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이레 (행 16:5~15) 홍문수 목사

얼마 전 TV를 켰는데 마침 소프라노 조수미 씨가 출연한 토크쇼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인생 이야기를 풀어내서 흥미롭게 시청했습니다. 그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음악과 공부를 억세게 시켜서 따라 하다보니까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수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자 친구를 만나서 너무 열심히 연애를 하다가 성적표를 F로 가득 채워 성악과 52명 중 52등을 했고 결국 제적을 당하게 됩니다. 당황한 어머니가 등을 떠다밀었고 자의반타의반으로 이태리로 떠납니다. 본래 3개월을 작정하고 갔는데 기한이 끝날 무렵 남자친구가 편지로 이별을 통보해오자 노래만이 살 길이구나 싶어서 눌러 앉게 됩니다. 그 후 음악학교에 들어갔고, 연이어 콩쿠르에 입상하는 등 길이 열려서 세계적인 소프라노의 스타덤에 오르게 됐다고 합니다.

 

저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삼스럽게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미래를 모르고 사는구나! 그렇습니다. 내 인생이라고 큰 소리를 치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 정말 모릅니다. 내 몸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내 인생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전혀 모릅니다. 이렇게 무지하고 무력한 존재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기 인생을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을 것처럼 자기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잘 되기만 하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 않습니다. 낭패를 당하기 일쑤입니다. 나중에 가서 내 이럴 줄 몰랐다며 탄식합니다. 그래서 성경도 증거합니다. 잠16:25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이렇게 여러 번 낭패를 당하다 보면 미래가 두려워집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 살펴보거나 혹은 그들에게 물어보기도 합니다. 이게 훨씬 더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12:15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게 약간의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잘 보면 별게 아닙니다. 그 사람이라고 나보다 낫느냐 이겁니다. 그 역시 나와 비슷하게 미래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한계가 있기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남의 말을 들으면서 오히려 혼돈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말세에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다가 오히려 잘못되는 경우가 많은 것임을 경고합니다. 딤후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자신의 마음속에 세속적인 욕망이 가득하다 보니까 마음에 맞는 말만 골라 듣게 되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겁니다.

 

심한 경우 어떤 사람은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이것처럼 멍청한 짓이 없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점쟁이가 미래를 정확하게 안다면 돛 자리 깔고 점쟁이나 하고 있겠어요?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수준이 아니라 정확히 알면 대번에 성공할 텐데 말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돈을 벌든지 벼락같이 출세하든지 할 겁니다. 세상에서 점쟁이가 최고라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걸 하고 있을까요?

 

그러니까 결국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비교할 수 없이 높고 높습니다. 사55:8~9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여러분, 누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구하며 사는 사람,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몰라도 하나님은 나를 잘 아십니다. 나는 내 인생의 미래를 몰라도 하나님은 잘 아십니다. 뿐만 아니라 내 인생의 미래를 책임져 주시고도 남을 만큼 능력이 많으십니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신앙인이고, 그런 사람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사니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또 얼마나 마음이 든든합니까!

 

신명기를 보면 모세가 출애굽 후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 목전까지 인도한 후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신신당부합니다. 그 중에 미래를 두려워하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증거합니다. 신31:8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여기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요? 우리 앞서 가시는 분인 동시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게 가능한가요? 사람이라면 절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편재하시는 영이시기에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1] 아브라함이 경험한 여호와 이레 : 모리아 산에서, 그리고 평생토록

 

이처럼 앞서 가셔서 내 인생을 미리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을 가리켜 ‘여호와 이레’라고 부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나옵니다. 기본 이름은 여호와 혹은 하나님인데, 그 이름에 이런 저런 수식어가 붙은 게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죠. 여호와 샬롬, 여호와 라파, 여호와 닛시 등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은 무한광대하신 분입니다. 속성도 하시는 사역도 무한광대하십니다. 그래서 그 특징을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여호와 샬롬은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는 치유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 즉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창22:14에 나오는 이름으로 ‘앞서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죠. 그는 당황했지만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에게 무슨 뜻이 있으시겠지 하고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이삭을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보통 번제를 드릴 때는 양을 갖고 가야 되죠. 그런데 양도 없이 이삭과 함께 불과 나무만 갖고 갑니다. 이삭이 너무 이상해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죠? 그러자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창22: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 ” 하나님이 직접 준비하신다는 말이 바로 여호와 이레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분명한 것 한 가지를 확신했습니다. 이삭을 통해 후손이 번성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지켜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잘 모르지만 이삭이 죽어도 살 것이고, 아니면 이삭 대신 어린 양을 준비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드디어 모리아 산에 올라간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말합니다. 아마 이삭도 처음 들었을 때는 무척 당황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통해 들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무슨 뜻이 있겠지 하고 순종합니다. 그러니까 110세가 넘은 노인이 10대 후반인 이삭을 결박시킬 수 있었겠죠. 이삭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노인을 밀치고 도망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믿음 대단하지만 이삭의 믿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목을 향해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 하나님이 급히 제지합니다. 수풀에 보니까 숫양이 뿔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는 얼른 이삭을 풀어주고 숫양을 가져다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가리켜 ‘여호와 이레’라고 명명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형통케 하십니다. 창24:1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특히 이삭이 나이가 마흔이 다 되도록 믿음의 여인이 없어서 결혼을 못하니까 아브라함이 늙은 종을 멀리 고향 땅 메소보다미아로 보내 색시 감을 구해오게 합니다. 그때 그가 늙은 종에게 당부했던 말이 이겁니다. 창24:7 “ …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하나님이 천사를 앞서 보내실 것임을 확언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먼저 가서 준비해 놓으실 테니까 편하게 다녀오라는 당부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리브가를 우물가에서 만나게 하셨고 결국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이 성취됩니다. 아브라함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여호와 이레를 계속 경험합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나보다 앞서 가시며 내 인생을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책임져 주십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말입니다. 죽을 때까지 평생토록 그렇게 해주십니다. 시편기자가 노래한 그대로입니다. 시48:14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죽음 이후까지도 책임져 주십니다. 잠14:32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의인은 성도를 가리킵니다. 죽어도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반드시 죽기 마련입니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는데(히9:27) 자신이 어떻게 될지 아무 생각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믿는 성도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천국에 들어갑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든 믿음의 선진들도 믿음으로 살다가 천국에 들어갔습니다(히11:13~16).

 

성경 인물들을 연구해 보면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은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일생을 책임져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부잣집 아들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하루아침에 노예로 팔려 애굽으로 갑니다. 기가 막힙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도 믿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았을 때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인생의 파노라마가 펼쳐집니다. 묘하게도 바로 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고, 주인의 인정을 받고 가정 총무가 됩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는 것을 거부한, 죄 아닌 죄로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갑니다. 믿음을 지키고 성결을 지킨 결과치고는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그의 미래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감옥에서 전직 고위 관리 술 맡은 관원장 출신 죄수를 만납니다. 그에게 친절을 베풀고 꿈을 해석해 줍니다. 꿈을 해석해 준 대로 그가 복직했는데 요셉을 새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2년 후 바로 왕이 꿈을 꾸고 그 의미를 몰라 괴로워하던 와중에 요셉을 기억합니다. 요셉은 급히 불려나왔고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 주고 흉년에 대한 대비책까지 제시하는 탁월한 지혜를 인정받아 대제국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리고 만민을 흉년에서 구원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불러 큰 민족을 이루고 후일 신정국가 이스라엘을 세우는 데 기틀을 마련합니다.

 

또 룻을 보십시오. 그는 모압 여인입니다. 그런데 모압에 이민 간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합니다. 시댁 식구 중 남자 셋이 모두 죽고 시어머니 나오미, 그리고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만 남게 됩니다. 나오미는 더 이상 모압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갑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이 자신을 따라 낯선 이스라엘로 가는 게 가여워서 돌아가라고 합니다. 몇 번 거절하다 오르바는 모압으로 돌아갑니다. 반면 룻은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로 향합니다. 인간적인 도리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도 인간인데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문화도 언어도 다르고, 아무런 대책도 없는데다 시어머니까지 부양해야 되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결단한 룻의 앞길에 여호와 이레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마침 보리 추수기라 밭에 가서 이삭을 주워 생계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 보리밭의 주인 보아스와의 만남이 이뤄지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결혼합니다. 나중에 족보를 따져보니까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됩니다. 룻은 단순히 믿음으로 살았지만 하나님이 그의 인생 가운데 앞서 행하시며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준비해 주셨던 것입니다.

 

[2] 바울이 경험한 여호와 이레 : 빌립보 선교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케이스도 역시 ‘여호와 이레’의 역사입니다. 그는 본래 바리새인이요 율법학자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순교 사건을 계기로 마음의 동요가 생겼고, 그 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핍박자 사울(바울의 본래 이름)에게 나타나다니! 쇼킹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회심한 그는 즉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은 그를 사도로 세웠고, 그는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고 세계로 나아갑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1차, 2차, 3차 선교여행, 그리고 죄수의 몸으로 간 로마 여행 등을 종합해 보면 그의 인생이 세계역사를 바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분수령이 된 사건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빌립보 선교의 이야기입니다.

때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A.D. 49년~52년) 중이었습니다. 1차 때 안디옥에서 출발해서 소아시아 일부 지역에 복음을 전했던 바울은 다시 안디옥을 출발해서 2차 선교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는 단순히 생각했습니다. 1차 때 방문한 지역에 가서 성도들을 굳게 세우고 주변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해서 새로운 회심자를 얻으면 되겠거니 생각한 겁니다. 그 당시 교통도 불편하고 소수의 인원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그 외의 지역까지 가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겁니다.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가는 데마다 바울을 통해 교회가 성장하고 아름답게 세워져갔기에 만족스러웠을 겁니다. 행16: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어느 순간부터 가는 데마다 막히는 겁니다. 행16:6~7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복음을 전하는 데 성령(예수의 영)이 방해한다?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앞에 ‘아시아에서’라는 말이 붙지 않았으면 정말 이상한 겁니다. 이 말이 포인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유럽으로 진출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면서 주신 말씀이 바로 그게 아닙니까? 행1:8에 기록된 대로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 끝 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게 주님의 소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시아에 마냥 머물려고 하니까 성령이 자꾸 막으셨던 것입니다. 아마 바울은 무척 고민했을 겁니다. 왜 이러지? 복음을 전하는 게 나쁜 짓도 아닌데, 왜 이렇게 꼬이지? 그래서 밤이 늦도록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구합니다. 바로 그때 환상을 통해 주님의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행16:9~10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환상 가운데 바다 건너 유럽 지역인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그리로 건너 와서 복음을 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바울은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아하, 이래서 그렇게 가는 데마다 막혔구나! 그는 주님의 뜻을 확실히 깨달았고 즉시 순종합니다. 그때 바다 건너 간 곳이 바로 빌립보입니다(행16:12).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the leading city)으로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 다른 도시들로 복음이 쉽게 확산될 수 있는 위치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도착하니까 하나님이 이미 놀라운 일들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서프라이즈’였습니다.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다가 여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에 특히 루디아를 만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행16:14~15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여성 사업가였던 루디아의 가정 복음화가 이뤄집니다. 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교회당을 크게 지어놓고 모이는 게 아니죠. 유력한 집에 예배처소를 만들고 모이는 게 교회였습니다. 루디아의 집에 빌립보교회가 시작된 겁니다. 유럽 지역 최초의 교회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두고두고 바울의 동역자로 함께했습니다(고전9:3~14. 빌1:3~5,4:18).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혔는데 고문을 받고 힘든데도 밤중에 일어나 기도하고 찬송하는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흔들리더니 차꼬가 풀리고 옥문이 열립니다. 나가면 되는데 그 때 간수가 자결하려고 합니다. 당시에는 중죄수가 탈옥하면 간수가 대신 형을 살거나 심한 경우 가족까지 죽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자결하려 든 겁니다. 바울이 급히 제지하죠. 놀란 간수는 바울 앞에 엎드렸고, 자기 집에 데려다 온 가족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습니다. 간수의 가족들도 빌립보교회 멤버가 됐는지 다른 교회 처소를 형성했는지 모르지만 빌립보 선교에 큰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여러분, 얼마나 신기하고 놀랍니까! 바울이 이런 일들이 벌어지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이렇게 놀랍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며 깜짝 놀랄 일들을 미리 준비해 두십니다. 부디 하나님의 서프라이즈를 기대하며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3] 우리가 경험할 여호와 이레 : 신뢰하라(Trust), 순종하라(Obey), 기도하라(Pray)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여호와 이레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세 가지를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기도하라!

 

① 신뢰하라(Trust) :

 

첫째,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신뢰는 간단히 말해서 의심이 없는 믿음입니다. 100% 믿는 겁니다. 70%만 믿으면 의심이 30%입니다. 될까 안 될까 헷갈리는 상태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잠3:5~6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NIV)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이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여호와 이레입니다.

 

베드로는 또 이렇게 권면합니다.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신뢰하면 맡길 수 있습니다. 맡기는 게 신뢰입니다.

 

목욕탕에 가면 옷장에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습니다. “귀중품은 카운터에 맡기시기 바라니다. 맡기지 않은 것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 주인 백” 주인에게 맡기면 마음이 놓입니다. 그 글귀를 보면서 우리가 목욕탕 주인만큼도 하나님을 믿지 못할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 역사하십니다. 나보다 앞서 행하시는 여호와 이레이십니다. 그 사실을 꼭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서부터 여호와 이레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② 순종하라(Obey) :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십시오. 주님과 믿는 성도의 관계는 목자의 양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정말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님으로 목자로 믿고 있다면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르게 됩니다.

 

어떻게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나요? 말씀을 묵상하며 성령님이 내 마음 속에 영적인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깨닫고 확신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줍니다. 그 뜻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수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그룹으로 여행을 가면 가이드가 안내해 줍니다. 사람들이 가이드 뒤를 졸졸 따라 다닙니다 그리고 가이드의 말을 얼마나 잘 듣는지! 가이드 말을 듣는 것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면 우리 인생이 놀랍게 펼쳐지리라 생각합니다. 부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놀라운 일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③ 기도하라(Pray) :

 

셋째,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보다 강력한 무기가 없죠. 염려할 시간에 기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유력한 사람에게 청탁하고도 안심하잖아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안심이 되는 게 당연하죠. 기도해놓고도 여전히 걱정하면 잘못 기도한 겁니다. 빌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함으로 미래에 대한 염려도 기도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이상으로 여호와 이레의 역사를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재미교포 고 강영우 박사 이야기입니다. 그는 중3 때 축구를 하다 실명했습니다. 그 후 홀어머니가 충격으로 돌아가시고, 누나가 세 동생들을 위해 공장에 다니다 과로로 죽게 됩니다. 졸지에 고아가 된 그는 시각장애인으로 어린 두 동생을 돌볼 수 없어서 결국 뿔뿔이 흩어집니다. 그런 그에게 무슨 미래가 있었겠습니까? 암담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이 그의 앞에 놀라운 일들을 하나하나 펼쳐주셨습니다. 맹학교에 자원봉사자로 왔던 여대생과 결혼합니다. 연세대 교육학과에 입학합니다. 그 당시 장애인의 입학이 어려워 천신만고 끝에 이뤄졌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국제로터리 장학금을 받아 미국 유학을 갑니다. 시각장애인으로서는 한국인 최초로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됩니다. 부시 행정부 시절에는 국가장애인권위원회 차관보를 지냈습니다. 무엇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많은 일들을 감당했습니다. 말년에 췌장암 진단을 받자 그는 담담하게 인생을 정리했습니다. 장학기금으로 25만불을 기부하고, 임종하기 얼마 전 아내에게, 두 아들에게, 그리고 지인들에게 3통의 편지를 남겼습니다. 그 중에 두 아들에게 남긴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눈 먼 고아로 어린 동생 둘과 세상에 남겨졌던 그 시절에 누군가 나에게 와서 지금과 같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면 나는 거짓말도 정도껏 하라고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만 믿고 살다보니까 그 모든 게 이루어졌다. 그러니 하나님만 의지하고 잘 살아라.” 여호와 이레의 역사를 간증한 겁니다.

 

여러분, 누구도 인생의 미래를 알고 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계시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부디 여호와 이레의 역사를 기대하며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멋진 미래를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