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옷을 입고 (삿 6:33~40)

 

 

 

오늘은 성령강림주일(Whitsunday)입니다. 혹은 오순절(五旬節, Pentecost)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절기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순(五旬)은 50일이란 뜻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50일째에 해당됩니다.

 

성령은 어떤 힘이나 기운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성경을 연구해 보면 하나님이 삼위일체(三位一體)로 나타납니다. 영어로 trinity라고 하는데 본래 tri-unity입니다. tri는 ‘셋’ 이란 뜻이고 unity는 ‘통일’ 혹은 ‘통합’이란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부, 하나님의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 성령 이렇게 3위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쌍둥이라면 어떤가요? 아주 많이 닮았지만 그래도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 동등하시고 동일하십니다. 신비롭죠. 우리의 머리로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셋이면 셋이고, 하나면 하나지 셋인데 하나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머리가 좋아봐야 얼마나 좋은가요? 아이큐가 높다고 해도 인간들끼리 비교해서 머리가 좀 낫다는 것이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위대하고 무한하시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게 아닙니다. 설명하려고 들면 들수록 오히려 헷갈립니다. 그냥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는구나 하고 이해하면 됩니다.

 

성경을 연구해 보면 분명합니다. 창1:1~2을 보면 천지 창조의 기록이 나옵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성령)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엘로힘’인데 이 단어는 복수형입니다. 그러니까 천지창조 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훨씬 후이고 창조 당시에는 말씀으로(요1:1) 계시면서 성부, 그리고 성령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신 겁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한 가운데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운행했다고 하죠. 성령도 함께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을 때 30세가 되어 대중에게 나타나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바로 직전 요단강에 가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막1:9~11). 예수님이 요단강에 들어가 세례를 받으신 후 나오시는데 그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성부, 성자, 성령이 동시에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기에 영원 전부터 계셨습니다. 2천 년 전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다고 하니까 그때 성령이 갑자기 나타나신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성경강림은 각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신 새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보면 성령이 곳곳에 등장하십니다. 명칭도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영(삿6:34), 하나님의 영(창41:38, 출35:31), 주의 영(시139:7), 하나님의 신, 주의 신 등입니다. 바로 그 성령이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각 사람에게 임하실 것을 구약시대에 예언해놓으셨습니다. 그 중이 하나가 욜2:28~29입니다.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이 예언대로 2천 년 전 오순절 날 성령강림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행2:1~4, 행2:17~18). 그러니까 이렇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정확히 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활동하시는 방식이 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큰 차이점 세 가지는 이렇습니다. 첫째, 성령이 구약시대에는 특정한 인물에게 임했는데 신약시대는 모든 성도 각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둘째,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외적으로 임했는데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내적으로 임하십니다. 내 마음 속에 들어오십니다. 셋째, 구약시대는 성령이 임하셨다가 떠나가시기도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한번 오시면 영원히 내 마음 속에 계시지 절대로 떠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령강림 이후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특별한 은혜를 누리는 셈입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을 중요시하고 절기로 정해서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기드온이 등장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사시대 제5대 사사입니다. 사사는 왕이 세워지기 전 백성을 다스리는 직책이었죠. 재판관이란 뜻입니다. 얼른 생각하면 우리가 우러러볼 인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본받을 것은 본받아야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가 그보다 못할 게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더 복되고 더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동일한 성령이시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구약시대에는 성령의 역사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드온의 모습을 보면서 배우기도 해야겠지만 우리는 성령의 은혜를 오히려 더 풍성히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며 기드온 못지않은, 아니 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배경은 바로 앞 5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드보라 사사 때문에 40년 태평성대를 누리다 이스라엘이 다시 고난을 맞이하는 시기였습니다. 미디안이 아멜렉 족속과 함께 이스라엘을 압제했는데 이미 7년 동안 그랬습니다(B.C. 1176~1169). 추수 때가 되면 그들이 몰려와서 곡식을 약탈해 갑니다. 너무 괴로웠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하나님 앞에 부르짖 어 기도합니다. 삿6:6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런 시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구원하시고자 새로운 사사를 부르십니다. 그게 바로 기드온입니다.

 

[1] 겁보 기드온 : 미약한 집안의 작은 자

 

하나님이 기드온을 부르실 당시의 모습을 보면 너무 한심했습니다. 한 마디로 겁보였고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겁쟁이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삿6:11 “ …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미디안 족속에게 걸리면 혼나니까 몰래 밀을 포도주 틀에 숨어서 타작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는 므낫세 지파 소속이었는데 그 중에서 미미한 집안 출신입니다. 삿6:15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자기 집안은 므낫세 지파에서 꼴찌인데 자기는 집안에서 또 꼴찌라고 고백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흙수저 중의 흙수저요 찌질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미약하고 비천한 인물이었던 기드온을 통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삿8:28을 보면 놀라운 기록이 있습니다.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 기드온 때문에 미디안 족속이 항복하고 그 후부터 40년 동안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구약의 대표적인 신앙 선진들은 언급하면서 그의 이름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히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이름 석 자 들어간 게 대수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구약에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있나요? 그 중에서 뽑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기드온은 분명 인간적으로 비천한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놀라운 영웅의 인생을 살았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이런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부족하고 미미한 사람을 선택하고 사용하십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 역설적으로 당신의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고전1:27~29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고후12:9~10 약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니까 더 강하다고 고백합니다.

 

기드온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미디안의 압제로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기드온을 부르셨는데 그는 절대로 못한다고 거부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삿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그를 가리켜 ‘큰 용사’라고 부릅니다. 말도 안 되죠. 찌질이인데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 너는 미약하지만 너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니까 큰 용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삿6: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식은 죽 먹기라는 말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이렇게 기드온을 부르셨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전쟁이 벌어집니다. 미디안과 아멜렉 족속이 연합군을 형성해서 쳐들어옵니다. 삿6:33 “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쳤는데 삿7:12을 보면 그 군사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새까맣게 몰려온 메뚜기 떼와 같습니다. 무려 13만 5천 명이나 됐습니다(삿8:10). 또 낙타를 몰고 왔는데 얼마나 많은지 모래알과 같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바라보면 질려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2] 용사 기드온 : 성령의 옷을 입고 승리

 

그런데 기드온이 당당히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그가 가능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가 성령의 옷을 입고 출전했기 때문에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실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본래 겁보입니다. 큰 용사가 된 것은 성령이 함께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삿6: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여호와의 영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이 임하자 기드온이 용기백배하여 나팔을 붑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누가 따르나요? 미천한 찌질이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가문 아비에셀 사람들이 그의 따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임했다는 단어가 흥미롭습니다. 히브리어로 ‘라브샤’인데 ‘(옷을) 입혔다’(ESV – clothed)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기드온에게 옷을 입히듯이 감싸주셨다는 뜻입니다. 흔히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대로 말하면 ‘성령의 두루마기’인 셈입니다. 그런 가운데 성령께서 기드온에게 용기를 주시고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능력을 주셨습니다. 결국 기드온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고 용감하게 출정했고 마침내 당당히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착용 로봇을 아십니까? 영어로는 wearable robot이라고 합니다. 옷을 입듯이 몸에 착용하는 로봇인데 의료용으로 노약자나 장애인의 심체적인 기능을 강화하는 보조 기구입니다. 산업용이나 군사용도 있는데 무거운 중량물을 처리하는 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앞으로 혹시 착용 로봇을 입고 하늘을 날아다닐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성령이 기드온에게 임했다는 말씀을 보면서 문득 착용 로봇이 생각났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만든 것도 이렇게 신기하고 놀라운데 성령의 옷이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능력을 주시겠습니까! 기드온은 귀족의 옷도 장수의 갑옷도 입지 못했지만 성령의 옷을 입고 승리했던 것입니다.

 

기드온이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어떻게 하는지 성경을 읽고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강력한 리더십이 생깁니다. 평소 같았으면 무시당했을 텐데 백성들이 줄줄이 따릅니다. 삿6:35 “기드온이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 자신이 속한 므낫세 지파뿐만 아니라 아셀, 스불론, 납달리 등 여러 지파에 사자를 보내 참전을 독려하자 너도 나도 따라나섭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인간 기드온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삿6:36~40을 보면 하나님께 표징 즉 표적(sign)을 요구합니다. 기드온은 상대가 워낙 대군이다 보니까 아직 약간의 두려움과 의심을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해 주시는지 재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양털과 주변 땅이 있는데 이슬이 양털에만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다음 날 보니까 정말 그대로 됐습니다. 양털에 이슬이 내려서 짜보니까 물이 그릇에 가득할 정도로 많이 나왔습니다. 땅에는 전혀 이슬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되도록 요청합니다. 땅에는 이슬이 가득내리고 양털은 마르도록 요청했는데 정말 그대로 됐습니다. 기드온은 확신 가운데 출정합니다. 3만 2천 명을 거느리고 가는데 하나님이 너무 많다며 두려워 떠는 자들을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그 중에 1만 명만 나았는데 아직도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3백 명만 남깁니다. 기드온이 그들을 데리고 출정하는데 작전이 참 희한합니다. 1백 명씩 세 대로 나누고 나팔과 빈 항아리, 횃불만 갖고 가게 합니다. 이게 무슨 무기가 될까 싶죠. 그런데 이게 절묘한 작전이었습니다. 성령이 주신 지혜입니다. 기드온의 신호에 따라 군사들이 나팔을 불고 소리칩니다.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 손에 나팔을 들고 붑니다. 여호와의 기드온의 칼이라! 외칩니다. 그러자 당황한 적군이 도망칩니다. 자기들끼리 칼로 찌르며 자중지난이 일어납니다. 결국 대승을 거두었고 그 후 40년 동안 태평성대를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겁보 기드온이 용사가 되어 승리하는 모습이 정말 놀랍죠. 그런데 유의사항이 있습니다. 인간 기드온이 위대한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와 함께하신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그에게 옷을 입히듯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용기를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3] 신약시대 성도의 특권 : 성령의 내주, 성령의 충만

 

기드온이 승리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성령이 옷을 입혀 주듯이 함께해 주시면 우리도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신약시대에는 더욱 더 풍성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는 구약시대에 비해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특별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 각자의 각자의 마음속에 성령이 오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 성령강림 사건이 나오는데 베드로가 성령 충만을 받고 나가서 백성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담대히 전파합니다. 그 전에는 겁보 기드온처럼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밖으로 뛰쳐나가 외칩니다. 백성들이 그 말씀을 듣고 당황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으니 큰일 났다 싶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외칩니다. 행2:38~39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을 모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성령의 내주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영원히 내게서 떠나가시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지시기 전날 최후의 만찬 석 상에서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another Counselor-NIV)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보혜사 =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 오순절에 그대로 성취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처럼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 같은 인물조차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시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임하셨다가 떠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절대 떠나시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드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내게 성령이 임하셔서 함께하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고전12:3(하) “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이미 성령이 와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믿음이 생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다”보다 “믿어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롬8:9에서는 또 이렇게 증거합니다. “ …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모시고 있으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겁니다. 고전3:16에도 보면 이렇게 증거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게 바로 성령의 내주(內住, indwelling/residence)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과 비교해봐야 합니다. 성령의 내주는 영속적입니다. 그에 비해 성령 충만은 간헐적입니다. 됐다 안 됐다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이 나를 충분히 주장하시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봅니다. 집에 고급 냉장고가 있습니다. 전기 배선도 되어 있고 전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동이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플러그를 끼지 않아서입니다. 성령의 내주가 있어도 성령 충만이 없으면 플러그를 빼놓은 것처럼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성령 충만을 명령합니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NIV-Instead, be filled with the Spirit)” 반대로 성령 소멸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살전5: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NIV-Do not put out the Spirit’s fire)”

 

그러면 어떻게 성령 충만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성령은 거룩한 영이므로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늘 내 속에 숨은 죄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면 즉시 회개함으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흔히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쌍둥이서신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내용이 흡사합니다. 엡5:18의 병행 구절이 골3:16인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NIV-Let the word of Christ dwell in you richly) … ” 그러니까 말씀 충만이 곧 성령 충만이라는 말입니다.

 

2016년 리우올림픽 여자 양궁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2관왕 장혜진 선수의 이야기입니다. 운동선수들은 아무리 훈련해도 실제 경기에 임하면 큰 경기일수록 극도의 긴장감을 갖기 마련입니다. 양궁의 경우는 우리나라가 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올림픽 경기 못지않게 평가전에서부터 긴장하게 됩니다. 장 선수는 그만 1차 평가전에서 탈락 위기의 성적에 그쳤습니다. 실망한 나머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책망했습니다. 믿음의 분량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고.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하는데 성령 충만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후 2차 평가전을 치를 때 전혀 떨지 않고 결국 1위를 차지해서 국가대표로 선발됩니다. 올림픽 경기 중에도 계속 기도하며 말씀을 암송하며 시합에 임했을 때 침착하게 승리를 가둘 수 있었습니다. 장 선수는 마치 성령이 자신을 감싸안아주는 것처럼 느꼈다고 간증합니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작곡가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작곡한 ‘천지창조’(Die Schöpfung)는 세계적인 오라토리오 중 하나로 유명하고 그 일부가 우리 찬송가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78장-저 높고 푸른 하늘과). 그의 말년에 ‘천지창조’ 연주회가 있었습니다. 거장이 입장하자 모든 청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존경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는 박수를 멈추며 하늘을 우러러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곡은 내게서 온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립니다!” 예술은 창조적 행위인데 꽉 막힐 때는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러나 성령이 그를 감싸 안았을 때 위대한 곡이 나왔다는 솔직한 고백이었습니다.

 

어디 스포츠나 예술뿐이겠습니까? 사업을 해도 얼마나 경쟁이 치열합니까? 한 발자국만 앞서가면 승리할 수 있는데 그게 어렵잖아요.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과 문제가 닥쳐옵니까? 그때마다 성령이 옷으로 감싸듯 우리에게 역사함으로 성령 충만을 경험하면 우리도 놀라운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능력이 대단한 게 아닙니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험한 세상 사노라면 힘에 부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믿음으로 신뢰하고 기도하면, 말씀을 붙잡으면, 성령이 옷으로 입혀주듯이 나를 감싸고 용기, 지혜, 그리고 능력으로 충만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겁보 기드온이 용사가 된 비결도 바로 이겁니다. 부디 성령의 옷을 입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항상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