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있으라


창세기 1:3-5, 14-19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14)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15)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18)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9)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창조의 아침

올 해는 하이든 서거 2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하이든의 대표작들이 많지만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천지창조’입니다. 헨델의 ‘메시야’와 함께 하이든의 ‘천지장조’는 세계 3대 오라토리오 중 하나입니다. 천지창조의 첫 시작은 매우 음울한 분위기로 시작합니다. 그 서곡은 태초의 혼돈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C단조의 Largo(느리게)로 그 암울함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단조로 흘러가던 분위기가 일시에 C장조로 바뀝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는 선언과 함께 “빛이 있었고”에서 “빛”이라는 단어가 울릴 때입니다. 이 부분에서 음은 갑자기 포리티시모(매우 세게)로 바뀌며 모든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꽝” 하며 깜짝 놀랄 정도의 큰 소리를 만들어냅니다. 마치 온 우주 공간에 일시에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한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이 창조의 첫날의 감격이 있습니까? 혼돈하고 공허하며 깜깜한 어둠이 일시에 물러나고 빛이 쏟아져 들어올 때의 감격 말입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 영화관은 정말 깜깜했고, 밖은 환한 빛이 그대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밖으로 나올 때는 도무지 눈이 부셔서 한동안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의 인생에 환한 빛이 들어오던 때가 있었습니까?

누구도 창조 첫날의 감격을 맛본 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말씀을 통해서 그때의 감동을 유추할 뿐입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창조 첫날 빛이 쏟아지던 때의 감동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그것을 경험합니다. 바로 매일 아침의 태양을 통해서입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새 아침이 밝을 때 그것이 바로 창조의 아침입니다. 밤은 혼돈입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창조 이전의 무질서로 돌아 간 듯 깜깜합니다. 시골길을 한 번 걸어보십시오. 정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새벽녘쯤 되면 어둠이 조금씩 물러가더니, 태양이 불끈 솟아오르면서 모든 만물들이 환하게 빛을 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이 창조의 첫날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감격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빛을 만드시고 나서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고 말씀합니다. 어둠을 밤이라는 시간에 몰아넣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우리로 창조의 아침의 은혜를 맛보도록 하려는 계획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깜깜한 어둠이 있기에 본다는 것의 은혜가 무엇인지 압니다. 우리 주변에는 여러 장애인들이 있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장애는 보지 못하는 장애일 것입니다. 다리를 못 쓰거나 귀가 들리지 않거나 다른 불편한 것은 어떻게든 참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고통만큼은 감당이 안 될 것입니다.

이 어두움은 또한 우리 인생에서 당하는 고통과 불의라는 혼돈스러운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밤은 곧 지나갑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 ‘깨닫지 못하더라’는 단어는 ‘카타람바노’인데 원래의 뜻은 ‘이기다, 잡다, 누르다’의 뜻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새번역은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고 번역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던 때는 새벽 무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를 지배하던 죄와 사망의 어두움을 또 한번 물리치신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 사단이라는 혼돈의 세력을 물리치고 맞은 부활의 아침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어둠과 밤을 맞을 수밖에 없지만 그 어둠이 우리를 절망시키지 못합니다. 이 어둠은 아침이 태양이 떠오르며 사라질 존재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빛 앞에 일시적인 생명만을 유지하고 있는 시한부적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은 영광의 아침일 뿐만 아니라 승리의 아침입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창조 첫날의 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혼돈을 정복하는 승리의 기쁨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더 이상 우울이나 절망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항상 창조의 새 아침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에 어둠이 있고 역사에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는 말씀과 함께 어둠이 순식간에 물러가고 눈부신 태양이 온 누리에 빛을 비출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빛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이 창조의 첫날이 주는 무한한 행복감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옛날 중세 시대 신부나 수도사들이 칙칙한 옷을 입고, 또 청교도들이 죽음의 사자를 상징하는 듯한 검은 옷을 즐겨 입었던 것은 기독교의 신앙과 어울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안에는 죄의 고통과 심판이라는 두려움은 있었지만 창조의 첫날의 감격이 없었습니다. 눈물과 고통, 고뇌와 한숨, 두려움과 심판이라는 심각한 모습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기본적인 마음은 환한 기쁨입니다. 옷을 입어야 한다면 그것은 밝은 흰색이거나 칼러풀한 원색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고 우리 또한 세상의 빛입니다. 그래서 마음도 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얼굴도 환해야 합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 영광의 광채가 얼굴에서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서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표정은 빛으로 인하여 점점 환해져야 할 것입니다. 마치 수많은 작은 태양들이 둥실 떠있는 것과 같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마치 지옥에서 출장 나온 사람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은 죽었다고 외쳤던 니체가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비꼬듯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구세주를 믿게 하려면 좀 더 구원받은 사람들처럼 보여야 할 것이다.”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라는 생명의 빛을 그 안에 품고 있는 자는 환하게 빛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도 우리 안에서 비추는 빛을 보고 예수님을 믿을 것 아닙니까?

빛과 태양

하나님께서 첫째 날 만드신 것은 빛이었습니다. 태양이 아니었습니다. 태양은 넷째 날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순서가 옳습니다. 현대 과학은 모든 물질의 근원을 ‘빛’으로 설명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방정식 E=mc²(질량 X 빛의속도²)은 사물의 비밀을 밝혀줍니다. 현대물리학의 정의는 물질이 풀어지면 빛이라는 에너지가 되고, 빛이 한곳에 뭉치면 물질이 됩니다. 이 공식에 의하여 발명된 것이 원자폭탄 수소폭탄입니다. 모든 사물의 근원은 빛입니다.

그러면 넷째 날 만들어진 태양과 달은 무엇인가? 그들은 낮과 밤을 주관하는 광명체에 불과합니다. 1장 16절에 하나님은 태양을 만드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여기 광명이라는 것은 ‘램프’라는 뜻입니다. 낮을 위하여 태양이라는 큰 램프를 만들고, 밤을 위하여 달이라는 작은 램프를 달아놓았다는 말씀입니다. 태양이 얼마나 큽니까? 태양은 지구 지름의 100배입니다. 부피로 따지면 백만 배입니다. 그런 엄청난 태양을 향하여 하나님은 단지 큰 램프라고 할 뿐입니다.

옛날 사람들에게 태양은 신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바로가 태양 신의 아들이라 불렸고 태양 신 ‘라’는 최고의 신입니다. 헬라 사회에서 태양은 태양신 아폴론이 주관을 했습니다. 지난 번 선덕여왕을 보니까 태양이 가려지는 일식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난리가 납니다. 지구 곳곳에서는 태양신 숭배가 가장 보편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태양을 향하여 밝은 전등 하나 켜 놓은 듯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화적인 수식어들을 어리석다 합니다.

태양은 자기 역할에 충실한 일꾼일 뿐입니다. 시편 19편 5절 6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태양은 처음 탄생된 수백억년 전부터 지금까지 매일 하루에 한 번씩 동쪽에서 서쪽으로 운행을 하지만 지루해 하지 않습니다. 신방에서 나온 신랑처럼 설레는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달리기를 기뻐하는 장사처럼 하루를 내어 달립니다. 태양은 주권자 되신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일꾼에 불과합니다.

이런 창조신앙을 가졌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연을 숭배하거나 미신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지만 여호수아의 담대함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도중에 남부 연합군과 기브온 지역에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승승장구하면 적을 물리치고 있는데 곧 날이 저물려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하늘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수10:12) 이 명령에 놀랍게도 태양이 중천에 떠서 종일토록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어느 인간이 태양을 향해서 이렇게 명령할 수 있습니까? 태양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충실한 종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별이란 것도 밤하늘에 박혀 있으면서 지상을 비추는 작은 역할을 맡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실 별자리도 고대 사람들이 단순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고대에서는 사람의 운명을 별자리가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점성술이 그렇습니다. 현대인들도 별자리를 따지며 운세를 판단하려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별을 ‘이쉬타르’라 하여 여신으로 섬겼습니다. 아닙니다. 별은 신이 아니고 단순히 어두운 밤을 비추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고대 사회의 미신들을 타파하고 있는데 현대인들이 오히려 운명이니 사주니 하는 미신에 자기를 맡기려 합니다. 별은 운세를 보라고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밤하늘을 아름답게 밝히려고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현대 과학은 별이 가지고 있는 풍요로움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립니다. 현대과학자들은 성경의 이야기를 비웃을지 모릅니다. 우주에는 이 지구상의 바다와 사막에 있는 모든 모래알보다 10배나 많은 별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별들의 크기와 밝기에서 태양은 비교할 바도 못되고 그 안에는 엄청난 폭발과 가스층으로 가득하다고 합니다. 물론 과학적 사실은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 큰 달은 고사하고 대한민국이라는 땅을 별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옳아 보입니다. 별이나 달을 작은 전등과 그 보다 더 작은 반짝이 전구처럼 생각하는 것이 우리 인생을 더 풍요롭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래야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담아 드릴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불로 이글거리고 가스와 먼지로 가득한 별보다는 어린 왕자가 사는 혹성 B612호가 더 별을 더 살아있는 존재로 만듭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이런 신비와 상상력들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신비라는 것은 단순히 무지거나 미신이 아닙니다. 이는 별이라는 공간에 대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에 대해서 생명을 불어넣으며 그 앞에 경외감으로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 유머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밤을 깜깜하게 만드셨나요?”
“응 그것은 일만 하지 말고 쉬라는 뜻이다”
“그러면 완전히 깜깜하게 하시지 달과 별은 왜 만드셨어요?”
“응 그것은 잠만 자지 말고 생각도 하라는 뜻이다.”

아마 전등을 발명했던 에디슨은 하나님으로부터 혼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밤과 낮을 만드셨지만 에디슨은 전등을 발명해 밤을 대낮처럼 밝혀버렸습니다. 그래서 밤에도 일하고 하니 몸이 망가지고, 생각할 시간이 없으니 상상력도 또 영적인 능력도 퇴보하고 말았습니다.

빛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밤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았습니다. 인생은 밤이 있어야 아침의 기쁨을 알고, 밤이 있어야 인간들이 철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을 알아야 빛의 소중함을 압니다. 어쩌면 우리가 죄를 지어 타락한 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은혜의 소중함을 알게 하고자 하는 주님의 더 심오한 계획에서 나온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밤의 고통을 알기에 빛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의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밤새 열병을 앓던 사람이 새벽녘이 되어 곤한 잠에 드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의 일생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형 에서의 공격 앞에 모든 물질과 처자식을 앞서 보내고 자신만 홀로 남아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할 때의 모습입니다. 그 고집을 꺾지 않자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거꾸러뜨립니다. 그리고는 야곱에게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마라”(창37:28) 하시며 이스라엘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줍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그 존재가 바뀌는 것입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자신의 욕망만을 좇아 이기적인 삶을 살았던 야곱, 곧 다른 사람의 발 뒷꿈치나 잡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만 겨루는 영광스런 존재가 됩니다.

야곱이 밤새도록 싸우고 아침을 맞아 자기 길을 가는데 그 장면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창32:31)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환도뼈로 인하여 절면서 가고 있지만 여호와의 얼굴에서 흘러나온 따뜻한 햇살이 그를 감싸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빛을 본 인생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축복 기도 중에 아론의 축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 여호와의 은혜의 햇살이 비칠 때 우리 마음에 은혜와 평강이 임합니다. 제가 심방 가서 자주 드리는 기도가 바로 이 기도입니다. “여호와의 빛이 이 가정 구석구석을 비추사 어둠이 없게 하시고 평강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 인생의 모든 슬픔과 고통이 물러납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사60:20) 사람이 밝은데 살아야 낙천적이 됩니다. 그래서 흑인들의 삶이 낙천적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걷는 것이 아니라 춤을 춥니다. 일전에 아프리카에서 온 외국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사람이 있어 환영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찬양 부르며 환영하면 나와서 인사하는 형식이었는데 이 분이 앞으로 걸어 나오는데 그냥 걸어오는 것이 아니라 춤추면서 나옵니다. 아마도 빛을 많이 보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반대로 밤이 많고 일조량이 부족한 북반구에 사는 사람들은 생각은 깊지만 약간 우울증 기질이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하나님의 빛을 많이 볼수록 우리는 슬픔을 모른 어린아이처럼 되고 춤추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되 흠뻑 부어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사30:26) 태양보다 일곱 배 밝은 빛으로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빛은 치료제입니다. 말라기서 말씀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말4:2) 하나님의 빛은 치료의 빛입니다. 태양의 강한 빛에 세균들이 다 멸절되듯이 우리의 상처들을 온전히 치유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감추지 마십시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만의 은밀한 방을 따로 만들어 놓은 채 하나님께 열어드리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치료하는 광선이 그 은밀하고 음침한 방에도 비추어야 우리 안에 평화가 임합니다.

실제 하나님의 빛은 우리들의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치료하는 광선이 우리 안에 있는 암과 세균과 질병들을 불태우고 몰아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모든 질병과 상처 위에 하나님의 빛이 있으라.” 그리할 때 속히 아물고 병균들이 박멸을 당하고 정상적인 건강을 회복할 것입니다.

어떤 분이 “빛이 있으라”는 이 말씀에 감동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씽크대가 막혀서 물이 내려가질 않았습니다. 그 때 이 분이 이렇게 명령했다고 합니다. “씽크대에 빛이 있으라” 아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물이 빠지더랍니다. 씽크대야 손을 보고 기술자를 부르면 되지만 우리 마음속의 상처나 인간이 치유할 수 없는 질병들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일곱 배나 밝은 하나님의 빛이 비출 때 온전한 치유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자꾸 이 하나님의 빛을 피하여 가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백성은 이 빛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빛은 탐조등처럼 우리가 어느 곳에 가든지 우리를 비춥니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139:11-12) 그의 택한 자를 반드시 돌이키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세상의 빛

하나님의 빛은 또한 정의의 빛입니다. 다시 말라기서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말4:2) 하나님은 정의의 태양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면 만물이 다시 소생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처럼 사람 사는 세계를 살리는 것은 정의입니다. 불의와 억압이 있고 폭력과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는 혼돈이요 어두움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 온 땅 위에 정의가 섭니다. 가난한 자의 눈물과 한숨을 기쁨과 찬양으로 만듭니다. 눌린 자가 그 억압과 분노에서 해방됩니다. 우주에 가득한 상함과 해함도 없는 여호와의 빛이 임하는 순간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모든 것들이 주님의 빛에 노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빛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빛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달과 같습니다. 태양 빛을 받아 빛을 반사합니다. 달이 가장 밝을 때는 보름달일 때입니다. 보름달은 정면으로 태양을 마주보고 있을 때 생깁니다. 태양이신 하나님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더 환한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빛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더 많이 받아야 합니다.

이 은혜의 빛을 받은 사람들은 이제 세상에 나가 빛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어둠이 물러가는 창조의 아침 사건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불의를 몰아내는 정의의 빛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빛으로, 길 잃은 자를 인도하는 진리의 빛으로, 세상의 빛이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