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나 타(계22:12,20)

 

오늘은 2018년 마지막 주일인 송년주일입니다. 어느새 또 한 해가 흘렀습니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휙 하고 지나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고 흐르다 보면 우리 각자의 인생도 끝나게 될 것입니다. 연말연시는 신앙 각성의 기회입니다. 해가 바뀌는 게 엄밀히 말하면 숫자가 달라지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인생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니까 감사합니다. 해가 바뀌는 게 없으면 어제나 오늘이나 아무 생각 없이 엄벙덤벙 살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될 텐데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이렇게 중간 중간 인생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 관해 생각할 때 개인의 죽음도 생각해야겠지만 인류 역사의 종말도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성탄절을 지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어린 아기로 오셨지만 장성한 후에는 대속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다시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합니다. 이를 가리켜 재림이라고 말하죠. 예수님의 성탄은 첫 번째 오심이라 하여 초림(初臨, First Coming)이라 부르고, 다시 오시는 것은 두 번째 오심이라 하여 재림(再臨, Second Coming)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의 초림이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재림도 성경의 예언대로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해 보면 재림에 관한 약속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재림의 예언이 초림의 예언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구약에 1,800회, 신약에 300회나 되는데 초림의 예언에 비해 7배 가까이 됩니다. 이로 보건대 재림은 확실한 미래이며 아주 중요한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림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왜곡된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사이비 이단들의 영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뭔가 어둡고 두려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성도들에게는 밝고 복된 것입니다. 비유해서 말하면 신부가 결혼을 위해 신랑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이야 결혼식을 할 때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정해 놓지만 고대 근동의 풍습은 좀 달랐습니다. 결혼식을 정해 놓아도 교통이나 통신이 불비했기 때문에 신랑이 오기는 오지만, 그리고 올 때가 가까운 것도 알지만 정확한 시각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언제 올지 설레는 마음으로 신랑을 기다립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면서 어두운 표정으로 무서워합니까? 그러면 뭐하려고 결혼하겠습니까! 불신자들이야 차치하고 성도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만날 날을 설레는 마음으로 행복한 기대감을 갖고 기다리는 게 마땅합니다. 그게 바로 성도가 천국을 소망하는 마음이요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송년주일을 맞이하여 세월이 신속함을 새삼 느끼면서 예수님의 재림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남은 인생 예수님과 만날 날을 기약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을 가장 잘 하는 방법이고 인생을 가장 잘 사는 방법입니다.

 

[1] 재림의 확실성 : 홀연히 공개적으로 오실 것

 

먼저 예수님의 재림이 어떤 모습이 될지 살펴봅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로 재림을 증거하는데 핵심적인 내용은 홀연히, 그리고 공개적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요? 초림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초림 때에는 특별한 몇 사람만 알도록 은밀하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재림은 전혀 다릅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승천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광경을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천사 둘이 그들에게 전해준 말이 행1:11에 나옵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반드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2천 년 전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던 그분은 이제 부활하셨던 모습으로 영광스럽게 천사들을 대동하고 다시 이 세상에 오실 겁니다.

 

계1:7에서도 이렇게 증거합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모든 인간이 다 볼 수 있게 오신하는 겁니다.

 

그러면 언제 오실까요? 정확한 날짜는 모릅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죠. 마24:36 “그러나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도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았다면 어느 날 어느 시에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을 가리켜 시한부 종말론(時限附終末論)이라 부릅니다. 이런 자들은 보나마나 무조건 이단입니다. 성경과 다른 말은 하면 그 누구라도 이단입니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런 이단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 마디로 혹세무민입니다.

 

예수님은 재림의 시기는 모르지만 그 때가 가까워지는 것은 알 수 있도록 징조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재림이 가까운 말세에 나타나는 징조는 난리, 전쟁, 재해, 재난, 인간성 타락, 이단과 적그리스도 출현 등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이 강조한 사실이 있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 이렇게 누차 말씀하셨습니다(계3:11, 22:7,12,20).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속히 오신다고 해놓고 2천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안 오시는 건 뭐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이 벧후3:8~9에 나와 있습니다.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의 시간 단위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길게 느껴져도 하나님에게는 아닐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아직 안 오시는 게 아니라 못 오시는 겁니다. 온 세상 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전파된 후에 오신다고 하셨는데(마24:14) 이게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성도들이 육신의 수명을 다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면 재림보다 개인의 죽음이 앞서는 겁니다. 그럴 경우는 먼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고 육신은 흙으로 갔다가 재림 시에 부활합니다. 그러면 마찬가지입니다. 순서 상 죽은 자가 먼저 부활하고 살아있는 상태에서 재림을 맞이하는 자는 그 다음에 부활합니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재림으로 모든 인간과 만물이 한꺼번에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우주적 종말이라 부릅니다. 그 이전에 개인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개인적 종말이라 부릅니다. 어느 쪽이든 지상에서의 인생이 마감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궁극적으로는 재림 후에 모든 성도들이 부활해서 하나님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재림의 목적 : 심판 – 백보좌심판, 상급 심판

 

그러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초림 때는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셨지만, 재림 때는 심판주로 오십니다. 물론 불신자에 대한 심판과 신자에 대한 심판이 다릅니다. 불신자는 정죄심판을 받고 영원한 사망을 당합니다. 신자는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죄 사함 받았으므로 정죄심판은 면제받고(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심판을 받아주셨기에), 믿음 후에 살았던 행적에 대해 상급심판을 받게 됩니다.

 

본문 계22:12에서 증거한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예수님이 상을 주러 재림하신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심판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계20:11~15에 보면 최후의 심판이 나오는데 크고 흰 보좌 앞에서 각 사람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일명 ‘백보좌심판’이라 부릅니다. 이는 정죄심판으로 그 결과 영원한 사망 즉 둘째 사망에 처해집니다. 영원한 불못(lake of fire)에 떨어져 고통 받는 형벌입니다. 보좌 앞에 생명책과 행위책이 놓여 있습니다. 대속의 십자가 은혜로 속죄 받은 성도들의 이름은 생명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정죄심판은 면제받습니다. 행위책에는 모든 사람의 행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에 따라 불신자는 정죄심판을 받습니다. 핑계치 못합니다. 반면에 성도는 상급심판을 받게 됩니다. 고후5:10에 보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각각 상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 이후에 잘 한 것들만 기억해 두셨다가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는 재림이 두려운 사건이 아닙니다.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는 날이요, 상을 받는 날입니다. 온전한 신앙을 가진 성도라면 당연히 기다리고 기다려야 할 사건입니다. 이 세상은 아무리 좋아도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되던 때는 로마의 박해가 한창이던 초대교회 시대였는데 성도들은 고달픈 인생이었지만 재림에 대한 소망,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인내하며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재림은 그들에게는 너무너무 기다려지는 사건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기도문 그대로입니다. 계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오소서!”는 아람어로 ‘마라나 타’(고전16:22)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의 성찬식 중에 사용된 공식기도문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찬식을 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하며 재림을 대망했습니다. 그리고 “마라나타!”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끼리 서로서로 격려하던 인사말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세상이 화려해지고 풍요로워지고 핍박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재림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이 얼마나 간절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림은 분명히 있을 것이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세계복음화가 우리 생각보다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 인터넷의 발달, 도시화 등으로 그 시기가 앞당겨지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이지만 TIME지와 CNN 공동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미국인들 중 53%가 21세기에 재림이 있을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그 중에는 불신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조사해 보면 그 비율이 더 높을지도 모릅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계 복음화 선교의 상황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재림이 언제든 우리가 먼저 부르심을 받아 주님께로 갈 수도 있기에 항상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 만날 그 날을 소망해야 합니다. 사탄은 재림이 가까울수록 종말이 가까울수록 극성을 부립니다.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훼방하려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도 더욱 각성하고 믿음을 견고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벧전5:8~9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 ”

 

[3]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 : 믿음, 경건, 사랑, 사명의 삶

 

그러면 성도들이 구체적으로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믿음을 잘 지키고

경건하게 그리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자녀의 권세는 빼앗기지 않습니다. 주님의 큰 손을 붙잡아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요10:28~29). 그래도 사탄은 흔들어봅니다. 때로는 달콤한 유혹으로, 때로는 무서운 핍박으로. 그런 것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여러분, 춘향전의 스토리를 잘 아시죠. 춘향이는 한양에 간 이 도령이 돌아올 것을 굳게 믿고 기다립니다. 소식은 없고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남원 부사로 변학도가 부임합니다. 학정을 일삼는 그가 춘향이에게 수청을 들라 강요합니다. 그러나 핍박을 무릅쓰고 거부합니다. 결국 옥살이를 하고 고초를 당하지만 끝까지 정절을 지킵니다. 그러던 중 장원급제한 이 도령이 어사가 되어 나타나 변학도를 응징하고 춘향이를 구해 백년해로를 하게 됩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모습과 흡사한 스토리입니다.

 

눅21:34에서 예수님이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계19:7~8을 보면 재림의 때에 성도가 맞이하는 것을 공중 혼인잔치로 비유합니다. 성도는 그 날을 기대하며 마치 신부 수업을 하듯이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입는 세마포 옷은 비유하면 천국의 웨딩드레스로 성도들의 거룩한 행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세상 것은 다 사라집니다.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췌장암에 걸려 투병 중일 때 죽음을 예감하고 고백합니다. 지난 생애 그토록 열망했던 성공, 명예, 재산을 다 이룩했지만 죽음 앞에 무의미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종말이 가까운 시대에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렇게 권면합니다. 벧전4:7~8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해도 짧은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서는 날이 가까울수록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계2:10,3:11 “2:10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 3: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사탄은 이 세상이 전부인 양 우리를 속입니다. 불신자는 물론이고 성도조차 이 세상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이런 데만 관심을 갖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재화(시간, 건강, 물질, 재능)는 단순히 누리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그것을 갖고 사명을 감당하라고 맡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입니다. 구원은 빈 손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 받을 수 있지만 영원한 천국의 상은 빈 손 들고 받는 게 아닙니다. 어영부영하다 보면 세월이 다 흘러갑니다. 주님 앞에 설 때 받을 상이 없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러나 받을 상이 있는 사람은 감격과 자랑이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 국민일보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2018/12/20)를 읽었습니다. 강원도 정선의 모 고교 교감 선생님의 사연이었습니다. 1년 전 제천의 스파스포츠센터 화재 참사 당시 29명 사망자가 있었는데 그의 부인이 그 중에 끼여 있었습니다. 그 날 아침 정선의 관사에 머물다 제천으로 반찬 봉사(반찬을 만들어 이웃에게 전달하는 봉사)를 하러 간다고 해서 하루 쉬면 어떻겠냐고 말했습니다. 부인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불우이웃들이 기다려서 가야 된다고 했습니다. 몇 시간 후 문자가 왔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 ” 그런데 일과를 마치는 시간에 화재 사고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아마 봉사를 마치고 교인들과 함께 그곳에 갔던가 봅니다.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지만 소재 파악이 안 돼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한 병원의 영안실에 안치된 부인의 시신을 확인합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그을린 가방에 백설기 두 개가 있었습니다. 평소 남편에 좋아하는 것이라 챙겨 둔 것 같습니다. 얼굴이 너무 깨끗했습니다. 위로가 되는 한편 그런 정도이면 구조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유품을 정리하다 통장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지인들에게 들으니 남편 몰래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을 저축한 것으로 동남아 나라에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프로젝트에 기부해 왔다고 합니다. 두 채를 지었는데 목표는 10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편은 1년 동안 3채를 지었고 남은 5채도 지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청년 시절 강원도 벽지에 교사로 부임해서 혼자 방탕하게 지내다가 교회에 나갔는데 거기서 부인을 만났다고 합니다. 박봉에도 신실한 모습으로 내조하던 부인과 은퇴 후 텃밭이나 가꾸며 노후를 보내겠다고 생각했는데 일찍 떠난 것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보면서 하나님이 왜 그 날 그분을 구해주지 않으셨나? 야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다 그런 겁니다. 세상의 복잡한 상황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분은 끝까지 충성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추억을 많이 남기고 가셨습니다. 천국이 있기에, 그리고 재림의 때 다시 만날 기약이 있기에 슬프지만 위로받을 수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북한 사역을 하는 선교사님이 선물로 주신 그림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공중에서 예수님과 성도가 포옹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신앙의 핍박을 피해 지하교회에서 힘들게 신앙을 지키며 온갖 고초를 겪으며 사는 그 성도가 어떤 심정으로 그림을 그렸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가 얼마나 천국을 소망하고 재림을 대망하는지 헤아려집니다. 주님의 품 안에 안겨 엉엉 울 텐데 주님이 눈물을 닦아 주시고 이제는 기쁨만 있을 거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눈물이 없는 곳입니다. 재림은 모든 것의 치유와 회복, 그리고 영원한 영광과 승리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눈물이 사라지고 지극한 기쁨만 있을 것입니다. 흑인 영가 중에「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No Tears in Heaven)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 거기는 슬픔도 없네 /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 거기는 승리만 있네 / 고통은 모두 다 사라져 버리고 / 영광만 가득하겠네 … ” 이 가사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가장 잘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성도가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이라도 주님이 재림할 수 있음을 믿는 사람, 오늘이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2018년이 지나고 곧 2019년이 우리에게 또 주어집니다. 부디 주님 만나는 그 날까지 남은 생애 믿음을 지키고 경건한 모습으로 사랑하며 사명을 감당하며 아름다운 인생을 꼭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