를 드려야 한다, 안 드려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배는 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다만, 그 예배드리는 장소가 어디냐 하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예배드려야 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예,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 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 비로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거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예배드리는 그 분은 누구인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예배는, 항상 하나님과 연관하여 이해되고 또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물음과 그 물음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답이 없으면, 예배는 무의미합니다. 예배가 무의미해지면, 자연적으로 예배드림을 등한히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이것은 수없이 반복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우리가 인정하느냐?”는 겁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세상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인정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것도 믿고 인정합니까? 이것이 인정되고 믿어진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만드시고 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신데 어찌 예배를 드리지 않겠습니까?
혹시 우리가 아무 때나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아무나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누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줄 아십니까?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 1:17,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고 여겨진 사람만이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자격 요건입니다. 이 자격 요건이 갖추어진 사람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물어볼게요. 여러분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자격 요건이 갖추어져 있습니까? 예, 갖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시잖아요? 그렇다면 자격 요건이 갖추어져 있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요, 사랑이요, 복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예배드림이 은혜요, 사랑이요, 복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그래서 지금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이 시간이 행복한가요? 그래서 시편기자와 같이, “만군의 주님,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라는 마음인가요?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요? 왜 우리에게 있어서 예배는 별 볼일 없는 종교적인 행사가 되어 버렸을까요? 예배에 감동이 없는 겁니다. 소위 말하는 은혜가 없는 겁니다. 그냥 나와 앉았다가 돌아가는 정도인 겁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요? 왜 예배가 감동이 없나요? 왜 예배에 은혜가 없나요?
24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내 뜻대로 드릴 수 없습니다. 그냥 여기 나와 앉았다가 가는 정도로 예배드렸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우리의 감정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우리가 중심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여야 하고, 하나님께서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이럴 때에 영은, “인간은 영적인 존재”라고 말하는, ‘우리 속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불멸의 어떤 것을 가리킨다’는 그런 영이 아닙니다. 이럴 때에 진리는, '참된 도리'라고 하는, ‘사실이 분명하게 맞아 떨어지는 명제, 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사실 혹은 참된 이치나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영과 진리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6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영이요 진리이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8:10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을 얻습니다.” 그렇기에, 여기 우리가 나와 앉은 이 예배의 자리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마련하신 자리입니다. 여기 우리가 나와 앉은 이 예배의 자리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마련한 자리입니다. 그렇기에 예배는 아무렇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구약에서의 레위기입니다.
레위기에서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성소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여러 규정을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나, 아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정결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번제단이 분향단 앞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배드림으로 정결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정결한 사람들이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레위기에서 중점적으로 나오는 것은 백성의 정결 규정입니다. 이러한 규정들은 레위기 19장에서 그 절정은 이룹니다. 19: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그리고 19:18,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23-24,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레위기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림으로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움직이거나, 하나님께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제물로 바치는 짐승은 언제나 제물을 바치는 사람을 대신합니다. 그렇기에 제물을 드리는 본 뜻은, 제물을 드리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해서 사람의 참된 삶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의 제사는 그렇게 드림으로, 농사가 잘 된다든지 하는, 뭔가 보상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내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겁니다. 그렇기에 내 자신이 거룩해야 합니다. 정결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영과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렇기에, 예배드린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요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이 있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는 예수님의 피값으로 세운 교회입니다. 이 예배 자리는 예수님의 피값으로 마련된 자리입니다. 이 믿음으로 드릴 때에 예배는 감동이 있는 겁니다. 이 은혜로 드릴 때에 예배는 은혜가 있는 겁니다.
이사야서 40:22-25, “땅 위의 저 푸른 하늘에 계신 분께서 세상을 만드셨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메뚜기와 같을 뿐이다. 그는 하늘을, 마치 엷은 휘장처럼 펴셔서, 사람이 사는 장막처럼 쳐 놓으셨다. 그는 통치자들을 허수아비로 만드시며, 땅의 지배자들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드신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풀포기와 같다. 심기가 무섭게, 씨를 뿌리기가 무섭게, 뿌리를 내리기가 무섭게, 하나님께서 입김을 부셔서 말려버리시니, 마치 강풍에 날리는 검불과 같다.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너희가 나를 누구와 견주겠으며,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 하나님과 견주겠습니까? 누가 하나님 같겠습니까? 나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그의 자녀로 삼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더구나 나에게 새 힘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28-31절까지 말씀합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는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면,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비록 젊은이들이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이 맥없이 비틀거려도,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예,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겁니다. 하나님만 바라고, 기대하고, 그 앞에 나아가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기에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예배를 통해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붙드시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을 쓰실 것입니다. 그것이 곧 우리의 영광이요 복인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