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아끼라
엡 5:16
오늘이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입니다. 금년 달력을 새롭게 건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달력의 마지막 장마저 내려야 합니다. ‘세월이 덧없다’는 말이 이렇게 실감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서 세월의 덧없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90: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세월의 흐름을 날아간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월이 비행기가 하늘을 날 듯, 로켓이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지듯 그렇게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시 39:5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 뿐이니이다.” 세월이 하도 빨리 지나가서, 우리네 인생 전체를 다 따져 봐도, 한 뼘 정도 밖에는 안 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앞에서 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없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너무도 빠르게 지나온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참 많은 것들이 후회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월이 덧없이 느껴진다고 해도, 사람에 따라 그 느낌은 다른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세월의 흐름을 더 빠르게 느낍니다. 흔히 세월이 10대에는 시속 10킬로로, 30대에는 30킬로로, 50대에는 50킬로로, 70대에는 70킬로로 지나간다고들 합니다.
실제로 과학자들의 실험 결과,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생물학자 소던 박사가 1분을 예측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20대와 70대에게 각각 시계를 보지 않고 1분을 맞춰보라고 했더니, 20대는 비교적 정확하게 맞추었는데, 70대는 1분이 되기 전에 1분이 되었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같은 나이라도 사람에 따라 세월의 흐름을 다르게 느낍니다. 같은 나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세월은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처럼 빠르게 느껴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처럼 여유롭게 느껴집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회상 효과’(reminiscent effect)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기억 속에 저장된 내용이 많으면 그 삶을 길게 느끼고, 기억할 수 있는 내용이 적으면 그 삶이 짧게 느껴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똑같은 일상을 지루하게 반복할 경우, 일주일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어제가 주일이었던 것 같은데, 벌써 또 주일인가 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낯선 곳에 여행을 가면, 하루가 무척이나 분주합니다. 참 많은 것을 보고 겪게 됩니다. 이럴 때는 하루가 길게 느껴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어진 시간을 허망하게 낭비해 버리면, 정말 인생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헛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세월을 알차게 보내면,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며 감사하고 또 보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오늘 본문을 보면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알차게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이 세월을 아끼라는 말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글귀가 있습니다. 중국 송나라 때 주자가 후학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며 남긴 ‘권학문’(勸學文)의 글귀입니다.
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은 늙기가 쉽고 학문은 이루기가 어려우니,
一寸光陰不可輕/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未覺池塘春草夢/ 연못가의 봄풀이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도 못했는데,
階前梧葉已秋聲/ 계단 앞의 오동잎은 벌써 가을을 알리는 구나.
동양에서는 이 말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이 글귀를 간단히 요약하면 ‘쉬지 말고 공부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귀를 풀어보면 ‘한 시도 낭비하지 말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라 그러면 학문을 이룰 수 있느니라’
그러나 오늘날 이 글귀는 그대로 통용될 수는 없습니다. 공부나 일의 효율성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 여러 분야에서 확인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은 로봇처럼 쉬지 않고 공부나 일만 할 수 있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쉬지 않고 공부나 일만 하면, 갖가지 문제가 나타납니다. 우선 몸에 탈이 납니다. 신체적인 이상이 나타나거나 심할 경우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생깁니다. 스트레스로 시달리게 되고, 심할 경우 탈진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생겨나게 됩니다.
근자에 들어와 쉼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적당한 쉼과 달콤한 휴식은 창의력을 높여주고, 공부와 일에 몰입력을 증가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일만 한 사람들보다는 쉬며 여가를 즐기며 일하는 사람들이 훨씬 효율이 높다는 것이 속속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을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면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의 참된 뜻은 무엇일까요?
우선 “세월”이라는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은 성경 원어로는 ‘카이로스’(καιρός)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을 본문에서 세월이라고 번역했지만 많은 곳에서는 시간이라고 번역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헬라사람들은 시간 개념을 두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χρονός)입니다. 이것은 초, 분, 시로 흘러가는 양적인 시간 개념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시기를 나타내는 개념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정한 시기를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이 말하는 세월을 예로 들어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하라고 명하신 시기를 말합니다. 또한 바울을 부르셔서 이방인 전도를 명하시고 전도여행을 보내신 시기를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 세월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기회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명하신 어떤 사명의 시기를 말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나선 시기를 말합니다.
다음으로 “아끼라”는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은 성경 원어 ‘엑사고라조’(έξαγοράζω)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성경 여러 곳에서 몸값을 치르고 되산다는 뜻으로 사용되어온 말입니다. 예를 들어 갈 3:13에서는 ‘속량’(贖良)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대신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신 것을 속량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월을 아끼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월에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입니다. 세월을 흘러가도록 그대로 보고만 있지 않고, 내 소중한 무엇인가를 쏟아 부으며 공을 들인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월을 건져낸다는 것입니다. 그 세월을 그저 흘러가는 세월로 버려두지 말고, 내게 소중한 시간들로 하나님을 위해 이웃들을 위해 무엇인가 유익한 시간들로 바꾸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20세기 위대한 성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받는 알버트 슈바이처는 다방면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던 사람입니다.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로 명성을 얻고 있었고, 신학을 전공하여 특히 종말론 분야에서 신학자로서 학문적 업적을 남겼고, 철학을 전공하여 특히 칸트 학자로 유명했던 사람입니다.
연주자로, 교수요 학자로 바쁜 삶을 살고 있던 어느 날 1905년에 한 선교단체의 보고서를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프리카에 의사가 없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의사가 되기 위해 대학 의학부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고, 1913년 의학박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건너갔습니다. 그후 아프리카를 지키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에 대가를 지불하며 그 세월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월을 평범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나와 이웃을 위하여 가치 있는 시간으로 바꾸어 놓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세월을 구원해 내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니라
본문을 보면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면서 때가 악하다고 덧붙여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때가 악하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세월을 아껴야 할 이유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도 세월을 아껴야 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저들과 달리 더더욱 세월을 아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때가 악하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한 마디로 그 시대가 악하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편지를 보내던 그 시대는 정말 악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도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적대시하며 박해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가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박해가 두려워 수많은 배교자들이 나오고, 이런 박해에 맞서다가 수많은 순교자들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가 하나님을 모르는 시대여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각종 악을 저질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당시는 각종 우상숭배가 도처에 창궐했습니다. 심지어 로마 황제까지도 신으로 섬기는 일이 자행됐습니다.
그리고 각종 말세현상들이 즐비했습니다. 딤후 3:1 이하를 보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악의 기준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선악이 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위안부 문제를 보면 우리 입장에서는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악입니다. 그리고 인류 보편적인 윤리기준으로 볼 때도 명백한 악입니다. 그러나 일본 입장에서는 악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전쟁 중에 일어난 하나의 해프닝 정도라고 강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때 답답할 뿐입니다.
그러면 본문이 말씀하는 악은 어떤 관점에서 본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악하다는 것입니다.
왕상 16:30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이 말씀은 북왕국 아합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가장 악을 행한 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말씀입니다. 아합이 악한 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일반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아합은 다르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아합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제 7대 왕입니다. 그는 통치 기간 중에 가장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했습니다. 모압에게 조공을 받고, 남왕국 유다와 화친 정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군사적으로는 경제적으로 태평성대를 이룬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돈의 왕이요 바알 제사장인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지독한 우상숭배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수없이 박해했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보란 듯이 어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악한 왕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때가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시대가 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말해줍니다. 나아가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워졌음을 암시해 줍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떨까요? 2016년 발표된 한국인의 종교통계 조사 보고를 보면, 비종교인구가 처음으로 50%를 넘었습니다. 그리고 한 종교통계를 보면 근자에 우리나라에 무신론자가 급증하여 세계 5위권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 시대의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이나 미디어의 성향을 봐도 반기독교적 성향이 점점 심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부의 정책을 봐도 친기독교적 성향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도 점차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가 힘들어지고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오늘 우리 사회를 종합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점점 악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가 점점 악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가고 있고, 점점 말세가 가까워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종합해 보겠습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에 세월을 아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세월을 아끼는 방법도 분명해 집니다.
우선 소극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지 않게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붙잡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회라고 생각해서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 때 그 일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만일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고 생각이 된다면 중단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적극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선용하되,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하려고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어진 기회를 사용하려고 할 때, 할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하려고 해야 합니다. 이 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이 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산되게 해야 합니다. 이 일로 복음의 열매가 맺혀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 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 해가 저물고 새 해가 밝아오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나는 이 세월을 그냥 덧없이 흘려보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할 수 있으면 이 세월을 기회로 삼으려 해야 하겠습니다. 때가 악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 세월을 기회로 삼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지 않게 해야 하겠습니다. 할 수 있으면 이 세월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실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더욱 세월을 아끼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