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함의 열망, 그 가치!
< 본문 - 빌립보서 1:20-21 >
20세기 초 미국 서부의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10살 정도인 남자 아이가 1달러를 손에 꼭 쥐고 거리에 있는 상점마다 들어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하나님을 파시나요?” 가게 주인들은 안 판다고 말하거나 혹은 아이가 장사를 방해한다고 생각해 매몰차게 내쫓기도 했습니다. 해가 점점 기울어져가고 있지만 아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69번째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역시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하나님을 파시나요?” 그 가게 주인은 60이 넘은 머리가 하얀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얘야, 하나님은 사서 무엇 하려고 그러니?” 자신에게 제대로 말을 걸어주는 사람을 처음 본 아이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고, 자신의 사연을 노인에게 털어놨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오래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삼촌이 돌봐주고 있는데, 얼마 전 삼촌마저 건축 현장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현재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촌을 치료하던 의사가 아이에게 ‘삼촌을 구해줄 것은 하나님 밖에 없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이는 의사가 해 준 그 말을 듣고는 하나님을 그 어떤 병도 고쳐주는 신기한 물건 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순진한 아이는 의사에게 자신이 하나님을 사 와서 삼촌에게 먹이겠다고, 그래서 반드시 삼촌을 낫게 하겠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사겠다고 1달러를 손에 들고 가게를 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노인은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돈은 얼마나 갖고 있니?” 아이는 자신의 손에 단 1달러 밖에 없었습니다. 부끄럽게 그 돈을 내미는 아이에게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침 잘 됐구나. 하나님은 딱 1달러거든.” 그리고는 아이에게서 돈을 받고선 가게 선반에 있던 ‘하나님의 키스’라는 음료수를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얘야! 여기 있단다. 이 ‘하나님’을 마시면 삼촌이 금방 나을 거야!” 아이는 할아버지가 건네준 음료수를 받아 품에 안고선 기뻐하면서 쏜살같이 병원으로 뛰어 갔습니다. 그리고는 병실에 들어가자마자 자랑스럽게 소리쳤습니다. “삼촌! 제가 하나님을 사 왔어요! 이제 곧 나으실 거예요!” 다음 날, 세계 최고의 의료전문가들이 전용비행기를 타고 이 작은 도시에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삼촌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와 삼촌의 상태를 진찰했습니다. 아이의 삼촌은 정말로 병이 금방 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퇴원할 때 받아든 치료비 고지서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삼촌의 진료비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는데, 그 금액을 모두 어떤 억만장자가 지불한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삼촌을 진료한 최고의 의료진도 그 억만장자가 고용한 사람들이고, 그 억만장자는 다름 아닌 조카아이가 1달러로 ‘하나님’이라는 음료수를 샀던 그 가게에서 만난 노인이었습니다. 억만장자인 노인은 할 일이 별로 없을 때 가게에서 적적한 시간을 보내고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삼촌은 퇴원 한 후 조카아이와 함께 아이가 음료수를 샀던 그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여행을 떠나고 없어 노인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가게를 지키고 있던 점원은 그들에게 노인의 도움을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는 말과 함께 노인이 쓴 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젊은이,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네. 사실 모든 비용은 자네의 조카가 다 낸 것이니 말일세. 자네에게 이런 기특한 조카가 있다는 것이 정말로 큰 축복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네. 자네를 위해서 1달러를 쥐고 온 거리를 누비며 하나님을 찾아다녔으니 말이야… 하나님에게 감사하게. 자네를 살린 건 그 분이니 말일세!”
여러분, 병들어 죽어가는 삼촌을 어떻게든지 살리겠다는 어린아이의 간절함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전 세계 경영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경영자라는 일본 교세라의 명예회장인 이나모리 가즈오(稲盛和夫)는 그의 책 『왜 일하는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간절하지 않으면 꿈꾸지 마라.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간절함은 분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막연한 간절함이 아닌 '반드시 이렇게 하고 싶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의지와 다짐이 분명한 간절함, 먹고 자는 것을 잊을 정도로 간절하게 바라면 어느 순간 불현듯 자기도 모르게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려 해도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간절한 열망이 우리로 놀라운 힘을 드러내게 만들고,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간절하면 하나님께서도 감동하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무언가에 대한 간절함이 있으면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상황을 초월하는 힘이 생깁니다. 간절함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그 간절함은 우리에게 무언가 열망이 있을 때 생겨납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한 나병환자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의 간절함과 그 열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신 후에 산에서 내려오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나병환자 한 사람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주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주님께는 내 병을 고치실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으로 내가 고통받고 있는 이 병을 고쳐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 나병환자의 환부에 손을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고, 그 나병환자는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나병환자가 자신의 병을 고침받고 싶은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그 지역에는 나병환자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병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많은 나병환자 가운데 마태복음 8장에서는 오직 한 사람만이 고침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왜 수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는데 오직 그 한 사람만이 고침을 받은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간절함의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나병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천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또 나병은 전염된다는 생각 때문에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자신이 살던 마을이나 도시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어도 그 집에 머물 수 없습니다. 그들만 격리 수용하는 곳에서 그들끼리만 어울려 살아야 합니다. 만일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에 가야 한다면 그들은 늘 긴장해야 했습니다. 나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그에게 다가오면 그는 사람들을 향하여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과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토록 그들은 사회적으로 격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나병에 걸린 사람이 자신이 나병환자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다가 발각되면 그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드는 그 때 예수님께로 온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겠다고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크게 외치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예수님 앞으로 나오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무도 몰래 예수님 가까이에까지 왔고, 예수님 앞에 와서야 예수님께 자신이 나병환자이니 자신을 깨끗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깨끗하게 해 주지 않으셨다면 그는 분명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으로 찾아나왔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과도 같습니다.
그 나병환자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게 그렇게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던 힘은 그 안에 있는 고침받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모두 고침받고 싶은 열망을 다 안고 살아갑니다.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인들 그 고통스러운 병을 끝까지 안고 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님 시대에 나병으로 인해 고통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 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고침을 받은 것입니까? 다른 나병환자들도 고침받고 싶은 열망은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망이 얼마나 간절했느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신의 나병을 고침받은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간절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가다가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어도 된다는 간절함이 그로 하여금 예수님께 찾아올 수 있게 만들었고, 그 간절한 열망이 결국 고침받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그런 간절함의 열망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열망을 갖고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것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렇게 간절하게 소망하는 것이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가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이루고 싶은 간절함 마음도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고 픈 간절한 마음’을 우리는 열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의 마음속에 간절한 열망은 무엇입니까? 취업을 앞둔 청년이나, 취업을 앞두고 있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의 마음에는 취업이 가장 큰 열망일 수도 있습니다. 결혼을 해야 할 청년들에게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 열망일 수 있습니다. 연로해 가시면서 몸이 연약해져 가는 부모님을 바라보는 자녀들의 마음에는 부모님이 남은 생애 강건하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가장 큰 열망일 수도 있습니다. 삶이 너무너무 힘들고 지쳐 있는 사람에게는 이 힘든 시기가 빨리 지나가고 남들처럼 행복한 웃음으로 웃는 그날이 속히 오는 것이 가장 강렬한 열망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 불화나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은 빨리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한 가정으로 회복되는 열망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하던 사업에 문제가 생겨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은 사업이 정상으로 회복되었으면 좋겠다는 열망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건강이 좋지 못한 분들은 건강의 회복이, 친구나 이웃과 관계가 불편한 사람은 좋은 관계로의 회복이 그들의 마음속에 큰 열망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갖는 그런 열망 말고 하나님을 향하여 갖는 신앙의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전혀 신앙적이지 않는 것들만 끌어안고 살거나,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만을 열망하며 산다면 우리 스스로 어찌 신앙인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인이라면 뭔가 신앙인다운 열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마음속에 있는 간절한 열망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본문 20절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사도 바울에게도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연로해지면서 몸은 점점 더 약해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몸이 몹시 약한 사람이었는데, 감옥에 갇히면서 더 많이 약해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이유는 자신이 뭔가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죄명,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런 사도 바울에게 간절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것보다 더 간절하고 절실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열망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약해진 몸이 빨리 건강해지는 것도 사도 바울의 마음을 애타게 하는 간절한 열망이 아니었습니다.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빨리 병이 낳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몸이 약하고,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도 바울에게는 그것이 열망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평생에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열망은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이 전하고 있는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죽는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병이 점점 심해져 몸이 고통스러운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전한다더니 감옥에 갇혀 저런 험난한 꼴을 당하고 있느냐?’고 손가락질하고 비아냥거리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갖고 있는 간절한 열망,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오직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면 죽는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아니 자신이 죽어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얻으신다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믿음이었습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목표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서 존귀하게 되는 것이고, 그런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가 자신이 죽음에 이른다 하더라도 바로 그 삶의 끝자락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얻으신다면 자신은 죽음을 맞는 그 순간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을 그렇게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누구나 갖고 있는 그런 세상적인 열망에 자신의 삶을 내던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은 오직 하늘을 향해 있었고, 그의 마음은 십자가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주님의 복음을 위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평생을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도 인간입니다. 그에게 왜 인간적인 욕망이나 인간적인 기대가 하나도 없었겠습니까? 그에게도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남들처럼 이름을 날리며 성공하고 출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도 몸이 힘들면 쉬고 싶고, 고통과 고난의 길이 아닌 형통과 평안의 길을 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모든 욕망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자신이 가진 더 큰 열망 때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바로 그 열망 말입니다. 그는 그 열망에 사로잡혀 인간적인 욕구나 인간적인 열망을 다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그런 열망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1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사도 바울은 그의 마음과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해 계시기에 자신이 마음으로 느끼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의 사고 속에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셨기에 삶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자신이 숨 쉬고 살아있는 동안 자신은 온전히 그리스도의 것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마음으로 평생을 산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도, 자신의 생각과 마음도, 자신이 살아가는 삶에도 그리스도가 주인이시기에 주인이신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무엇을 하든지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불러가신다 하더라도 그 생명이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께 영광이 되고, 주님께 유익이 된다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주님을 위해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도 바울만의 믿음이어야 합니까? 사도 바울에게 주신 사명과 우리의 사명이 다르고, 사도 바울의 삶과 우리의 삶이 다르다 하더라도 믿음의 방법과 가치는 동일합니다.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두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망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점점 믿음의 가치가 그 힘을 잃어가기 때문에 우리 안에 신앙적 열망, 간절함의 열망이 점점 식어가고 있습니다. 삶이 여유롭고 편안해지면서 신앙적 열망은 점점 더 식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너무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신앙의 행복을 느낄 신앙적 감각이 점점 무디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적 감각이 무디어지다 보니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면서도 내 자신이 영적으로 메말라져간다는 사실조차도 느끼지 못합니다. 세상에 널려 있는 수많은 세상적인 것들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다 보니, ‘주님 아니면 안 됩니다. 나에게는 오직 주님뿐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첫사랑의 감격도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첫사랑의 감격을 잃어버리면서 예배에 대한 열정도, 찬양하는 열정도, 기도하는 열정도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에 마음 빼앗기고 세상의 것에만 너무 집중한 채 살다보니, 세상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우리의 영혼이 메말라져간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도 은혜가 아닌 세상의 풍요로움에 목숨을 건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에서 사도 바울과 같은 간절함이 사라지면 우리의 신앙은 점점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말씀을 읽어도 말씀이 내 삶에 능력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힘이 되지 못합니다. 말씀을 그저 구경꾼의 심정으로 읽을 뿐입니다. 그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고 죽어가는 내 영혼을 살리는 능력이어야 하는데, 재미를 위해서 읽는 소설처럼 여겨집니다. 소설처럼 읽는 말씀은 우리의 삶에 전혀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17장에 기록된 베뢰아교회 성도들은 말씀을 들을 때 간절함으로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받은 후에는 그 말씀에 기초해서 성경을 날마다 깊이 묵상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런 간절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영혼을 파괴시키는 세상적인 유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세상의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이 주는 쾌락과 세상의 편안함이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혹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그런 세상 속에서 끝까지 믿음을 붙잡고 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거룩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보다 더 간절한 믿음의 열망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가장 빨리 잃어버린 신앙의 열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재림의 열망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나도 좋아졌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좋아졌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수출 100억불 목표’라는 말을 참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수출 100억불만 달성되면 우리나라는 엄청 잘 사는 나라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수출 100억불은 1977년에 이미 달성이 되었고, 지난 2016년에는 수출 5천억에 이르렀습니다. 객관적인 수치로 본다면 40년 만에 우리나라는 50배나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세요? 수출 100억불을 이루기 전에는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 주님 재림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50배나 성장한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의 재림에 대한 열망은 50배나 적어졌습니다. 왜요? 지금이 살기 너무 좋아졌거든요. 주님 오시지 않아도 우리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거든요. 아니 주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풍요롭게 잘 살고 있기에 주님이 오실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오히려 우리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것만 같거든요. 그래서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주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혹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거룩한 열망이 사라져버린 오늘 우리 시대의 신앙인들의 마음에는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 오심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세상이 주는 풍요와 쾌락과 즐거움이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을 좇아가고, 세상에서 즐기며 사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에게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간절함의 열망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바르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즐거움과 세상의 쾌락을 좇아가려는 우리를 신앙 안에 머물도록 이끌어주는 힘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신앙의 간절함을 잃어버리면 그 신앙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간절함으로 가득 찬 신앙의 열망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기록된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그 간절함의 열망이 사라진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다고 주님이 책망하시는 그런 신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로 부유하다고,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를 여전히 주님의 심장 속에 머물게 하는 것은 신앙의 간절함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신앙의 간절함이 사라질 때 주님의 마음에서 우리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향한 간절함의 열망이 사라질 때 우리의 신앙은 점점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간절함의 열망이 우리로 주님의 심장을 갖고 살게 하는 생명의 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이렇게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더욱 사랑합니다. 지금보다 더 사랑하기 원합니다. 지금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기 원합니다.’
여러분, 감격적인 예배로, 간절한 기도로,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으로 우리의 신앙이 살아 역사하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십시다. 주님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그 신앙의 열망으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가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