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7:11-17
예수님의 치유2 ; 그 관에 손을 대시니
가족의 죽음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질병으로 인한 예견된 죽음이든 사고로 인한 갑작스런 죽음이든 그 어떤 경우든 죽음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정도를 비교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고통스런 것은 아마 자녀의 죽음을 보는 어미의 마음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도 남편이 없는 과부에다가 그 아들이 죽고 나면 의지할 곳이 단 한 곳도 없는 여성이라면 더 참담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여인이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나인은 산기슭에 위치한 조그만 성읍으로 이름의 뜻이 ‘목장’입니다. 상식적으로 목장은 번화한 도시 근처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인성은 성경의 주요 무대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예수님은 뜬금없이 나인성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십니다. 오늘 본문 11절의 표현을 보면 나인성으로 가셨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어디 다른 곳을 가려다가 잠시 들리거나 그래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애초에 목적지가 나인성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나인성에서는 아들 잃은 과부를 만난 것 외에는 다른 일이 없었으니 추측해보자면 예수님이 나인성에 가신 가장 중요한 이유와 목적이 그 여인과의 만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을 만난 목적은 단순합니다. 위로하는 것,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들 잃은 과부를 보시며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고 그 일대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주변 마을을 소란스럽게 하는 일을 무릅쓰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감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한 사람을 향한 관심과 사랑. 주님이 보여주신 진정한 치유를 오늘 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의 치유를 알게 되고 삶 속에서 진정한 회복을 이루게 되길 바랍니다.
본론2
① 우리 주님은 함께 울어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나인성 입구에 다다랐습니다. 늘 그랬듯이 제자와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막 들어가려고 하는데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죽은 사람은 외동아들 청년이었고 뒤따르는 여인은 죽은 아들의 어머니인데 과부였습니다.
예수님은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 상황을 보자마자 그 과부가 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이 무엇인지 즉각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희망인 아들의 주검 앞에서 극도의 슬픔에 빠진 과부를 보면서 예수님은 주체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을 느끼셨습니다.
13절을 보시면 단순히 “주께서 불쌍히 여기사”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헬라어 원문에서는 이 표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에스플랑크니스데 ἐσπλαγχνίσθη는 ‘창자가 뒤틀리다’는 뜻입니다. 너무 슬퍼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내장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의 표현에 ‘애가 끓는다,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이 있는데 예수님의 마음을 적절하게 표현해주는 말입니다.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감정의 격랑에 빠지신 예수님. 아마도 예수님은 어깨가 흔들렸을 것이고, 몸을 살짝 떨었을 것입니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가슴아파하시고 함께 울어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진정한 사역이셨고 능력이었습니다.
위로는 눈물에서 시작됩니다. 말없이 함께 울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보다 큰 위로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잘 알듯이 씨가 길가, 바위, 가시덤불, 좋은 땅 이렇게 네 가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 중에 바위에 떨어진 씨를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8:6입니다.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싹이 났지만 제대로 자라지 못한 이유는 습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위는 습기를 머금을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진정한 능력은 습기입니다. 습기를 머금을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서 습기는 눈물입니다. 눈물이 깃들어 있는 사람은 자랄 수 있고 능력을 나타냅니다. 진정한 습기, 진정한 눈물이신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전병욱목사 칼럼 인용)
나인성 과부 같은 우리의 인생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이 말라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의 메마른 눈물샘을 다시 자극하고 다시 은혜의 눈물이 흐르게 하시는 분이 찾아오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님이 있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위로이고 능력인 줄 믿습니다. 진정으로 가슴아파하시는 주님을 영접하시는 분들 되길 바랍니다.
② 우리 주님이 우리의 눈물을 그치게 하십니다.
진정한 위로의 마음으로 함께 눈물을 흘려주신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그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영적 원리입니다. 충분히 눈물 흘려주신 주님이 이제 더 이상 눈물이 없는 삶, 진정한 기쁨이 있는 삶으로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13-14절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예수님은 과부를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느끼셨고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울지 말라’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의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시신에 손을 대는 것은 대단히 부정한 일이었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접촉한 자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19장에 의하면 시체와 접촉한 자는 7일 동안 부정하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민19:11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에 영향 받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에게 파멸을 선포하시는 분입니다. 죽음의 권세도 그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분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장례문화는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관에다가 시체를 넣어서 운구하거나 안치합니다. 그리고 그것도 3일이나 5일 동안 장례식을 치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죽은 그날 장례를 바로 치릅니다. 기후가 워낙 고온이라 시체가 바로 부패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체가 성읍에서 하루를 넘기지 않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관에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관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천으로 시신을 감싸서 들 것으로 운구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사람들이 관에 넣지 않았습니다. 세마포에 싸서 무덤에 그대로 뉘어 놓았습니다. 만일 그게 관이었다면 청년이 살아났을 때 관 두껑에 머리를 부딪쳤을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이 관에 손을 댄 것은 사실 시신에 손을 댄 것입니다. 이 모습은 장례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특별히 그 어미에게는 상당히 도전적이면서 동시에 위로가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손 만 댄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어나라 말씀하셨을 때 천으로 감쌌던 시체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시신을 운구하던 사람들이 관이 들썩이는 진동을 느끼면서 소름이 돋았을 것입니다. 청년은 일어났고 앉아서 말도 합니다. 실제로 살아난 것입니다.
살아나면 이제 더 이상 눈물을 흘릴 일이 없습니다. 이제 그 어머니는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진정한 치유, 회복이 그 가정에 임하였고 그 기적 앞에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함께 기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딸아 울지 말라. 이제 함께 기뻐하자. 이제 즐겁게 누리자! 그 능력의 말씀에 온전한 회복을 누리게 되길 축복합니다.
③ 우리 주님은 이 시대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전에 생각해보지 못한 것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위로하고 그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기 위해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자가 청년이었다는 것입니다.
청년이 죽으면 절망입니다. 반대로 청년이 살면 희망입니다. 이 세상은 과부와도 같습니다. 의지할 곳이 없고, 자기 능력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죽은 아들의 장례나 치를 뿐입니다. 그런 과부 같은 이 시대는 청년이 살아나야 비로소 온전한 치유와 회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시대에 청년들을 다시 살리시길 원하십니다. 그것도 일어나서 입을 열어 재잘재잘 말할 수 있는 청년말입니다. 청년은 일어서야 청년입니다. 누워있으면 안됩니다. 일어나야합니다. 여러분들을 드러눕게 만드는 절망, 나태함, 무기력함을 방치해두지 마십시오.
잠언 24:33-34입니다. “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강도와 군사가 얼마나 강력합니까? 처음에는 내가 자고 싶었으나 나중에는 일어나고 싶어도 강도와 군사들이 일어나지를 못하게 합니다.
또한 입으로 떠들어야합니다. 어른들은 말합니다. ‘요즘 청년들은 입만 살아가지고 말뿐이야.’ 아닙니다. 여러분! 말을 하셔야 합니다. 입으로 떠들어대야 합니다. 허무맹랑한 말을 쏟아내야 합니다. ‘말뿐이냐’가 아니라 말이라도 해야합니다.
왜 말을 해야합니까? 말은 사람의 의식과 사고를 반영합니다. 말을 하려면 생각을 해야합니다. 청년 시절에 말을 많이 해야 사고가 정리되고 확립됩니다. 좋은 말, 허무맹랑하지만 희망을 전하는 말을 많이 하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의 비전, 꿈을 말하십시오. 사도행전 2:17-18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7절을 보시면 청년을 살리신 예수님이 그를 어머니에게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미 살아난 사람을 누구에게 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살아난 청년은 과부에게 희망이고 위로입니다. 이 땅의 크리스천 청년들이 살아나면 과부 같은 이 세상에 주어져서 즉, 이 세상으로 파송받아서 그들의 가슴을 뛰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는 줄 믿습니다. 16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결론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이 창자가 끊어질 정도의 간절함을 가지고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더 이상 울지 않고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요? 주님은 이미 우리를 만나기 위해 성읍의 입구까지 오셨습니다. 우리를 만지시고 안아주십니다. 그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엽시다.
이제 우리 찬양으로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누워있던 그곳에서 일어서게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