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 본문 - 누가복음 17:20-21 >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인해 장래가 불투명하여 청년들이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링컨 대통령은 백악관을 찾아온 청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기벌트 그린이라는 청년이 걱정을 하며 링컨 대통령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이러다가 미국이 끝장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자 링컨 대통령은 그 청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청년시절이었을 때 평소 존경하던 노인과 청명한 가을 밤 하늘을 보고 있었다네. 그때 마침 하늘에서 무수한 별똥별들이 떨어지는데 나는 몹시 두려워했지. 혹시 별똥별들이 떨어져 지구가 멸망하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일세. 그런데 그 노인은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네, ‘저 유성들을 바라보며 두려워하지 말고 더 높은 데서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들을 보고 꿈과 희망을 간직하게나.’ 그 이후로 나는 하늘의 별들을 바라볼 때마다 꿈과 희망을 간직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으로 별들을 바라보았다네. 아무쪼록 꿈과 희망을 잃지 말게나!”

 

   사람들은 자신이 보는 것으로 사고하고, 자신이 사고하고 생각한 대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물이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치관이라고 부릅니다. 그 가치관은 내가 무엇을 보려고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모든 사물을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의 현실 너머에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 신앙인입니다. 그런 신앙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아무리 나라가 망할 것같은 두려움과 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고 희망을 간직하며 고난을 극복하며 살아갑니다. 구약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편 121:1-2) 그렇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적들이 거대한 산과 같을 지라도, 그래서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에서 낙심된다 하더라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오히려 찬송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거대한 산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힘들게 하는 적들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 모든 적들을 물리치시는 능력의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주시기에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승리를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신앙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위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별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그 별들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삽니다.

   요즘 나라가 아주 어렵다고 말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사업이 잘 안 된다고 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취업의 문이 너무 좁아서 힘들다고 말합니다. 더군다나 일본이 경제제재를 가하면서 우리나라의 장래가 불안하다고 걱정하는 목소리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제2IMF사태가 오는 것 아닌가 하고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1997년 우리나라가 겪었던 IMF의 시대적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도 다르지 때문에 제2IMF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고 와서도 안 되지만, 다시금 그런 경제적인 어려운 시대를 우리가 맞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불안에 떨며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품에 품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시기에 주변의 환경이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손을 꼭 붙잡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 그들이 그렇게 질문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또 천국 복음을 전파하실 때 늘 하시던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의 설교와 사역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선포한 말씀이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15)는 말씀이었습니다. 누가복음 9:27절에서는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누가복음 10장에서는 70명의 전도자를 파송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누가복음 10:11)고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신 후에 놀라워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누가복음 11:2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심지어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고, 너희 중에 그 하나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눈에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한단 말씀입니까?’ 이 말은 문맥과 어감 상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지도 않는데 도대체 언제쯤 당신이 말한 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건가요?’라고 따져 묻는 질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당신이 말한 그 하나님의 나라가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는 건가요?’라고 기대하며 묻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는 이스라엘 나라의 주권 회복이었습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때라 메시야가 나타나면 이스라엘의 주권이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그들은 그 나라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강한 기대감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이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때로는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열심당원입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가 유대를 통치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로마 군대나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무력으로 저항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의 품속에는 항상 단검을 지니고 다니면서 우상숭배자들이나 신성모독자들, 그리고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들을 살해하려 했습니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그런 열심당원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어떻게든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임하는 곳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는 것입니까?’라고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에서 볼 수 있게’(παρατηρησεως) 라는 말의 뜻은 관찰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관찰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눈을 통해서 관찰하면 보이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혁명을 통해서 만들어지거나, 로마의 권력을 전복하여 만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들처럼 눈에 보이는 어떤 가시적인 나라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신앙생활하는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눈에 보이는 어떤 가시적인 나라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주권과 영토와 국민이 있는 그런 나라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은 병고침을 받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는 말씀을 자신의 병고침이나 아픈 사람들의 병고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요즘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대에 물질적인 풍요를 하나님의 나라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장사가 안 되는데 예수 잘 믿었더니 사업이 잘 되고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간증거리로 생각합니다. 마치 장사에 어려움을 겪고 물질적인 부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잘못했거나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인 것처럼 치부하면서 말입니다. 가정에 문제가 없고 자녀들이 형통하게 잘 되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처럼 취업이 잘 안 되는 시대에 자식들이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고, 마치 거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합니다. 교회 다니는 목적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어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자주 세상적인 어떤 현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대체해버립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하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내 삶에 어려움이 없이 평안하고 형통하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처럼 생각해버립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이거나 그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너무 이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니까 그것이 신앙생활 잘 하는 표지처럼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하여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그 하나님 나라 안에 머물러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실 때 안에’(εντος)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내면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우리 안에 임하는지 아십니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보이는 가시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치라는 말을 두렵거나 억압적인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세상의 통치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통치자 그러면 권력을 가졌고, 그 권력으로 때로는 사람을 압제하기도 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고 기쁨을 줍니다. 그 하나님의 통치라는 말을 우리가 가장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지거나 불안하지 않습니다. 시편 131편에서 시인이 고백한 것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편 131:2) 여기에서 평온하게 하다는 말은 어느 누가 와서 내 마음을 흔들며 격동시킨다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고요하게 하다.’는 말은 어떤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모든 것을 맡기고 내 힘씀이나 노력을 그만둔다는 뜻입니다. 상황이 잘 풀리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그저 그 품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게 시인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그게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나의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내 모든 삶과 여건까지도 통치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요, 그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으면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것 때문에 마음이 요동하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 하나도 없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안절부절못해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주시고 인도해 주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우리는 걱정 근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걱정과 근심, 불안과 두려움이 모두 사라집니다.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다 예뻐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만족할 줄 알고, 삶이 풍요롭지 않다 하더라도 행복을 누리며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붙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감싸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고백처럼 젖 뗀 아이가 어머니의 품안에 있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품 안에 있기에 전쟁이 일어나도 고요하게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세상이 개벽을 하더라도 나는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면 우리는 늘 기쁨의 찬송을 부릅니다. 마음에 평안이 가득하여 행복을 노래하며 감사하며 삽니다. 그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가운데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 가운데, 그리고 우리가 관계 맺고 살아가는 그 관계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먼저는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예수님의 나의 왕이시고 나는 그의 백성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신랑이시고 나는 그분이 기뻐하시는 신부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머리가 되시고 나는 그분의 지시를 받는 몸입니다. 예수님과 나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심으로 나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나, 그리고 예수님과 내가 바른 관계 맺음을 하고 살 때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믿음의 성도들 사이로 확장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 바른 관계를 맺고 살면 거기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우리 신앙인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에서도 바른 관계맺음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보여주어야 할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해 줍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우리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보여주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교회에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고 함께 봉사하면서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해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 속에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21절에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두 단어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라는 말씀에서 하리니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미래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으니라.’는 말씀에서 있으니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씀은 현재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미래형과 현재형을 동시에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임재해 있지만, 그것은 미래의 완성을 위해서 이루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먼 장래에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경험하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새하늘과 새땅이라는 표현을 써서 우리가 들어가게 될 천국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천국은 먼 미래에만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천국이 지금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미리 경험되고 맛보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고 싶으십니까? 그 천국은 먼 미래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마음에도 임하여 있고, 우리가 사랑하며 사는 관계 속에도 그 하나님의 나라는 경험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마음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기쁨과 행복의 나라여야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지금 가정에서는 부부와 가족들 사이에서, 그리고 교회에서는 성도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행복하게 경험되어야 나중에 죽음 이후에 들어갈 천국을 고대하며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해 있고, 지금 우리가 관계 맺고 살아가는 삶 속에 그 하나님의 나라가 경험되고 있습니다. 믿음은 그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그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며 살게 합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그것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치하시도록 나를 하나님께 위탁하면 그 하나님의 나라가 나를 행복의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