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지만 아름다운 노래

 

삼하 1:17-27

 

   모차르트가 작곡한 ‘레퀴엠’(Requiem)은 가장 유명한 조가(弔歌)로 손꼽힙니다. 이 레퀴엠 중의 한 부분인 ‘라크리모사’ (Lacrimosa)는 그 중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데, 오늘도 수많은 장례식이나 추모식에 연주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 곡을 가장 감동적으로 들었던 것은 모차르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아마데우스’에서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 모차르트의 죽음과 장례 과정입니다. 음산하고 슬픈 광경이 영화장면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 배경음악으로 이 라크리모사가 흘러나왔습니다. 큰 슬픔이 이 음악과 함께 고조됩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 음악 때문에 눈물은 이내 절제되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곡을 들으면서, ‘눈물의 날’이라는 그 뜻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슬프지만, 그 슬픔을 노래로 승화하여 아름다움으로 빚어낸 음악의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큰 감동 때문에 이 라크리모사라는 곡을 ‘슬프지만 아름다운 곡’으로 두고두고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가 이 라크리모사라는 곡이 떠올랐습니다. 본문도 지인들이 죽어서 그 슬픔을 표현한 시요,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깊이 묵상해 보면, 이 노래는 단지 죽음에 대한 슬픔만을 표현한 노래가 아닙니다. 슬픔과 아울러 지인들의 죽음의 의미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인들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노래를 ‘슬프지만 아름다운 노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선 이 노래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들어왔을 때 이스라엘이 크게 패했습니다. 이 때 사울 왕과 요나단이 길보아 산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본문 17-18절을 보면,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크게 슬퍼하며 조가를 지어 불렀습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에게 이 조가를 가르쳐서 부르게 했습니다. 자기뿐 아니라 유다 백성들 모두 이 조가로 두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을 보면, 이 조가를 ‘활 노래’라고 했습니다. 조가 가운데 요나단의 활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삼상 20:18이하를 보면 요나단이 활 솜씨가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특히 요나단을 추모하며 이 조가를 불렀기 때문에 활 노래라고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이제 이 슬프지만 아름다운 노래를 살펴보겠습니다.

 

큰 슬픔의 노래

   본문 26절을 보면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 하였도다”

   여기서 다윗은 요나단의 죽음 때문에 애통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어성경을 보면 애통이라고 번역한 말이 ‘차르’(צר)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우리 성경에서는 ‘애통’(哀痛)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슬플 ‘애’(哀)와 아플 ‘통’(痛)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아프도록 슬프다는 뜻입니다. 정확한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죽음 때문에 그저 슬픔을 느끼는 정도가 아닙니다. 너무 슬퍼서 가슴이 아프고,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큰 슬픔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요나단의 죽음을 이토록 슬퍼한 것일까요? 먼저 다윗이 요나단을 “내 형!”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요나단은 다윗과 피를 나눈 친형제는 아닙니다.

   삼상 18:3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사건이후 요나단이 다윗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의형제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보다 적어도 15세 이상 나이가 많은 요나단을 형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의형제는 아주 특별한 관계입니다. 서로 피를 나눈 형제들이 있음에도 새로운 형제관계를 맺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의형제들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맺은 형제서약을 평생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진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부부관계보다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다윗이 내 형이라고 부르면 애통해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다윗이 자신의 친형제보다도 그리고 자신의 아내보다도 더 의지하고 따랐던 의형제 요나단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 하였도다”라고 노래한 것에서 또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볼 때 요나단이 자기를 사랑한 것이 연인 사이의 사랑보다 더했다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못지않게 요나단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요나단을 믿고 따르며 의지했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털어놓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실제로 다윗을 마음을 다해 도왔습니다. 아버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몇 차례 다윗을 도왔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에게 요나단은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요나단의 죽음을 그토록 애통해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그 누구보다도 자기를 사랑했던 요나단, 그 누구보다도 자기가 의지하고 따랐던 요나단이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윗이 참 부러웠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토록 애통해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고, 그 슬픈 마음을 이토록 가슴시린 노래로 만들어 부를 수 있다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그토록 뜨겁게 사랑할 수 있고, 슬플 때 울 수 있고, 시를 짓고 노래를 만들어 부를 수 있는 그 순수하고 맑은 감성이 부러웠습니다.

 

  여러해 전에 바바라 월터스가 진행하는 미국 ABC 방송의 대담프로그램에 한 미군사령관이 출연했습니다. 이라크 전을 승리로 이끌고 개선한 사령관이었습니다. 진행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국민들은 당신을 폭풍의 장군이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령관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가슴이 따뜻한 남자입니다.“ 방청객들이 한바탕 웃음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이어서 진행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늘 미국의 가장 큰 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령관이 뜻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은 이라크와 같은 외부의 적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눈물 없는 남자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옳은 지적입니다. 사람들이 점점 눈물을 잃어버립니다. 너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줄 모르고, 너의 슬픔에 함께 눈물을 흘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해 마음이 식어갑니다. 그래서 공동체는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외부의 적들 때문에 생기는 위기보다 더 심각한 위기입니다.

   마 11:17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예수님께서 당시 세상 사람들을 보시면서 탄식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보다 더 심각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이 메말라버렸습니다. 눈물도 메말라 버렸습니다. 사랑해야 할 때 제대로 사랑할 줄 모릅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합니다. 무덤덤하고 삭막하게 굳어진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정말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만져주셔서 싸늘하게 식은 마음을 따뜻한 마음으로 바꿔주시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슬플 때 애통할 줄 알고,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노래

   오늘 본문의 이 노래는 여느 조가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점을 보여줍니다.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사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에 세 차례나 반복해서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라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 용사는 사울과 요나단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사울의 죽음과 요나단의 죽음을 똑같이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적이요,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한 것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이후부터입니다. 사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이고 블레셋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은 나라의 왕으로서 다윗에게 큰 상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후 백성들이 자기보다 다윗을 높이자 시기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다윗을 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면서 자기 왕권이 걱정됐을 것입니다.

   이후 사울은 본격적으로 다윗을 죽이러들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직접 다윗에게 창을 두 차례나 던졌습니다. 다윗이 피하자 시기는 미움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3000명의 군사를 풀어서 다윗을 체포하라고 명했습니다. 또 실패하자 자기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추격에 나섭니다. 오죽하면 다윗이 적국인 블레셋으로 망명을 했겠습니까?

   다윗은 이렇게 10년이 넘는 세월을 도망자요 망명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사울이 살아있는 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없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는 신세가 됐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도망자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됐습니다. 드디어 왕좌에 오를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의 죽음 소식은 기뻐할 일이지 슬퍼할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24절을 보면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여인들에게 함께 슬퍼하자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처음에 다윗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토록 자기를 괴롭히고 죽이려 했던 사울, 자기에게 10년여 세월을 도망자 생활을 하게 했던 사울, 적이요 원수였던 사울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는가? 아니 어떻게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부어도 시원치 않을 그런 사람을 높이고 칭찬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왜 다윗을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하셨는지를 이해하게 됐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도 깨닫게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저는 이 부분에서 이 노래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됐습니다. 슬퍼할 수없는 사람을 위해 슬퍼하는 노래이고, 미움을 사랑으로 승화한 노래이고, 이 세상 사람들이 부르기 힘들고 오직 주님 닮은 사람들만 부를 수 있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인터넷에서 한 사진을 보고 부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바바라 부시 여사의 장례식에 참석한 전직 미국 대통령부부와 현직 대통령 부인이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이 사진에는 백인이 5명, 흑인이 1명, 혼혈인이 1명, 그리고 이민자 1명(멜라니여사)이 보입니다. 그리고 둘은 공화당 또 둘은 민주당 전직 대통령입니다. 서로 치열하게 정적으로 싸우던 사람들입니다. 때론 험담하고 비리를 폭로하고, 그래서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싸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 슬픔 앞에 함께 모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애도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언제나 이런 일이 있을까요? 전직 대통령치고 제대로 인정받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한번 적은 끝까지 적으로 남아서 원수처럼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장면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다윗처럼 원수도 사랑하고, 원수의 불행에 함께 울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를 따뜻한 공동체로 만들고, 우리 사회를 하나로 엮어내는 일에 앞장 서야 하겠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저들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기뻐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이스라엘 백성이 알리지 않는다고 알려지지 않을까요? 사실은 다윗이 이 두 사람의 죽음을 알기 전에 블레셋 사람들이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삼상 31장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신을 알아보고 벧산 성벽에 못 박아 놓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이렇게 노래하고 있을까요? 사울이 죽은 것도 슬프지만 사울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것을 더 슬퍼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으면 사울의 죽음이 덜 알려져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것을 막았으면 하는 바람을 이렇게 노래한 것입니다.

   사실 사울의 죽음이 알려지는 것이 다윗에게는 나쁠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게 되면 본격적으로 자기를 주목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자기가 왕이 되는 일에 유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죽음을 알게 되면, 다음 왕이 다윗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노래에서 이 부분의 위치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것을 슬퍼하면서 제일 먼저 이 사실이 블레셋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생각 속에는 늘 하나님의 영광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마 6:33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지금 다윗의 모습은 바로 이 말씀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내가 다윗이었다면 이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마도 저는 사울이 죽은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기도하던 것이 드디어 응답되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자기를 왕으로 세우시기 위해 역사하실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왕이 되는 과정에 어려움이 없게 해달라고, 왕이 된 다음에 왕 노릇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질 것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이 노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했던 것처럼,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사가 잘 될 때는 물론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힘쓰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