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룻기(5)/작별

제목 : 나오미와 자부들과의 작별

성경 : 1:8-14

 

 

1: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1: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8절부터 18절까지는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있는 장면입니다. 오르바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간곡한 만류에 결국 자기의 백성과 신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끝까지 어머니를 설득했습니다. 결국 룻은 자기를 떠나보내려던 나오미를 포기하게 만들고 같이 길을 가게 됩니다.

 

룻기는 뛰어난 문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로 대화체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룻기가 전체 85절인데 그중 56절이 대화입니다. 8절부터 나오미와 룻, 오르바 이 세 사람 사이에 긴 대화가 시작됩니다. 룻기에서 처음으로 보이고 있는 대화입니다.

 

너희의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라!

 

7절 마지막 부분에 "길을 가다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나오미와 두 자부의 대화가 시작된 곳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의 중간 어디쯤이었을 것입니다. 이곳은 모압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이었을 것입니다. 옛날부터 동양에는 손님을 멀리까지 배웅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아마도 베들레헴과 모압의 경계지역쯤까지 나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실 나오미는 두 자부를 데리고 베들레헴에 돌아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라는 작별 인사를 한 것입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모압에서 작별하자고 했다면 두 자부가 나오미로 하여금 떠나지 못하게 만류했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과 모압에 계속 머물러 함께 살자고 열심히 간청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쯤이면 그들의 설득을 쉽게 물리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혼자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나오미 자신은 베들레헴에 돌아가면 그래도 친구들과 친척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자부에게는 낯선 땅입니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신앙과 풍습이 다른 곳입니다. 두 자부의 안식처는 베들레헴이 아니라 모압이라는 것을 나오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며느리에게 돌아가라고 강권하였습니다. 여기서 나오미가 두 자부를 사랑하여 깊이 배려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어디로 가라고 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구약 성경에 보면 보통은 "아비 집"이라고 나옵니다. 그 예를 한번 찾아보십시다.

38: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30:16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규례니 남편이 아내에게, 아버지가 자기 집에 있는 어린 딸에 대한 것이니라

 

본문 8절에서는 "어미의 집"이라고 표현했는데 성경에서 "어미의 집"이라 한 곳을 찾아봅니다.

3: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어미의 집은 사랑이라든지, 결혼하는 것과 관련된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 중의 하나는 그 자녀들에게 이성간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교육하는 것입니다.

 

24:67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하여 신부를 어머니의 장막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나오미는 진심으로 며느리들이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인생을 살기를 소원했습니다.

 

각기 남편의 집에서

 

9절에서 나오미가 자부들을 축복해주고 있는 말에 보면 "남편의 집"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두 자부가 새로이 결혼을 해서 남편을 얻어 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이 말씀은 8절에 이어서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빌어준 두 번째 축복의 말입니다. 이 구절을 보면 나오미로서는 두 자부에게 그 어떤 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두 자부가 나오미에게서는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나오미는 자기가 두 자부들의 미래에 어떤 좋은 것도 해줄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못하는 것을 대신해서 해주시기를 빌었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이 자기를 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괴롭게 했다고 믿었습니다. 13절에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라 했습니다. 20절에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1:20,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이 모든 불행은 하나님께서 치셨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을 때 흉년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이방 땅으로 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나오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향을 떠난 것이나, 남편과 아들들이 죽은 것이나, 이 모든 것의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룻을 통해 결국은 그 후손에서 이스라엘의 성군인 다윗이 출생하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가 그 후손에서 탄생한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8절에서 나오미가 자부들에게 해준 첫 번째 축복의 말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이 구절에서 "죽은 자"는 누구입니까? 나오미의 죽은 두 아들을 말합니다. 즉 오르바의 남편 기룐과 룻의 남편 말론입니다. 오르바와 룻은 남편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과부가 되었고 거기다가 아들도 없었지만 기꺼이 견디면서 함께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살아온 자부들에게 하나님이 선대하여 주시기를 빌어주었습니다.

8절에서 여호와께서 선대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축복에 이어, 9절에서도 자부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위로"라는 말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거나 길 위에서 오래 방랑 여행하는 것을 끝내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룻과 오르바가 결혼하여 한 곳에 정착하여 남편의 사랑을 받고 안정을 누리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남편을 주시는 분이 누구시라는 것입니까? 여호와시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채워주시는 분이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통제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평안함을 주시고 쉼을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작별의 입맞춤

 

나오미가 자부들에게 남편의 집에서 평안 얻기를 빌어준 뒤에 작별의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두 자부를 의탁한 나오미가 헤어지는 표시로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작별의 입맞춤으로 인해 함께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저들은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습니다. 그것이 그들 사이를 더욱 친밀하고 확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11절과 12, 13절에서 나오미가 두 자부를 "내 딸들아"하고 부른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딸과 같은 두 자부들에게 더 밝은 내일이 열리도록 하나님께 두 여인을 의탁했습니다.

 

10절에는 나오미의 작별 인사를 받은 두 며느리의 반응이 나옵니다.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저들은 눈물이 가득한 채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들은 "돌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고향 모압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 이스라엘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오미의 사랑에 보답하려고 하는 것이든, 또는 두 사람이 죽은 남편에게 끝까지 충성을 하려고 하는 것이든, 또는 이별이 가져올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든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간에 두 자부는 자기들의 희망 있는 미래를 희생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1:11,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어머니가 친딸에게 말하듯이 말합니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말합니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들의 고향에 돌아가서 너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내게도 더 낫다." 어머니가 딸들의 행복을 빌듯이 자부의 행복한 내일을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왜 자부들이 돌아가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질문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입니다. 같이 가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까지 나와 함께 산 정 때문에 따라오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앞날을 위해서는 돌아가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이미 나이가 많고 늙은 것을 알지 않느냐? 결혼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설혹 결혼한다 할지라도 내가 아이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희가 알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이는 유대인의 결혼 풍습인 계대결혼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25:5-10).

 

나오미가 새로 결혼을 하고, 그래서 아이를 낳게 되면 두 자부는 새로 태어나는 아이와 결혼을 해서 죽은 남편의 대를 이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유대 사회의 율법이 규정한 결혼법입니다. 그러나 이미 나오미는 나이가 많기 때문에 결혼하기도 어렵고 설혹 결혼한다 하더라도 아이를 낳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이러한 사실을 12절에서 다시 한 번 강조를 합니다.

1:12, "내 딸들아 되돌아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오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서 두 자부로 하여금 낙심하게 하고, 이로 인하여 돌아가도록 만들려는 것이 나오미의 생각입니다. 자기는 남편을 둘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상황을 가정해서 이렇게 계속 말합니다.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을 낳는다 하자."

그렇다고 칩시다. 결혼도 하고 또 아이를 낳게 된다고 칩시다. 13절에 계속됩니다. "너희가 어찌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나중에, 즉 지금 태어나는 아이가 자랐을 때는 이미 두 자부가 늙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 어린 아들이 늙은 형수와 결혼하려고 하겠습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찌 그런 불확실한 일을 바라보고 지금 찾을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어찌 불확실한 일을 인하여 현재의 좋은 기회, 새로 결혼하여 남편을 둘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포기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기까지 나오미는 자기가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을 합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3절 하반부에 보니까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라 했습니다. 나오미는 여호와의 손이 자기를 쳤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자기 집에 우환이 생기는 것은 전적으로 며느리가 잘못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고집합니다. 나오미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릅니까? "얘들아, 다 내 탓이다. 그러니 너희가 나를 떠나는 것이 오히려 너희들의 행복을 위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오미는 끝까지 자부들을 생각해줍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어머니의 마음입니까? 시어머니 되시는 분들은 다 그런 마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여호와의 손이 나오미를 치신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지요. 나오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계속 살펴보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너희도 마음이 아프겠지만 앞길이 창창한 너희들이 나 때문에, 다 내 탓으로 잘못되는 것 같아 너희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이 더욱 아프다는 것입니다.

 

오르바와 룻의 선택 (그림)

 

14절에 세 사람은 다시 울었습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앞에서 세 사람은 한 번 울었었습니다.

1: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9절에서 울고 14절에서 다시 울었습니다. 그리고 두 자부 가운데 둘째 며느리인 오르바가 그 시모에게 입 맞추고 돌아갔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작별 인사를 할 때 종종 입맞춤이 따라옵니다. 이별의 뜻으로 입맞춤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르바를 나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시어머니의 지혜로운 권면에 그대로 순종해서 시모에게 작별의 입맞춤을 하고 모압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오르바의 뒤를 좇아가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도 8, 9절에 나오미가 빌어준 축복의 말씀대로 되었을 것입니다.

1: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1: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오르바는 나오미의 축복대로 좋은 남편 만나서 평안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룻이 남았습니다. 룻은 과연 시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해서 모압에 남느냐, 그렇지 않으면 나오미를 끝까지 따라가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돌아가는 오르바를 보면서 더욱 갈등했을 것입니다. 모압에 남는 것은 앞으로 재혼해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은 일생을 혼자 과부로 살아야 하는 괴로움을 감수해야 합니다. 아마도 오르바를 따라가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룻의 선택은 오르바와 달랐습니다.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우리가 오르바를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더욱 아름다운 것은 룻입니다. 독특하지요? 자기의 모든 행복, 평안을 다 포기하고 불쌍하고 가련한 나이든 시모의 뒤를 좇았습니다.

 

보통 사람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룻과 같이 시어머니와 함께 하려고 자기의 모든 인생을 희생하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이런 여인이 나옵니다.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후사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의 법에 따라 그 동생하고 결혼했습니다. 동생도 죽었습니다. 이번에도 후사가 없습니다. 남편의 그 다음 동생은 아직 나이가 어립니다. 그래서 시아버지가 가서 수절하고 동생이 클 때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어서 면박을 쓰고 자기 시아버지와 동침을 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다말입니다. 기를 쓰면서까지 자기의 권리를 찾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룻은 달랐습니다. 얼마든지 결혼을 할 수 있는데도, 얼마든지 아이를 낳을 수 있는데도, 얼마든지 자기 삶에서 만족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데도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불쌍한 시어머니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본문에 보면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선 오르바의 입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룻이 나오미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였다는 것 때문에 오르바를 좋지 않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어머니를 저버렸다고 잘못했다고 책하지 말고 오르바가 순종한 면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르바는 어머니 말씀을 잘 따랐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목사가 막걸리를 마셔도 이해를 해라." 우유를 마신 것이겠지 하든지, 또 진짜로 막걸리를 먹었더라도 무슨 이유가 있겠지 하고 이해를 하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 지적하고 비판하고 따지려고 하지 말고 먼저 이해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13:7,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저들을 이해하시고 저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오르바의 입장을 나쁘다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반면에 룻처럼 모험적인 신앙도 나중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받게 됩니다. 룻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우리 모습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