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전 12:13-14)
전도서는 오독(誤讀)하기 쉬운 책입니다. 전도서를 읽고 잘못 이해하기 쉽다는 말입니다.
전도서는 1:2을 보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8을 보면 또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도서에 ‘헛되다’는 말이 무려 40회 정도나 나옵니다.
그래서 자칫 전도서가 인생의 허무를 말하려는 책이 아닌가 하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전도서를 쓴 전도자가 허무주의자가 아닌가 하고 잘못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전도서가 인생의 허무를 말합니다. 그것도 인간이 느끼는 허무에 대해서 깊이 있고 세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인간이 느끼는 이 허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보다 자세히 말해보면 인간이 왜 허무를 느끼게 되는가 그리고 이 허무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서를 올바로 읽는 사람들은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허무를 떨쳐버리고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인생의 허무
그러면 전도서가 말하는 인생의 허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전도서가 허무를 나타내는 ‘헛되다’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은 본문의 원어인 히브리어로는 ‘헤벨’(הבל)입니다. 이 말의 뜻은 ‘아무 것도 없이 텅 빔’,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허전하고 쓸쓸함’이라는 뜻입니다.
전도자는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허무 즉 헛되다고 느끼며 산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내게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느끼거나 내가 살아온 인생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해서 허전하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참 나이에 벌써 이런 허무를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인생의 말년에 이런 허무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런 허무를 느껴보셨습니까? 아니면 지금 느끼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느껴보게 될 것 같으십니까?
다음으로 전도서가 말하는 허무를 느끼게 되는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전도서를 보면 대체로 사람들은 세 가지 경우에 허무를 느끼게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첫째, 죽음을 생각할 때 허무를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 1: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우리 옛시조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야은 길재가 고려왕조의 멸망을 바라보면 읊은 시조입니다.
五百年(오백년) 都邑地(도읍지)를 匹馬(필마)로 도라드니
山川(산천)은 依舊(의구)되 人傑(인걸)은 간 듸 업다
어즈버 太平烟月(태평연월)이 이런가 노라
그토록 대단하던 고려왕조가 무너지고, 왕들, 영웅호걸들 다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허망함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렇게 흐르는 세월 따라 나라도 멸망하여 사라지고, 사람들도 죽음 너머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나라도 그리고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헛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수고가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할 때 허무를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도록 고생했는데 결국 실패하고 말대 허무를 느낍니다. 고생고생해서 성공을 해도 그 성공의 열매를 엉뚱한 사람들이 차지하게 될 때 허무를 느낍니다.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노인과 바다]가 생각이 납니다. 주인공 어부 산티아고 노인은 84일간 조각배를 타고 고기잡이에 나섭니다. 홀로 낚시를 하던 중 청새치를 낚았습니다. 처음에는 물고기가 너무 커서 하루 밤과 낮을 끌려 다녔습니다. 사력을 다해 씨름한 끝에 청새치를 잡았지만 너무 커서 배에 싣지는 못하고 배 옆에 묶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어 떼가 몰려들어서 그 물고기를 뜯어먹습니다. 노인은 노 끝에 칼을 매달고는 상어와 싸웁니다. 그러나 헛수고였습니다. 항구에 돌아와 보니 청새치는 앙상한 뼈만 남았습니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으로 자기가 겪고 있던 허무를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소설 속의 노인이 겪던 허무를 이기지 못하고 엽총으로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산티아고 노인처럼, 작가 헤밍웨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며 이런 허무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셋째,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음을 깨달을 때 허무를 느낍니다. 전 1:1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아무리 탁월한 업적을 세워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아무 것도 기억되지 않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허무를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최근 장례문화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정부통계를 보면 2015년에 화장의 비율이 80%가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만간에 90%를 육박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주목할 것은 화장 이후 대부분 납골을 하고 있는데 서서히 자연장이라고도 하는 수목장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부의 예상은 2027년이면 수목장의 비율이 50%를 넘어서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이 자신도 자식들에게 수목장을 당부하려고 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이렇습니다. 자식이 하나라 납골을 해도 바빠서 돌아보기나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주세대가 되면 누가 자기를 기억해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끗하게 이 땅에서의 흔적을 지우려고 수목장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죽은 뒤 한 세대 두 세대만 지나면 누가 기억이나 하겠습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산다는 것이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전도자는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이 살면서 허무를 느끼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이런 생각들 때문에 허무를 느끼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허무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립니다. 심할 경우 자살하기도 합니다.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는 길
그러면 어떻게 이런 허무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런 허무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짧지만 그 안에 허무를 극복할 비결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허무를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본문 1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부터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전도서는 사람들이 허무를 느끼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해 아래”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전 1:1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도자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것을 보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헛된 이유가 해 아래에서라는 위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해 아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 단절된 곳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뒤에 에덴동산을 쫓겨나와 하나님과 단절된 채로 살아가는 곳 거기가 바로 해 아래입니다.
어항 속을 들여다 볼 때가 있습니다. 수면 아래 살아가는 물고기들을 생각해 봅니다. 저들은 우리의 존재를 알까? 과연 수면 위의 세계에 대해 알고 있을까?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어항이 저들의 우주이고 저들의 삶의 공간 전부입니다. 그 안에서 평생을 살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해 아래가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곳, 그리고 해 위에 세계를 알 수 없는 곳입니다. 비록 어그러져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는 인간들은 해 아래의 삶이 무엇인가 답답합니다.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의 것에 대해 막연하나마 갈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을 채울 수 없는 해 아래의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해 위에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해 위의 세상을 이야기 해 주십니다. 해 위의 세상을 믿음의 눈으로 보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해 위의 세상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리가 다시 저위의 해 위의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고 저 해 위의 세상을 소망 가운데 바라보며 살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드디어 모든 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오늘의 삶의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록 해 아래에 살지만 예수님 때문에 해 위를 바라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허무를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 13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허무를 극복하려면 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전도서에 재미있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바로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사람들이 나름대로 애쓰고 수고하는 일들이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바람을 잡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원래 바람은 잡혀지지 않습니다. 바람은 공기의 흐림이기 때문에 바람이 머무는 순간 더 이상 바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바람을 잡는다는 말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면 왜 이 말을 쓰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사람들이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을 비유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쾌락이라는 욕망을 쫓는다고 할 때 달콤한 쾌락을 맛본다고 계속 거기에 머물 수 없습니다. 얼마 뒤 또 다시 욕망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욕망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최근 우리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이름하여 ‘버닝썬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유명 가수들이 연루되어 더 크게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는 사건입니다. 사건의 핵심은 버닝썬이라는 성인클럽 내부에서 벌어진 불법, 탈법, 윤리적 타락입니다. 구체적으로 성접대, 성매매, 마약, 몰카로 찍은 음란영상 유포와 같은 시궁창 같은 짓들로 가득 차있는 사건입니다.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정준영이라는 가수가 구속됐습니다. 그가 지금 구치소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아마도 그동안 쌓아놓았던 인기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까요? 그렇게 정신없이 쫓던 쾌락이 허망하다고 느끼지 않을까요? 그야말로 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욕망을 쫓는 일은 다 이와 같습니다.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면 됩니다. 욕망을 내려놓고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그대로 지키며 살면 됩니다. 그러면 세월이 갈수록 우리에게 흘러가는 바람이 아니라 저 들판에 무르익는 열매처럼 주렁주렁 복의 열매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셋째, 심판을 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본문 1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허무를 극복하려면 심판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16세기 성자라고 불리는 필립 네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컨티넨탈 대학교정을 걷다가 한 학생을 만났습니다. 네리는 이 학생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대학을 마치면 무엇을 할 것인가?" 학생은 박사 학위 공부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네리는 "박사학위를 받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하자 학생은 "아주 힘든 문제를 몇 개 맡아 웅변과 지식으로 멋지게 변호해 뭇사람들의 관심과 명성을 얻겠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느냐?" "상당히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돈을 많이 벌고 드디어 부자가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느냐?" "명성과 재물을 소유한 중에 평안하게 살 것입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느냐?" "그 다음에는 내가 아마 늙어 죽게 되겠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느냐?"라고 질문하자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가버렸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참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후세계가 있다고 생각해도 거기서의 생은 이생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허무를 느낍니다. 이 땅에서 손에 쥐었던 것들, 이루어 놓은 것들, 죽으면 다 무의미해 지기 때문에 허무를 느낍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늘 본문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고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대해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허무를 극복하려면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바르게 살았다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를 위해 살았다면 저 천국에서 상을 받을 것입니다. 결코 우리의 삶이 헛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두 눈으로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면 허무를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인생을 바라보면 살아온 지난날들이 다 헛되게 보입니다. 그리고 실패 앞에서 인생을 바라보면 그동안 땀 흘려 힘써왔던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세월이 흘러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모습을 보면 모든 것이 다 헛되게 보입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말씀은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면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해 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경외할 때 허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욕망을 내려놓고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 때 허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끝이 아니고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허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