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의 교훈

(렘 1:11-16)

 

   역사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치세’(治世)이고, 다른 하나는 ‘난세’(亂世)입니다. 치세란 전쟁이 없는 태평한 시대를 말합니다. 이에 비해 난세란 내부적인 혼란과 외부의 적의 침공으로 난리(亂離)를 겪는 시대말합니다.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사역하던 시기는 난세 중에도 난세입니다. 아마도 성경역사 가운데 가장 혹독한 난세가 바로 이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사역을 시작한 때는 유다의 요시야 왕 때입니다. 당시는 평화로운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이 애굽과의 전쟁에서 죽자 평화가 깨지고 난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요시야 왕의 뒤를 이어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지만, 애굽은 여호와하스를 폐위시키고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번에는 바벨론이 침공해 와서 친애굽파였던 여호야김을 폐위시키고 여호야긴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긴이 계속 친애굽정책을 펼치자 다시 폐위시키고 시드기야를 왕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러다 결국 시드기야 왕 때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유다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왕이 전사하고, 또 외세에 의해 왕이 세 번이나 폐위되다가, 결국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 나라가 멸망당하는 참담한 역사를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난세 중의 난세에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정말 힘겨운 사역을 했습니다. 그 세월이 무려 40여년입니다.

   저는 우선 이렇게 난세가 아닌 시절에 살고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절에 주의 사역을 하고 있음을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난세에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야 말로 하늘의 상이 크기 때문에 정말 복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난세에 주의 종으로 사역해 온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됐습니다. 난세가 아닌 시절에도 주의 사역을 감당하기가 힘이 드는데, 난세에 그 많은 고통과 역경을 극복하면서 주의 사역을 잘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을 공부하면서 예레미야가 난세 중의 난세에 주의 종으로 보여준 그 모습에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그가 보여준 모습을 통해 오늘 이 세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 교훈이 이런 것들입니다.

 

눈물

   일반적으로 예레미야 선지자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렘 9:1을 보면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의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예레미야는 선지자사역을 하면서 이렇게 늘 울었습니다.

   게다가 나라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했을 때는 아예 눈물의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레미야애가입니다. 이 노래는 시종 눈물로 가득합니다. 애 1:16을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흘러내림이여...” 눈물을 하도 많이 흘려서 눈에서 눈물이 물같이 흘러 내렸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레미야는 왜 이렇게 울었을까요? 렘 4:19을 보면 예레미야 자신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예레미야는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는 중에 마음속에 어떤 소리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적들이 쳐들어오는 소리,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소리를 미리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레미야는 남들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들을 귀’ 바로 그것이 열려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영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그 소리가 들려올 때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적 감수성이 예민하게 자극될 때는 자기도 모르게 눈에서 물처럼 눈물이 흘러내려옵니다.

 

  일전에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칠십리시공원’이란 곳을 가보았습니다. 그 공원에 서귀포와 관련된 시들이 큰 돌에 새겨져 전시되어있었습니다. 그 중에 제 눈을 사로잡았던 시가 있었습니다. 이생진의 “그리운 성산포”라는 시입니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시인은 바다로부터 설교를 듣고, 바다의 기도 소리를 듣습니다.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습니다. 바로 시인에게 예민한 영적 감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영적 감수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연을 보며, 시대의 흐름을 보며, 그리고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애 2:1을 보면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성이 바벨론에 함락당한 뒤 참혹한 장면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백성들이 겪는 고통과 참상을 보면서 예레미야는 또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 울음은 너무도 특별했습니다. 하도 울어서 눈이 눈물 때문에 상했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겪으며 울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보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그 마음으로 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롬 12:15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예레미야가 바로 이런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사람이었습니다.

 

  몇해 전에 [힐링캠프]라는 TV프로그램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주인공이 차인표씨였습니다. 이분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남모르게 힘들고 어려워 울고 있는 사람들을 돕는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 사역을 하게 됐는지 그 이유를 이야기했습니다.

  어린 시절 집 마당에 깜깜한 지하실로 뚫린 작은 구멍이 있었답니다. 호기심에 그 구멍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는데 다시 뺄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에 엄마를 부르며 울었는데 자기가 내는 그 울음소리는 지하로 퍼질 뿐 그 누구도 들을 수가 없더랍니다. 그 때 옆에 있던 형이 동네가 떠나가라고 큰 소리로 울었답니다.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몰려와서 자기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이분은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삶을 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처럼, 예수님처럼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야 합니다. 세월호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들, 저 헝가리 다뉴브 강가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들, 그들 곁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인내

   예레미야는 나이 2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40여년을 난세 중의 난세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 많은 고통을 끝까지 잘 견뎌냈습니다.

   우선 예레미야는 너무도 외로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실 남자가 밖에서 일하며 어려움을 겪더라도 집에 돌아오면, 따뜻하게 맞아줄 아내가 있고 가족이 있으면 힘들더라도 견뎌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결혼하지 못하게 하셔서 그 모진 사역의 고통을 혼자서 견뎌야 했습니다.

   더 힘들었던 것은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저주를 퍼붓고, 고향 아나돗 사람들은 죽이려고 까지 했습니다. 사실 주의 종들이 말씀을 전할 때, 교우들이 아멘으로 화답하거나 은혜 받았다고 말해 줄 때 힘을 얻어 사역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토록 오랜 세월 말씀사역을 수행하면서 격려는커녕 저주를 퍼붓고 내쫓기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렘 20:2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바스홀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두었더니” 말씀을 전하는 도중에 매를 맞기도 했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레미야는 이런 지독한 외로움과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너무도 힘이 들어서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렘 10:19을 보면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예레미야는 그 어떤 고난이 다가 온다고 해도 참고 또 참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실제로 예레미야는 40여년 그 긴 세월 동안 견딜 수 없는 고난을 견디고 또 견뎌냈습니다.

 

  한 번은 스코트랜드의 부르스 왕이 전쟁에서 패하고는 깊은 산골 작은 오두막에 피신해 있었습니다. 패배로 인한 좌절감이 밀려들었습니다. 다시 일어날 희망을 찾을 수 없어서 깊은 절망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어느 날 해가 질 무렵이었습니다. 작은 거미 한 마리가 처마 끝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는 것입니다. 유심히 보니 거미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마 밑이 너무도 미끄러워 거미줄 안쪽 끝이 좀처럼 달라붙지 않습니다. 한 번 쳤는데 떨어집니다. 다시 또 쳤는데 또 떨어집니다. 그러나 거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포기하지 않고 시도했습니다. 결국 수십 차례의 시도 끝에 거미줄을 치는데 성공했습니다.

  왕이 이 모습을 보고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다시 용기를 내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군사를 모으고 다시 전쟁에 나서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완주하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레미야가 보여주는 것처럼 더더욱 신앙생활을 성공적으로 완주하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약 1:3-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원어로 ‘휘포모네’(ὑπομονή)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어쩔 수 없어서 참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반응을 말합니다. 예레미야가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참고 견디며 적극적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부단히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미가 계속되는 실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견디며 목표를 이루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 환란 많고 풍파 많은 세상 속에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계속되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위로

   예레미야가 어떻게 그렇게 눈물을 흘려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 긴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위로 때문입니다.

   렘 15:10을 보면 예레미야가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내게 재앙이로되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 만은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한 마디로 어머니 왜 날 낳으셔서 이 고통을 겪게 하십니까 하는 탄식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렇게까지 탄식했겠습니까?

   그런데 렘 15:11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탄식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위로하신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예레미야를 강하게 하실 것이고 복을 받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힘들어 탄식할 때마다 그에게 말씀하셨고, 그를 위로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하나님의 위로를 힘입고 그 많은 고난을 이겨낼 수가 있었습니다.

 

   렘 20:9을 보면 주목할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선포하면 사람들이 조롱하고 모욕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말씀을 선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자기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이 뜨거워진다는 것입니다. 골수에 사무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 말씀을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실 때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저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어루만지셔서 그 슬픔을 진정시키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다독거리셔서 그 고통을 잊게 하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그 마음에 불을 붙이십니다. 그 마음을 뜨겁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 슬픔을 맞서고 그 고통과 맞서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슬픔과 고통을 이기게 하십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는 체험을 하곤 합니다. 가끔 설교준비하면서 벽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설교를 풀어가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낙심하게 됩니다. 이때 설교준비를 중단하고 기도의 자리로 달려갑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립니다. 하나님께 심정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한 동안 엎드려 있다가 다시 설교준비 자리로 돌아옵니다.

  다시 본문 말씀을 읽습니다. 다섯 번, 열 번, 반복해서 읽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설교해야 하겠다는 열망이 생깁니다. 전해야 할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설교 준비를 마칠 수 있게 됩니다.

  예배 때마다 예배드리는 교우들의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입례송을 부를 때부터 눈물을 흘리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참회의 기도를 드릴 때 가슴이 뭉클 하여 눈물짓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찬송 부르다가 또 어떤 분은 설교를 듣다가 마음이 뜨거워져 그 표정이 달라집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불을 붙여주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피어난 그 작은 불꽃 하나가 우리를 위로합니다. 삶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합니다.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합니다. 상처로 큰 슬픔으로 눈물짓고 잇는 사람들을 위로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레미야는 우리에게 계속되는 고난 속에서도 잘 참고 견디라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 속에 함께 하시고 위로하신다고 가르쳐줍니다. 이 교훈을 귀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힘입고, 고난 가운데서도 잘 견디시고 이겨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