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의 찬양, 마라의 원망”
(출애굽기 15:22-27)
1. 홍해의 기적
저번에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의 위기에서 인도해주셨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막고 있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쫓아오는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홍해를 가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는 기적을 일으켜주십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바다를 친히 갈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하나님이 갈라놓으신 바닷길을 건너갔습니다. 그 길은 애굽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하며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는 홍해의 체험을 세례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보호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고전 10:1-2)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자기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 앞에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다시는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며 세상으로 되돌아 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홍해의 사건은 신자의 세례와 의미가 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통과한 후에 체험한 기쁨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받고 한없이 기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 홍해 바다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옛 사람은 죽고 다시 태어난 새 사람입니다. 홍해를 건너기 전과 건넌 후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 우리는 애굽에서 종노릇했던 사람들입니다. 죄악 속에서 쾌락을 누리며 그 속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옛 사람은 장사되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누구나 이런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된 것을 감격해 하며 열매를 맺는데 반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되었어도 전혀 그와 같은 감격과 체험이 없는 것을 봅니다. 정말로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의 자녀 된 것에 대한 기쁨과 감격과 감사가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왜 홍해를 건넌 기쁨과 감격을 맛보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까?
첫째,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불신이 그 마음에 찌꺼기처럼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건너라고 했지만 ‘중간에 가다가 물이 다시 덮이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며 불안에 떠는 사람이 있었다면, 의심하지 않고 바다를 건넌 사람들의 기쁨을 맛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불신앙의 차꼬에 묶여 있는 신자의 마음에는 구원의 기쁨이 찾아오지 못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축복이 얼마나 큰지 잘 깨닫지 못합니다.
셋째,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교회 밖에만 나가면 그 삶의 기준이 안 믿는 사람과 같습니다. 예배드릴 때는 분명 믿는 사람이지만 삶의 결정들을 내릴 때는 별로 구분이 안 됩니다.
자신의 신앙 상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로서의 감격과 감사와 확신이 있습니까? 홍해를 건너와서 기뻐 춤을 추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기쁨이 있습니까?
2. 마라의 쓴 물과 엘림의 물샘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생활한 광야는 사하라 사막과 같은 모래밭이 아니라, 목축이 약간 가능하면서도 황량한 벌판이었습니다. 나무도 없고 그늘도 없는 곳으로, 낮에는 더위가 심하고, 밤에는 온도가 뚝 떨어져 추위를 견디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그래도 첫 날은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기쁨에 기분이 좋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다음 날은 아무리 걸어도 물 한 방울 없는 광야길이 계속됩니다. 점점 마음에 불안이 쌓이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는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2절)
기후가 좋은 땅에서 3일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과, 사막 길에서 3일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은 상당히 다릅니다. 사막에서 가장 힘든 것이 갈증입니다. 이스라엘은 장정만 60만 명이었으니까,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합치면 300만 명 정도가 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무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이 3일 동안 물이 없는 상황에서 행진해나가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특히 어린아이들이 물을 달라고, 죽겠다고 소리치며 쓰러질 때 부모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아무리 구름기둥이 낮에 보호해주고 있었어도 3일 동안 물이 없이 가야 하기 때문에, 하늘에는 시체를 찾는 독수리들이 날고 있었을 것이고,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의 입술은 까맣게 타고 갈라지며 혀는 부풀어 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럽게 울었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말 막막할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3일 동안 물이 없이 고생하고 헤매다가 어떤 곳에 도착해 보니, 드디어 거기에 그들이 그토록 찾던 물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너무나 흥분되고 신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쁨은 곧 실망으로 바뀝니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3절)
마라의 물이 너무나 써서 한 모금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마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쓰다’는 뜻입니다. 마실 물이 없는 것도 괴롭지만, 이제 물이 있다고 좋아했다가 마시지 못하는 물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더욱 괴롭고 화가 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원망을 합니다.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4절)
우리는 3일 동안 물이 없는 상황이나, 드디어 물을 찾았지만 마라의 쓴 물 같이 도움이 안 되는 환경을 만나게 되면, 그런 상황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마라를 지나고 난 후에 엘림을 만납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27절)
그런데 마라와 엘림은 불과 5마일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입니다. 그러니까 어른들의 걸음으로 두 시간 정도만 걸어가면 되는 가까운 거리라는 것입니다. 불과 5마일 거리, 두 시간 거리에 엘림이 있는데도 이스라엘은 그것을 전혀 모른 채, 그리고 전혀 기대하지도 못한 채, 좌절과 원망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실 수 없을 정도로 쓴 물 때문에 원망하게 된 것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이 풍부한 이집트 땅에서 살다가 이제 물이 없는 광야로 나왔기 때문에,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 익숙하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원망은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얼마가 불평한 것과 같이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파멸시키는 이에게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본보기가 되게 하려는 것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고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전 10:10-11)
여기서 “그들”은 바로 이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원망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쓴 물이 쓴 마음으로 변하고 쓴 뿌리로 변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15장은 1절부터 오늘 본문 바로 앞부분인 21절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갈라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은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너고 난 뒤, 온 민족이 함께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우렁찬 찬송을 올려드렸습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1-2절)
이 얼마나 엄청나고 놀라운 찬송이며 얼마나 굉장한 장면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이 찬양을 드리는 동안 자기들이 완전히 믿음의 백성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하며 벅찬 마음으로 이 찬송을 올려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찬양과 경배를 드린 그때부터 3일 동안 물을 얻지 못하자, 그 좋던 신앙, 그 엄청난 찬송을 올려드리던 믿음을 다 까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그들의 신앙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였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잘 돌아가고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을 때에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하고 외쳤지만, 약간의 어려움을 당하니까 “나 죽겠네. 왜 여기 데려와서 우리를 죽이냐?”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래서 망했습니다.
결국 40년 광야생활을 통과한 사람은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1세대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 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광야에서 그렇게 다 망했습니까? 그들이 입술로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망하는 소리를 듣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확실히 망하는 법이 여기 있습니다. 원망하면 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면 망해도 아주 확실하게 망합니다. 말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건넌 기쁨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 없는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점에 있어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부분이 있습니다. 모세는 그의 인생의 절정기인 40세부터 40년간을 광야에서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힘이 다 빠질 만한 때인 80세에 부르셔서 그 다음 40년을 쓰신 사실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황금기에 쓰시는 게 좋지, 왜 다 힘이 빠지고 기운이 없는 때에 들어서 쓰십니까?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힘으로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한다고 생각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내다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광야로 인도하여 시련을 당하게 하시고, 그 뒤에 오는 더 큰 축복을 받도록 준비시켜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괴로워하며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십니까?
첫째, 광야의 시련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무가치한가를 발견하게 해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체험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광야와 같은 시련이 없이는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홍해를 건너오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녀인 우리를 아무렇게나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시고, 가장 지혜로우신 선생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행복을 위한 도피처나 성공을 위한 지름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교회를 정할 때도 어떻습니까? 내가 섬기고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교회가 아니라, 나에게 내 가정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 있는 교회인가를 보고, 자기만족이라는 기준에 따라 교회를 선택합니다. 물론 좋은 교회를 다니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거꾸로 되면 결코 행복을 얻지 못합니다. 이 순서가 바로 된 사람만이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끌어오거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진정한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자신을 드리는 사람만이 기쁨을 압니다.
섬기는 것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도들을 영적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져서 하니까 하는 식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성도 개인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하나님께서는 광야라는 것을 허락하셔서 자기 유익만 찾는 성도와 교회를 부수시고 그 다음에 다시 세우십니다. 그런 뒤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축복을 누리도록 하십니다. 우리의 욕심이 깨어지기 전에는 은혜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3. 마라가 엘림보다 낫다
엘림으로 가기 전 마라에서 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5절)
19세기 최고의 설교자라고 꼽히는 사람이 있는데, 찰스 스펄젼(Charles Spurgeon)입니다. 그가 한 설교 중에서 “마라는 엘림보다 낫다”는 설교가 있었습니다. 그 설교를 할 당시에 스펄전은 말에서 떨어져 몹시 아프고 괴로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잘 아는 사람이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이제 마라에 왔군요.” “예, 물맛이 참으로 씁니다.” “그러나 마라가 엘림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엘림에는 물이 있고 열매들도 있지만, 물을 마시고 열매들을 먹고 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마라에서는 하나님께서 법도와 율례를 주셨는데, 이 법도와 율례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난 후 스펄전은 감동을 받고서, 그 설교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마라에 대한 기록은 23-26절에 걸쳐 있는데 비해, 엘림에 대한 것은 27절 한 절 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마라에서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말씀을 주셨습니다(25). 그리고 새로운 약속도 주셨습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26절)
그래서 마라가 엘림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습니다.” (시 119:71)
우리는 마라와 같은 환경을 만날 때 이 마라가 결코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다음에는 엘림이 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마라에 처해 있는 동안 마라가 엘림보다 더 낫다는 사실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라는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복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25절을 다시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이 힘든 상황에서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으니까 하나님이 역사해주십니다. 이것을 잘 보십시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하고 불평할 때 그들에게 반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었습니다. 간절히 외치며 기도했습니다.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즉시 응답을 해주신 것입니다.
조금 전에는 다른 사람을 향해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자고 했는데, 혹시 다른 사람이 자신을 향해 원망이나 불평을 하는 것이 들립니까? 그때 우리가 할 일은 그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억울할 수 있지만 억울하다고 같이 붙어 싸우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분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분통을 터뜨리고 비난을 한다고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도리어 더 우스운 사람이 되고 맙니다.
억울하고 답답할수록 오히려 하나님께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직접 해결해주십니다. 쓴물을 단 물로 바꾸어주시고, 원망과 불평을 하는 자들을 주님이 직접 처리해주십니다. 내가 처리하려고 하면 일이 더 꼬입니다. 주님께 맡기면 해결됩니다.
마라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개입해주셨습니다. 즉 “한 나무를 지시”하시고 그것을 물에 던져 넣으니 물이 달게 변합니다. 플로리다(Florida)나 남미나 인도에는, 쓴물에 던지면 물이 달게 되는 나무들이 실제로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라에는 그런 나무가 없었습니다. 쓴물을 달게 하는 나무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기 계셨습니다. 쓴물을 달게 한 것은 나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마라의 쓴물을 단 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법도와 율례를 주시고, 그것을 듣고 그대로 지켜 행하라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셔서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의 쓴 물을 단 물로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가는 말]
지금 마라와 같이 쓴물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삶이 피곤하고 지친 상태입니까? 마라가 있으면 엘림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옵니다. 곧 옵니다. 또한 힘들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면 망한다는 사실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비록 쓴물이 있는 마라이지만 오히려 엘림보다 더 낫다는 사실, 그러니까 마라의 쓴물을 통해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난이나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어려움 중에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영적 무지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시련의 연속인 광야 생활인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늘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지금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어떤 것보다 크신 분이 함께 하시는데 두려워하는 것이 이상한 것 아닙니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 23:10)
불같은 시련 뒤에는 아름다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홍해의 찬양 후에 마라의 원망을 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기 원합니다. 그리고 혹시 지금 마라의 시련을 겪고 있더라도 엘림의 축복을 바라보며 치유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매일 한 걸음 한 걸음 순종의 길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