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크의 복(福)(창1:27-28)


 


새해가 되었다. 주님의 은총이 모든 성도님들과 이 지역 주민들 모두에게 풍성히 임하시기를 기원한다.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새해 복(福)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한다. 기독교적인 신앙과는 맞지 않지만 세상 사람들은 특히 올해가 황금돼지해라고 하면서 더욱 복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고 기원하는 복은 주로 건강, 출세, 장수, 부자 되는 것, 돈 많이 버는 것, 1등하는 것, 취직하고, 승진하는 것, 본인 또는 자녀들이 결혼 잘하는 것 등들과 같은 이 세상적인 것들이다. 물론 성도들도 서로를 향해서 복을 많이 받으시라고 덕담을 건넨다. 또 올 한 해가 하나님의 주시는 크신 축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복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과는 무엇이 다르고 또 달라야 하는가? 성경에서 “복”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오늘 본문인 창세기 1장 28절에서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가장 먼저 주신 것이 바로 복(福)이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후에 가장 먼저 주신 것이 복이며, 그 복의 내용은 무엇인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또는 지금도 여전히 주시기 원하시는) 복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여기서 사용된 “복”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바라크(ברך, Blessing)"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바라크’를 주신 것이다. 바라크라는 말은 ‘무릎을 꿇다’, ‘경배하다’, ‘찬양하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약 330회 정도 등장한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을 받았다는 말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이 정확하게 동의어다.


그러니까 자세히 보면 바라크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복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신지를 함축하고 있다. 이 말의 뜻대로 본다면, 보통 우리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는 “주님 안에서 복을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했다면, 이 말은 곧 “주님을 경배하는 하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또는 “주님께 무릎을 꿇는 사람이 되고 찬양하는 사람이 되세요”라는 의미가 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복의 개념은 그 근거와 출발을 세상적인 그 어떤 것들(물질, 명예, 소유 등)에 두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근거를 둔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사람 속에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흔적을 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사람이 영적인 존재가 되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28절). 그런데 이런 표현들은 왕(王)에게 허락된 단어들이다. 바라크의 복은 단지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으로만 끝나는 개념이 아니라,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말씀대로 순종하며 충성하며 섬기는 왕적인 권위를 지닌 선한 청지기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그 자체가 이미 바라크의 복을 받은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충성하며 섬기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복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고자 했던 복 즉 바라크의 개념이다. 어쩌면 이러한 성경의 바라크 복의 개념이 하나님을 이용해서 세상의 것들을 좀 누려보려고 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실망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복이 진짜 복이다. 이러한 바라크의 복을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팔복(八福)으로 설명하셨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바라크의 축복과 그로인해서 주어진 왕적인 권위의 축복을 사람은 잃어버렸다. 이것을 다시 회복시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회복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손에 비록 거머쥔 것이 많지 않다해도,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비로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고, 우리에 양(羊)이 없다 해도(합3:17-19), 그래도 내 안에 주님이 함께 함으로 우리는 복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들”(벧전 2:9)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라면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바라크(무릎 꿇고,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의 복을 추구해야 한다. 나를 통해서 바라크의 복이 온 땅에 흘러가게 하는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흔적, 하나님의 형상, 예수님의 흔적을 간직한 왕권을 회복한 성도들의 복된 모습이다. 이것을 한 해 동안 그리고 평생 동안 추구해 가자.


얼마 전에 『그 청년 바보 의사』라는 책의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그는 부재중이지만 그의 사랑은 진행 중입니다”라는 부제가 붙었다. 이 책은 지난 2006년에 세상을 떠난 당시 33세의 청년 의사 안수현군에 대한 이야기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안수현이라는 청년 의사에게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써 내려간 책이다. 안수현군은 서울 영락교회 출석하던 신실한 크리스천이었고, 학교는 고려대 의대 91학번이다. 그는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 유행성 출혈열에 걸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촉망받는 한 젊은 의사의 안타까운 죽음처럼 으로만 보인다.


그런데 그의 장례식에 몰려온 4천여 명의 사람들을 통해 33세의 크리스천 청년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감동을 주었다. 안수현군의 장례는 영락교회에서 교회장으로 치러졌다. 그가 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안타까워했을까? 그의 장례식에 찾아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에게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동료의사들, 간호사, 병원 직원, 교회 선후배, 군인, 병원 청소하는 분, 식당 아주머니, 매점 앞 구두 닦는 분 그리고 그가 진료했던 수많은 환자들이었다.


그의 선행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그는 세상에서 대우받을 수 있는 직업을 가졌지만, 누림보다 남을 위한 섬김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돌보던 환자들을 병실에 몰래 찾아가 조용히 기도해주던 의사였다. 자신이 돌보던 환자가 세상을 떠나면 장례식장에 찾아가 유족을 위로했고, 돈이 없는 조선족 할아버지의 검사비를 대납하고, 백혈병에 걸린 소녀의 집까지 찾아가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청년을 자기 차에 태워 콘서트장에 데려가기도 했고, 집에만 누워 있는 어린 환자를 찾아가 책을 읽어 주기도 했다. 심지어 입원했던 어린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선물을 들고 부산까지 가던 바보의사였다. 병원 앞 구두닦기 할아버지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인사하고 손을 잡고 위로하며 사랑을 전했다. 그러면서도 주말이면 영락교회 의료 선교부를 이끌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의료봉사를 나갔다.


안수현군은 친구들에게 이메일을 쓸 때나 글을 보낼 때, 늘 마지막에 “스티그마 안수현”이라고 적었다고 한다. “스티그마(στιγμα)”란 갈라디아 6장 17절에서 사도 바울에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했을 때 사용했던 “흔적”이라는 단어다. 안수현 군에게 있어서 예수의 흔적은 육체가 아니라 그의 마음과 생활에 새겨진 흔적이다. 『그 청년 바보 의사』 안수현, 과연 그가 진짜 바보였을까? 그렇지 않다. 바로 이 모습이 바로 처음 인간을 지으시고,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흔적을 주시고, 바라크(무릎 꿇다, 경배하다, 찬양하다)의 복을 주셨던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에도 동일하게 우리들에게 기대하는 모습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는 삶이 곧 바라크(복)의 삶이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고, 가치를 두어야할 복의 개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주민 여러분이여, 그러므로 때로 우리들이 정말 이해 할 수 없는 여러 형태의 고난과 어려움으로 인해 난공불락의 상황일 지라도, 그 고난이 계기가 되어 하나님께 무릎 꿇고 경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바라크(ברך, Blessing)의 복을 경험하며 살아가자. “지금 주님이 나를 부르신다면 나는 나의 소명을 다하고 저 높은 곳에 우뚝 서서 나의 주인이신 주님을 만나는데 부끄럼이 없는가?” 이 질문 앞에 여러분들의 대답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