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폭풍 속에서 정말로 필요한

(마태복음 8:23-27)

 

 

1.   인생의 바다

 

흔히 인생을 바다로 많이 비유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일어난 사건은 막연히 그들이 풍랑 속에서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기록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인생 항로를 건너갈 경험할 있는 일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원래 호수인데, 히브리어에는 ‘호수’라는 말이 없고 ‘큰 물’이라는 단어만 있기 때문에 ‘바다’라고 쓰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언제 어디서 폭풍이 불어 닥칠지 전혀 예측할 없는 이상한 바다입니다. 아무 조짐도 없다가 갑자기 폭풍이 불어옵니다. 마치 인생과도 같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요즘 많이 부는 토네이도들, 보스턴 마라톤 테러 사건, 코네티컷의 샌디훅 초등학교 총격사건, 9.11 사태 ,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바다는 불안과 공포를 안고 있습니다. 잔잔한 바닷길을 순풍에 달고 힘차게 달려가면서도 선원들의 마음속에는 ‘언제 폭풍이 불어 닥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과 불안을 안고 있습니다. 이처럼 현재 우리의 생활이 편안하고 별다른 어려움이 없어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 구석에는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우리 어떤 분들은 이미 갈릴리 바다의 제자들처럼 폭풍을 만나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가지 분명한 점은, 우리 모두가 인생의 바다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가지는, 바다의 풍랑에 시달리며 멀미를 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모르겠다는 답뿐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3:16)라고 말씀하셨는데, 고해와 같은 인생 바다에 당신의 자녀들을 던져놓으시고 건너가라 하십니까?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3-24)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갑니다. 이것을 봐야 합니다. 분명히 예수님과 함께 건너가는 바닷길에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건너가면 강하게 불어오던 풍랑도 잔잔해져야지,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길에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죽을 위기를 당하는지 얼른 이해가 갑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불행했던 삶이 행복해지고 인생의 고통이 평안으로 바뀐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인생길에 오히려 어려운 일들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더욱이 본문에서 이상한 것은,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물을 퍼내며 비명을 지르고 아우성을 치는데, 예수님은 마치 그것을 전혀 모르시는 주무시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이것도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들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해고, 파산, 사업 실패,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많습니다. 정말 우리 인생은 앞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어려움을 당하여 몸부림을 마치 하나님은 무관심하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을 바꾸어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어두운 절망의 골짜기로 빠져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시는 같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렇게 되는지 솔직히 수가 없습니다. 사실 인생의 모든 사건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요구한다면, 약간의 대답은 얻을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온전한 진리는 없습니다.

 

욥이 불행을 당하여 고통 중에 있을 그의 친구 사람이 찾아와서 위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욥의 어려운 형편에 대해 각자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전부 잘못된 생각뿐이었고, 하나님은 나중에 그들을 향해 진노하십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완전히 아는 것처럼 떠든 그들에게 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할 때마다 이것이 이런지 인간적인 설명을 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수가 없고 오히려 점점 미궁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불행과 행복이 함께 공존하고, 의와 불의가 함께 병행하는 땅의 상황을 우리는 우리의 짧은 지식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지구 쪽에서는 양식이 너무 남아서 버리는데, 다른 쪽에서는 하루에 끼도 먹지 못하여 사람들이 기아 상태에서 처참히 죽어가는 현실의 모순을 우리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서 설명하려고 해서는 됩니다. 그것은 경솔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절대로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2.   세상의 빛이 되신 예수

 

그런데 오늘 본문은 사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서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폭풍을 만난 그들에게 예수라는 분이 어떤 의미를 가진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만이 인생의 신비와 모든 미스터리들을 밝혀줄 있으신 세상의 유일한 빛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풍랑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이와 같은 고생을 하는가에 대해서 침묵하십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바로 그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 함께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 안에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동행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시고 동행해주십니다. 우리의 인생 항로에 동행하고 계십니다. 떠나는 적이 없으십니다.

 

 

2)  예수님은 풍랑 속에서 조용히 주무시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인생의 풍랑을 만나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엄청난 풍랑이 결코 예수님의 평안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모시고 인생의 바다를 건너가는 사람은 어떤 일을 만나든지 예수님처럼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남태평양을 여행할 갑자기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잠깐 지나가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갈수록 배는 무섭게 흔들리고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는 참다못해 갑판으로 올라가서 선장을 찾아 갔습니다. 선장에게 상황을 물어보려고 갔더니 선장의 얼굴을 보는 순간 공포가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선장의 얼굴은 너무나 평안했고 미소까지 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객실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선장의 얼굴을 보았는데, 염려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전혀 염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바다에 풍랑은 자주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뱃전에서 평안한 모습으로 주무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3)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풍랑을 잔잔케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시간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의 인생을 마구 흔들어 놓는 폭풍과 풍랑 가운데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가지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처리하시는, 능력의 주님이 필요한 것이지, 어떤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모릅니다. 그래서 설명을 요구하고 어떤 해명을 요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음에 답하려고 많은 책들을 썼고, 많은 말들을 했고, 많은 종교를 만들어냈고, 많은 논문들도 썼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이렇다 답변은 아무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것인 ,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바로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모시느냐 모시지 못하느냐에 따라 인생 항로가 결정됩니다. 태평양과 같은 바다를 건널 선장이 어떤 사람인가를 바로 알면 다른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폭풍이 언제 불어올지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몰라도 됩니다.

 

인생의 신비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분에게 모든 해답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생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왜(Why)?”가 아니라 “누구(Who)?”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점점 암담한 처지에 빠지게 되고, 나중에는 되는대로 살아보자고 자포자기 하는 식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3.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믿음

 

이제 예수님이 중요하다는 것을 마음에 간직했으면 제자들처럼 해보기 원합니다. 제자들이 폭풍을 만났을 처음에는 자기들의 지혜와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계에 부닥친 것을 알았습니다. 없이 그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26)

 

그런데 이것은 책망이 아닙니다. 야단을 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에도 똑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책망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적은 믿음’이라는 말은 제자들의 믿음이 적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그들이 적은 믿음이나마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3 동안의 사역을 통해 소위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것도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번째는 로마 백부장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 8:10)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하인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주님은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셨지만, 백부장은 “주님, 직접 집에 오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저도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갑니다. 주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입니다. 그의 믿음에 예수님이 놀라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번째는 가나안(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여인이 찾아와 예수님께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하시며 매몰차게 거절하셨습니다. 그때 여자는 “주님,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래 있는 개들도 자녀의 손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삽니다.”라고 하며 자신을 낮추자 예수님이 칭찬하신 것입니다.

 

여자야 믿음이 크도다. 소원대로 되리라.” ( 15:28)

 

예수님께서 땅에 계시는 동안 좋은 믿음, 믿음은 밖에 보셨고 나머지는 적은 믿음들이었습니다. 믿음은 금과 같습니다. 양이 적든 많든 금은 금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 크고 적음에 상관없이 믿음입니다. 적은 믿음이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이라도 분명히 믿음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실 크지 못합니다. 적은 믿음에는 불순물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신 다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신 것을 보면 제자들의 믿음에는 공포와 불안과 염려라는 불순물이 들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의심이라는 불순물이 끼어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 믿음은 그렇게 적은 믿음입니다.

 

미국에서 치유 사역으로 유명한 목사님 오럴 로버츠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오클라호마에 오럴 로버츠 대학교도 있습니다. 그분이 설교 도중에 눈이 마주치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오늘 사람을 고치시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오라고 하고 기도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혹시 낫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합니다.

 

사람이 완전한 믿음을 가질 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의심도 있고 공포와 불안과 염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든 믿음은 적은 믿음이지 믿음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적은 믿음’은 어떤 믿음을 말합니까? 예수님을 깨운 믿음입니다.

 

믿음이 정말 있다면 위기 상황에서 주님을 깨울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르짖자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바다를 잔잔케 해주십니다. 그때 제자들은 “기이히” 여겼는데 말은 ‘감탄했다’는 뜻입니다. 적은 믿음이라도 바로 사용해서 나아가는 자에게 주님은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적은 믿음’도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인생의 폭풍이 불어 풍랑이 몰아쳐도 주님께 부르짖지 않습니다. 기도를 합니다. 그냥 가만히 있거나 나름대로 해보려고 애쓰거나 하지, 주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적은 것이 아니라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믿음이 얼마나 적습니까. 그런데 인생을 살면서 지금까지 어려운 고비들을 넘길 있었던 것은 입니까? 적은 믿음이라도 간절히 주님께 외쳤을 주님께서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위기가 닥쳤을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 모든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불치병에 걸리든지 어떤 불행한 일이 닥쳤을 신앙인은 일단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돈이 없어지거나, 사업에 실패하거나,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사랑하는 이가 먼저 세상을 떠나거나,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유를 달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그렇게 어려움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생의 인도자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하나님은 거기에 선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이상 하나님의 섭리가 거기에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역경을 당할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은 세상적인 표현으로 ‘재수 없는 인간’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면 그분의 모든 계획과 섭리 아래서 현재의 사건들은 그분의 역사하심 아래 의미를 갖게 되고 우리는 뜻을 깨달을 있습니다.

 

셋째, 전적으로 주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병에 걸린 것도, 재산을 잃은 것도, 모두 하나님께 맡기며 나아가는 겁니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은 인격자이신 예수님을 우리 인생 항로에 모시고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나가는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 제자들과 같습니다. 풍랑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의 평안한 얼굴을 보십시오. 우리도 그렇게 있습니다. 너무나 힘들 그분을 깨워 그분의 도우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든지, 아니면 우리로 하여금 풍랑 속에서도 찬양할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어디 가서나 주님의 존재를 믿을 있고,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하고, 항상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있는 적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결코 인생이 미스터리의 연속이 아닙니다. 얼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풍랑 속에서도 하늘 위에 빛나는 별을 세며 내일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