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다스리고 승리하는 인생 2

숨어 있는 분노의 문제를 해결하라

(창세기 16:1-6)

 

1.   그리스도인의 분노

 

한국의 어느 교회에 여자 집사님이 있었는데, 아주 교양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크리스천이었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다니는 회사 사장님 집에 가서 사모님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집에서 패물을 잃어버렸고, 집사님이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사모님은 오히려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며 집사님에게 보상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집사님은 너무나 억울하고 분했지만, 참으며 주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기도드렸습니다. 기도를 다음에는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욕을 먹었습니다. 다시 기도하고 찾아갔는데, 욕을 먹었습니다. 차츰 집사님의 생활은 어두워져 갔습니다.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가슴은 답답하고 식욕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 집사님의 어린 딸이 사장님 집에 놀러갔는데, 집에선 도둑의 딸이 왔다고 쫓아내 버렸습니다. 자기에 대한 것은 참았지만 아이에게 그러니까 집사님은 이상 참을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 동안 마음속에 응어리진 분노를 쏟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음의 답답하던 것이 내려가는 같았고, 잠도 잤습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서 끝까지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는 죄책감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집사님의 경우와 같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분노와 이에 얽힌 갈등을 봅니다. 크리스천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중의 하나는 완전주의의 환상입니다. 자신은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할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환상을 말합니다. 크리스천은 화를 내서는 되며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착해지기보다는, 증오와 질투와 분노를 쏟아낼 상황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이상과 현실간의 갈등이 생기고, 거기서 강박적인 억지행동이 나옵니다. 자신이 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죄악감을 느끼고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끓고 있는 분노는 숨기고 억지사랑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조금 집사님의 경우, 상대방은 오해로 인해 무척 화가 있는데, 집사님은 상대방의 심리나 형편은 무시하고 자기 바만 다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사랑의 대화를 강요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이 사장 부인에게는 뻔뻔한 여자로 보였던 것이고, 이것은 사장 부인이 집사님을 공격하는 악순환을 만들었습니다. 결과 집사님은 우울해졌습니다.

 

저도 가끔 그럴 때가 있는데, 목사라서 못하는 것이 있고 목사라서 해야 것이 있습니다. 분노와는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저도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저번 여름에 LA 가서 택시를 탔는데 택시를 불러준 분이 제가 목사라고 이야기를 모양입니다. 그래서 기사 분이 자꾸 “목사님, 목사님” 하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손님들도 종류가 많다고 하며, 팁도 주고 내리는 나쁜 손님들이 많다고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계속 저에게 “목사님, 목사님”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어쩔 없이(?) 내릴 팁을 보통 보다 배로 주고 내렸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갖고 있는 환상이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화를 내서는 되고 언제나 웃어야 한다는 환상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풀지 못한 분노가 마음속에 아직 살아 있습니다. 분노가 숨어 있게 것입니다. 분노가 속으로 쌓이고 상상 속에서 분노는 커집니다. 우울해지고 짜증이 많아지고, 혈압도 오르고 배탈도 잘납니다.

 

분노와 수명에 관한 흥미로운 논문이 있는데, 노스케롤라이나 대학교(UNC) 달스트롬(Grant Dahlstrom) 교수가 의대생 25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입니다. 그는 분노 점수가 높은 의대생과 낮은 의대생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25 , 이들이 모두 의사가 되어 있고 장년이 되었을 사망률을 조사했습니다. 놀랍게도 분노 점수가 높았던 학생들은 사망률이 7배나 높았습니다.

 

달스트롬 교수는 법대생 118명을 대상으로도 같은 조사를 했습니다. 재학생 분노 수치가 높았던 변호사들은 20% 50 이전에 사망했는데, 분노가 낮았던 변호사들은 4% 사망했습니다. 분노가 높은 사람들이 사망률도 높다는 것을 보여 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분노를 쌓아두면 되고, 분노는 풀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은 더욱 좋지 않습니다. 풀어야 하는 분노는 모든 종류의 분노가 아니라 마음속에 ‘숨어 있는 분노’입니다. 숨어 있는 분노, 드러내지 않고 쌓아 놓은 분노는 반드시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숨어 있는 분노를 어떻게 있습니까?

 

 

2.   분노는 누구나 가지는 감정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직 이름을 바꾸어주기 전이기 때문에 아브람과 사래로 나오지만, 편의상 아브라함과 사라로 부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사라에 대한 이야기를 창세기에서 읽어보면, 사라에게는 분명히 숨어 있는 분노가 있었다는 사실을 있습니다.

 

그녀의 남편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입니까?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믿음이 좋았으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고, 하나님도 그를 가리켜 ‘내 친구’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라는 어떻습니까? 믿음이 그렇게 좋은 남편과 살아서 행복할까요? 성경을 보면 사라가 행복해하는 곳은 별로 많지 않고, 오히려 남편 때문에 속상할 같은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 4:26-27)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화를 내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나면 정말 화를 내지 않습니까? 목사나 선교사는 화를 낼까요? 유명한 목회자들이나 가톨릭의 교황 같은 사람은 화를 내는 일이 하나도 없을까요? 교회 역사에서 ‘성자’라고 추앙 받은 사람들은 화를 번도 냈을까요?

 

이런 질문들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분을 내어도” 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화를 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분노하는 감정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도 분노하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에 ‘분노’라는 말이 450 나오는데, 375번은 하나님께서 내시는 분노에 관한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화를 많이 내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말을 듣지 않고 불순종만 합니다. 오죽 말을 들었으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 내가 땅에서 멸절시키겠다.”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의 자손들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밤하늘의 별처럼 없을 정도로 많게 해주겠다고 하셨는데, 약속을 취소시키려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분노하셨으면 그렇게 하려고 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끌어내며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모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 12:3)

 

구약의 다섯 권의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가리켜 ‘모세오경’이라고 부릅니다. 전통적으로 저자가 모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이 발전하면서 모세가 것이 아니라 모세의 영향을 받아서 사람이 정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증거라고 하는 중의 하나가 구절입니다. 모세가 썼다면 자기가 자기를 가리켜 ‘온유함이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습니다.

 

모세의 삶을 살펴보면 그는 사실 화를 내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화가 나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며 매를 맞는 것을 보고 분노하며 이집트 사람을 죽였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을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도 말은 들으면서 불평하고 요구하는 것은 많으니까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은 반석을 명하여 물이 나오면 마시게 하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너무 화가 나서 지팡이로 반석을 번이나 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온유함이 땅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하던 모세도 화를 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라가 가장 크게 분노를 아브라함에게 표현한 부분은 여종 하갈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을 때입니다. 사라의 말이 아주 과격합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5)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을 직접 공격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판단까지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심정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과 문제가 생겼을 , “당신이 옳은지, 내가 옳은지, 하나님이 판단해주시기를 원한다.”라고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라의 분노가 지나치다는 것을 느낄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동안 참고 있던 분노, 숨어 있던 분노가 여기서 폭발한 것입니다.

 

사라에게는 분노가 숨어 있었습니까? 너무 믿음이 좋은 남편과 살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믿음이 너무 좋으니까 화를 내야 화를 수가 없었습니다. 사라가 분노를 억눌러야 했던 순간들에 대한 힌트가 성경에 여러 나옵니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12:11-13)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가나안에 도착했을 기근이 들어서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갑니다. 그런데 거기서 아브라함은 사라가 너무 미모의 여인이라 이집트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사라를 빼앗아갈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누이라고 하자는 겁니다.

 

이처럼 낯선 곳에 가면 남편이 아내를 보살피고 보호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히려 사라를 방패로 삼아 자기가 살겠다고 하는, 요즘 말로 ‘찌질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때 사라의 말이 성경에 나와서 그렇지, 얼마나 실망하고 화도 났겠습니까.

 

번은 용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짓을 저지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은 그랄 땅에 갔을 똑같은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20:2)

 

나중에 그랄 아비멜렉이 사실을 알고서 아브라함을 불러 그랬느냐고 따집니다. 그러자 믿음 좋은 아브라함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20:11)

 

부부는 살다보면 싸울 수도 있습니다. 여기 싱글 청년들도 있는데, 서로 항상 사랑하며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미리 환상(?) 깨면 나중에 도움이 됩니다. 부부가 싸울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아닙니다. 어떻게 아내를 방패로 삼아 자기가 살겠다는 짓을 번이나 합니까? 자녀는 부모의 가르침을 듣고 배웁니까, 보고 배웁니까? 보고 배웁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도 똑같은 일을 저지릅니다. 그것도 같은 그랄에서 그럽니다.

 

그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26:7)

 

보고 배우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부모님들은 자녀 앞에서의 말과 행동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자녀가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내가 하는 대로 똑같이 따라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모습이 아니라, 신실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배우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는 사라가 아브라함이 그렇게 것에 대해 화를 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통해 사라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쌓이게 것입니다.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숨어 있는 분노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라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너그러운 성격이라도 분노가 있습니다. 겉으로 자주 드러내느냐 드러내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누구에게나 분노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3.   인간관계로 화가 나면 하나님께도 화가 난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부부 문제에 대해 거의 알려주는 것이 없습니다. 사실 남편 아브라함의 믿음은 정말 대단한 믿음입니다. 신약성경의 로마서와 야고보서에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할 정도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불가능을 믿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서 사라의 몸은 아기를 낳을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나이가 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알면서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굳세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 4:19-22, )

 

반면 사라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8:11-13)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못했습니다. 웃고 있습니다. 비웃은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께 웃지 않았다고 거짓말까지 합니다.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18:15)

 

사라는 남편과의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어렵게 것입니까? 그토록 믿음이 좋은 남편 아브라함에게 분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계의 문제가 생긴 가족을 치료할 보면 한쪽 배우자의 믿음이 좋을 이상하게도 다른 배우자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 좋은 배우자와 부부 싸움을 하고 나면 교회를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부 사이의 문제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조금 보았던 에베소서 4:27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번에 살펴보았던 가인도 아벨에 대해 분노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죄가 문에 도사리고 있으니 마음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분노가 오래 가면 영적으로 마귀의 공격을 받게 되고, 마귀에게 틈을 주게 됩니다. 그런데 가인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계속 분노하여 결국 살인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사라는 남편과의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힘들어졌습니까? 사실 사라는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깊은 영적 대화를 적이 없습니다. 남편을 통해서 들었던지 뒤에서 들었습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8:10)

 

아들을 주시겠다는 이런 복된 소식은 부부가 함께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막 뒤에서 이런 소식을 듣습니까? 그래서 사라는 남편에게 하나님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남편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을 주시겠다는 소식을 직접 들었다면 언제 태어날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남편의 믿음이 좋은 것은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정확히 응답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사라가 나서서 방법을 씁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2)

 

이런 아내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데, 남자는 들어야 듣고 고집 피우면서 이런 말은 듣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다고 했지만, 나를 통해서 준다고 하신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 여종을 통해서 아들을 낳아라.”고 했을 , 믿음의 사람으로서 아브라함은 “무슨 소리야! 절대 그럴 없어. 그런 방법을 쓰려고 .”라고 거절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4)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고 하질 않고 “그래? 그럴까, 그럼. 하고 말을 듣습니다. 사실 이때 사라에게 무슨 소리냐고, 그럴 없다고 하는 것이 사라가 아브라함에게서 진짜로 듣기 원했던 말일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생각이 남자들보다 복잡한 같습니다. 요즘 스마트폰 (app) 여자의 마음을 알려주는 앱까지 나와서 보니까, 정말 말과 생각이 다릅니다. 여자가 ‘아’라고 것이 사실은 ‘어’인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사라는 내심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기를 바랐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순히 그러겠다고 하면서 여종에게 들어가 결국 아들을 낳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칩니다. 아들은 이스마엘이고 사라의 아들은 이삭인데,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 족속과 이삭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아직도 갈등 중입니다. 여종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사라에게 서운함이 없었겠습니까? 남편에게도 서운하고 하나님께도 서운했던 겁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은혜로 9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십대 초반이 되었을 갑자기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갑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기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는 겁니다. 이때 사라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아니, 남편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하나님은 기껏 귀한 아들을 놓고는 이제 와서는 제물로 바치라고 하다니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는가? 이런 원망이 없었겠습니까? 남편과 하나님에게 굉장히 화가 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더욱 분노했을 것입니다. 사라의 숨어 있는 분노가 활활 불타올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부부 관계에 어려움이 생길 ,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어려움이 생길 , 그것이 하나님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까지 발전할 있습니다. 특히 상대방이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일 더욱 그렇게 됩니다. 사람에게 화가 것이 하나님에게까지 화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옵니다. 사람 사이의 문제가 영적인 문제로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 관계가 중요하고 인간관계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관계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라 안에 숨어 있던 분노와 같이 우리 안에도 숨어 있는 분노를 해결해야 합니다.

 

 

4.   숨어 있는 분노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렇다면 마음속에 꽉꽉 억누르고 억압하고 쌓아 놓은 분노, 숨어 있는 분노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있겠습니까?

 

오래 목회자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던 운동은 권투였습니다. 때리는 것을 투사함으로 스트레스를 풀었기 때문입니다. 주먹을 날리면서 목회에서 스트레스를 사람을 생각하며 때렸던 것입니다. 그러다 조금 시대가 지나면서 볼링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공을 굴려서 핀이 하고 맞아 쓰러질 때의 쾌감, 그것 역시 자기에게 괴로움을 안겨준 사람을 생각하며 그렇게 던진 것입니다.

 

시대가 흘러서 요즘은 골프가 인기입니다. 목회자만 아니라 여러분 중에도 골프를 아주 좋아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골프를 배우지 못했는데,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혹시 골프를 누군가를 생각하며 몽둥이로 공을 후려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에 골프가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래 1960년대에 '절규요법(Scream Therapy)'이라는 상담요법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인형이나 베개를 가지고 그것이 자신이 미워하는 상대라고 상상을 하면서 거기에 대고 악을 쓰며 분노를 드러내거나, 그것을 주먹으로 때리면서 분을 가라앉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분노를 표현할 분노가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커진다는 사실이 발견되어, 후로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분노를 그렇게 표현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구 때리고 화를 내면 당장은 마음이 시원해지는 같아도, 사실은 계속 남아 있습니다. 해결이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화가 난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분노라는 감정이 올라올 우리는 나를 화나게 어떤 사건(doing) 생각하지만, 실제로 화가 나는 것은 마음(being)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그렇게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풀기 위해서는 마음과 마음, 인격과 인격이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목장에서 지난주에 이런 일을 하고 저런 일이 있었다고 정보를 나누지 말고, 자신의 감정을 나누자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화가 났으면 화가 났다고 나누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목장식구들이 감싸주고 격려해주고 함께 기도하면서 치유가 됩니다. 감정을 나누지 않으면 치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지체가 나누는 것을 듣는 사람들은 함께 감싸주고 격려해주고 이해해주고, 그러면서 최고의 인격이신 하나님께 기도로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시편을 읽어 보면, 시를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로 하나님께 분노하는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어떻게 이런 성경에 있나 정도의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항상 끝날 때는 주님을 찬양한다고 하며 끝을 맺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분노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가지고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풀어놓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라와 같이 마음속에 숨어 있는 분노를 주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어느 찬양곡의 가사처럼, 정말로 마음을 만지시는 분은 오직 주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만 바라보며 그분께 나아갈 ,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분노가 해결되며 건강하고 아름답게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지게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