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시는 예수님
(요 7:10-24)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여럿 나옵니다. 학자들이 연구해 보니까 무려 4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 중에 우리가 주로 잘 알고 사용하는 호칭은 ‘그리스도’, ‘메시아’, ‘주님’, ‘하나님의 아들’, ‘구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매우 많이 나타나면서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호칭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교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우리말로 ‘선생’이라고 번역한 ‘디다스칼로스’(διδάσκαλος)라는 말이 48번이 나오는데, 그 중에 예수님을 호칭할 때 41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선생을 높여 부를 때 쓰는 말인 ‘랍비’(ράββι)라는 말이 17번 나오는데, 그 중에 예수님을 호칭할 때 14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니까 복음서에 예수님을 가르치는 교사로 부른 경우가 무려 55회나 나옵니다.
왜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교사라고 불렀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당시 사람들 눈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이 주로 가르치시는 것에 집중되어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전까지 가장 역점을 두고 행하신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기간 행하신 사역 중에 가장 역점을 두셨던 일 가운데 하나가 가르치시는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는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을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나게 하시려 힘쓰셨습니다. 그동안 율법에 매여 살던 옛 이스라엘인 유대인들이 잘못 알고, 잘못 행하던 것들을 바로 잡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살게 된 새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하고, 행해야 할 것들을 가르쳐주시려 하셨던 것입니다.
가르치시는 예수님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미 명절 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가르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따져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앞부분인 8-9절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메시아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라는 동생들의 강권을 거절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이번 초막절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예수님께서 동생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뒤에 은밀하게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언뜻 봐서는 예수님께서 동생들에게 거짓말을 하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뒤에 올라가셨으니까 말과 행동이 다른 분이라고 오해할 소지도 있어 보입니다.
왜 이런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일까요? 동생들은 예수님께 메시아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자고 강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 메시아로 자신을 드러내실 때가 아니라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는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실 수 없었던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가르치시는 사역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야로서는 올라가실 수 없으셨지만, 교사로서는 올라가셔야 하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번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었지 않았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열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치시기 위한 우리 주님의 간절한 열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 11:28-29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께서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실 때 인생의 짐을 쉽게 지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쩔쩔매며 힘겹게 그 짐을 지고 가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들을 주님께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배우라 그러면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죄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몰라서 죄의식의 무거운 짐에 눌려 살고 있습니다. 인생을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몰라서 염려하며 불안해하며 살고 있습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있는데, 몰라서 불행하게 살고 있습니다. 인생을 사랑하며 사는 방법이 있는데, 몰라서 늘 갈등을 겪으며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인생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초청하셨습니다. “내게 와서 내게 배우라” 우리가 주님께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선생님이십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주님께 나온 사람을 둘로 구분하셨습니다. 하나는 무리들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입니다. 무리는 주님의 이적을 보려고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으려고 주님 께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에 비해서 제자는 주님께 배우려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무리들에게 어느 정도 은혜를 베푸시고 나서는 돌려보내셨습니다. 어떤 경우는 저들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은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씀하시 않으셨던 진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주님께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르치신 내용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가서 배워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하니”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한 마디로 놀랐다는 것입니다.
놀란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공적인 자리에서 가르칠 수 있는 랍비교육을 받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저렇게 가르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나 알 수 있는 높은 수준의 내용을 가르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 7:28에도 비슷한 반응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 랍비나 서기관들의 가르침보다도 훨씬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랍비나 서기관들이 받는 전문교육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이런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공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나 자질도 없었거니와 감히 나서서 가르칠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당히 나서셔서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들보다 더 권위 있게 가르치셨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본문 16절 이하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예수님께서는 배워서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받아서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지식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수직적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적지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지식은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된 지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수평적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사람들로부터 배운 세상지식입니다. 그리고 이 지식은 열심히 공부해서 알게 된 지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수직적 지식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영적지식을 가르쳐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당시 랍비들로부터 수평적 지식만을 배우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수직적 지식을 듣게 된 후 놀라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일찍이 호세아 선지자는 호 4:6에서 이렇게 외친 적이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영적인 지식이 없어서 망하게 되었다는 탄식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도 벧후 3:18에서 이렇게 권면한 바가 있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우리가 영적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는 권고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지식은 바로 수직적 지식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식, 바로 영적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지식입니다.
여러해 전입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의 청으로 병원심방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환자는 이분의 절친이신데 말기 암으로 시한부 삶을 살고 계셨습니다. 대학교수시고 이분의 전공분야에서는 우리나라를 대표할 정도의 학자셨습니다.
이분을 처음 만났을 때 무척이나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암으로 인한 통증보다도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너무도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준비가 되셨습니까?” “무슨 준비요?” “천국 갈 준비 말입니다.” “천국이란 것이 정말 있나요?” “그럼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천국에 처소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결국 이분이 예수를 영접하셨고, 천국에 대한 소망 가운데 평안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저는 이분을 전도하면서 또 한 번 영적 지식의 소중함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지식이 소중합니다. 세상지식이 아무리 대단해도 영적지식이 없으면 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영적지식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없고, 참된 행복을 맛보며 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영적지식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지식을 배우려고 힘써야 합니다.
가르치신 목적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배워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말해 줍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여자육상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리피스 조이너라는 미국선수입니다. 그녀는 초콜릿색 피부에 화려한 복장 그리고 운동선수에 걸맞지 않아 보이는 손톱화장으로 관중들의 시선을 모았습니다. 그녀가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금메달을 따자 단박에 인기는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아졌습니다. 당연히 기자들의 취재경쟁의 대상이 됐습니다.
기자 인터뷰 도중에 미국의 NBC 방송의 한 기자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달리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생각하며 달립니다. 최선을 다함으로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만큼 인생의 보람을 느껴본 적은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역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생각을 하며 그 일을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결과를 얻은 뒤 머뭇거리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사도 바울은 고전 10:31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우리 장로교의 기초를 놓았던 쟝 칼뱅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를 강조했습니다. 또한 우리 장로교의 교리의 핵심인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 제 1문항에서 “사람이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고, 그 답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것은 당연해 보이는데 왜 이렇게 강조해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루어진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당연한데 왜 목적을 정하고 가르쳐야만 하는 것일까요?
사도바울이 롬 1:21에서 그 답을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한 마디로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하나님 아닌 것들에게 돌리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암판정을 받았습니다. 두려운 마음에 주위사람들에게 기도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어느 병원을 찾았습니다. 마침 그 병원에 그 암에 딱 맞는 수술법이 개발됐고, 이분이 첫 번째 수술을 받아 완치가 됐습니다.
회복 후에 이분이 어떻게 완치가 됐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민 끝에 그 병원을 선택한 것을 잘한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료진이 새로 개발한 그 수술법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분의 말에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기도해 준 사람들 덕이고, 자기가 결정을 잘했기 때문이고, 그리고 좋은 병원, 좋은 의사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작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신 하나님, 자기에게 그런 결정을 하도록 지혜를 주신 하나님, 그런 좋은 수술법을 개발하도록 그리고 그 수술을 잘하도록 보이지 않는 손길로 역사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흔히 범하기 쉬운 잘못입니다.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잘 됐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섭섭해 하시지 않으실까요? 주님께서 잘못 가르치셨다고 한탄하시지 않으실까요?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내게 와서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하게 주님 앞으로 가서 배워야 합니다. 특히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영적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더욱 힘써 주님께 배우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