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여리고에서 주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여리고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지난 도시가 여리고였던 것입니다.

여리고에는 세리장 삭개오가 살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만나서 드라마틱한 회심을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는 키가 작은 자였지만,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면이 있었습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에 올랐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회개하고 새사람이 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가난하게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찾았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을 것이 있으면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님은 너무 기뻐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19:9-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집에 이르렀으니 사람도 아브라홤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말씀 때문에만 오해한 것은 아닙니다만,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오해하였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오해를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오해는 크게 가지였습니다. (1) 하나님 나라를 세상의 나라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심각한 오해를 바로잡아 주시려는 목적으로 오늘 본문의 은화 므나 비유 주신 것입니다.

비유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19:11절을 보세요. “그들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만 하면 당장 무슨 강력한 왕이 되실 것이고, 로마보다도 강력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사이에서도 암암리에 누가 크냐의 싸움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리 차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완전히 다른데,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당장 나타날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오해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세상 나라와 같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는데도, 욕심에 가득찬 인간의 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권력과 비슷하게 보인 것입니다.

 

어떤 귀족 사람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나라로 갔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의 분봉왕들은 왕위를 받기 위해 로마에 갔다 와야 했던 배경을 바탕을 이야기라고 있습니다.

귀인은 종들 명을 불러서 사람이 므나씩 므나를 맡기면서, 자기가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를 하라고 명했습니다. 어떤 종들은 열심히 장사했을 것이고, 다른 어떤 종은 게으름을 피웠을 것입니다.

, 백성들 가운데 귀인을 미워하여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뒤에서  사자를 보내 그가 왕이 되지 못하도록 로비하고 공작을 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귀인은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옵니다. 와서 제일 먼저 일은 돈을 맡긴 종들을 불러서 돈으로 어떻게 했는지 알아보는 일이었습니다.

첫째 종이 와서 보고하였습니다. “주인님, 당신의 므나로 므나를 남겼습니다.”  ( 므나는 사람의 3개월치 봉급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주인의 칭찬이 있었습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생각지 못했던 상급이 주어졌습니다. 열심히 장사하여 남긴 므나를 돌려달라고도 하지 않았을 아니라, 고을 권세까지 나눠준 것입니다.

둘째 종도 와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겼다고 보고했고, 주인의 칭찬과 보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게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번째 종에게서 터졌습니다.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제가 수건으로 두었다가 가져왔나이다.” “ 이렇게 하였느냐 하면, ‘당신은 엄한 사람이라 무서워서 그렇게 했습니다.’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입니다.’” 주인을 오해해도 너무 오해한 것입니다.

비슷한 비유인 달란트 비유에서는 달란트 받았던 종이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제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노라 보고 하였습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주인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19:22-23절입니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으냐 그러면 어찌하여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않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이자와 함께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네가 나를 나쁜 사람이라 생각하고, 욕심 때문에 네게 은화를 맡긴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차라리 돈을 은행에 맡기기 그랬느냐?”라고 예수님이 반문한 것입니다.

주인이 맡겨둔 돈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은 있는 것까지도 빼앗겼습니다. 주인은 곁에 섰던 자들에게 므나를 빼앗아 므나를 가진 자에게 주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주인님, ‘그에겐 이미 므나가 있나이다라고 하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뺏앗기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귀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자들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 으로 이야기를 끝맺고 있습니다. “내가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앞에서 죽이라

 

예수님께서 비유를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앞에서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르며, 또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당장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에 중점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대해 말씀해 주시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1)      우선 우리는 칭찬받은 종들로터 배울 교훈이 있습니다. 그들은 건전한 종말론적 신앙을 갖고 사는 삶의 본을 보였습니다.

주인이 보든 안보든 주인이 맡겨준 돈으로 열심히 장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종은  므나로 므나를 남겼고, 번째 종은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고을의 권세와 다섯 고을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종들은 주인을 신뢰했고, 주인이 언제 오든 상관 없었습니다. 주인이 왕이 되어오실 것을 믿었고, 맡겨진 일에 충성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느날 갑자가 주인이 돌아와도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들에겐 주인이 오는 날이 심판의 날이 아니라 칭찬과 상급을 받는 영광의 날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관심을 갖는 , 종말론적 신앙을 갖고 사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당장 종말이 있을 것으로 알고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지 않는 , 해야할 사명을 소홀히 하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한 생각입니다. 인생이 짧고, 주의 재림이 아주 가까이 왔다고 해도, 종은 주인이 맡긴 일에 충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주인이 언제 오실 모르기 때문에 더욱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둘째로, 책망 받은 종으로부터 배울 교훈도 있습니다.  칭찬 받은 종들에겐 주님의 날이 칭과 상을 받는 날이 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종에겐 무서운 심판의 날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의 비유는 종보다 셋째 종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종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으며,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까요?   번째 종의 문제점은 받은 돈으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건에 싸서 두었다가 그냥 가져온 것입니다. 수건은 열심히 일하다가 땀이 나면 닦기 위한 물건인데, 흘려 일하진 않고, 수건에 돈을 싸서 두었다가 그냥 가지고 것입니다.

사람의 문제점은 돈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은 , 게으름을 피운 것이 문제였습니다. 게으름은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명백한 죄입니다.

게으름 무엇인지는 잠언서에서 재미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잠언26:14,문짝이 돌쩌귀에 따라서 도는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잠언22:13,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무슨 뜻인가요? 게으른 자는 침상을 중심으로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일을 미루고 책임도 회피합니다. 게으른 자는 막연한 두려움을 상상하며 밖으로 나가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자 핑계를 대면서 항상 소극적으로 행동합니다.

김남준 목사는 게으름이란 책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청교도 신학자 오웬은 순전한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특징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분명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막연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지라고 생각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겠다는 목표에 적합하도록 재편되었을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따라서 충성스럽고 순전한 삶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루 하루 노력하는 삶입니다.

분명한 목표 없이, 하나님을 향한 추구함 없이 되는 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가는 것은 게으른 사람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게으른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며, 주어진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생명의 2017.4., 두란노서원)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셋째 종의 문제가 게으름이라면, 그가 받은 돈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므나를 가지고 왔을까요?

그의 대답 속에서 찾을 있는 것은, 그는 주인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을 굳은 사람’, 또는 엄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므나를 가지고 무엇인가 하다가 손해를 보느니, 차라리 원금을 가지고 오는 것이 책망받을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주인을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정반대의 사람이었습니다.

맡겨두지 않은 것을 결코 취하지 않고, 심지 않은 것은 결코 거두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주인은 누구보다도 좋은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도, 사실 주인이 종들에게 므나를 맡겨 장사하게 것은 주인의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종들을 테스트 하기 위한 목적이 있고, 나아가서 새로운 나라에서 통치에 함께 참여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주인이 종들을 위해 돈을 맡긴 것이지, 주인 자신의 욕심 때문에 맡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책망하는 과정에서 주인이 어떻게 말씀했는지 보세요.

므나를 빼앗아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했습니다. 므나로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서 아무 것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므나를 남긴 자에게 고을 권세를 주셨고, 므나도 가지고 있도록 했으며, 므나까지 빼앗아 주셨습니다. 주인이 열심히 종에게서 빼앗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슨 사명을 주실 , 무슨 일을 맡기실 , 봉사하고 충성하는 자들을 위해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무엇인가 요구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셋째 종이 나가서 열심히 일하다가 잃어버렸다면 오히려 책망받지도 않았고  빼앗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문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게으름입니다.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인식하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좋은 아버지로 인식하느냐, 무서운 폭군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신앙과 삶이 다를 있습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할 , 가장 혜택을 보는 사람은 자신이지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명령하고, 무엇인가 맡기고, 무엇인가 헌신과 충성을 요구하실 때엔, 항상 순종할 자세로 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왕의 왕이시며 주의 주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주님의 것이요, 주님께 속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 대신 나귀 새끼를 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나귀가 없으셔서 빌려타셔야 했습니다. 제자 둘을 베다니 맞은 마을로 보내시며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오려고 , 주인들이 나귀를 푸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귀의 주인은 아니셨지만, 모든 만물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주 만물의 주인되신 주님께 무엇이 필요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주를 위해 무엇인가 있다면 우리에게 특권이고 영광인 것입니다.

 

3)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에는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하였던 무리가 있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귀인이 그들의 왕이 되는 것을 싫어했을까요?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요?

그들이 주인의 됨을 싫어한 이유는 왕의 다스림을 받기 보다 스스로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절하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하고 다스림을 받는 것을 귀찮은 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맘대로 사는 것이 자유롭고,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진리가 아닙니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 없이 자유롭게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없듯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서 자유와 평안, 복을 누릴 없습니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고백, “제가 주님 품으로 다시 올아오기 전까지는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악한 마귀를 섬기를 밖에 없는 것입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느냐, 아니면 마귀의 자식이 되어 마귀의 괴롭힘을 받느냐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온전히 인생을 맡길 있는 분이십니다.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고 믿고 순종할 대상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보다 행복한 삶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섬길 ,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늘 나라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됨을 원치 않았던 백성들이 마지막에 어떻게 되나요?  19:27절을 보세요. “내가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는 인간이 마지막에 받을 심판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심판의 모든 책임은 자신이 져야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 아니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죄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4)      어떻게 사는 것이 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 현명하게 하는 것일까?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와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가 비슷하지만, 강조점은 조금 다릅니다.

달란트 비유는 종의 능력에 따라, 돈의 양을 차등을 두었습니다. 첫째 종에겐 다섯 달란트를 맡겼고, 둘째 종에게는 달란트를 맡겼지만, 셋째 종에게는 달란트를 맡기면서 장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므나 비유는 명의 종들에게 각각 므나씩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같은 양의 돈을 받았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이나 사명과 관련이 있다면, 므나 비유는 모든 인간들에게 똑같이 주어진 인생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가 생각해 있습니다. 번박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롭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인 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의 인생, 인생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번의 인생이기에, 모든 인생은 종말론적입니다. 종말을 앞에 길지 않은 생을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번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에 헌신해야 할까요?

신약성경을 종합해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뿐인 인생을 받쳐야 일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하는 것입니다.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제일의 사명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있는가? 사도행전을 통해서 분명히 있습니다.

1 예수님의 분부대로 성도들을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2- 오순절 날이 이르매, 바람과 같은 성령, 불과 같은 성령이 모인 성도들에게 충만히 임했습니다. 그래서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끝까지 다니면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사도행전 앞부분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주인공으로 활약하였고, 6장이후엔 일곱 집사들이 보충되었습니다. 특히 빌립은 사마리아 전도에 쓰임받았고, 스데반집사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나오고, 이후엔 사도 바울이 세계 선교의 주역으로 등장하였습니다.

바울은 1,2,3 전도여행을 통해 아시아, 유럽에 복음을 전하였으며, 최종적으로는 로마와 서바나(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늙어 죽을 때가 되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저도 같은 고백을 하길 원합니다.

딤후4:6-8,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의로우신 재판장이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은 무엇과 비슷한가?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은 장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장사, 사업을 해보지 않았지만, 장사만큼 부지런함과 신실성이 요구되는 일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협력도 필요하고, 모험심과 용기도 필요합니다.

삼성이나 현대가 어떻게 사업을 하나요? 어떻게 세계적인 기업이 있었나요?

혼자 하나요? 함께 협력하나요? 많은 직원들이 서로 협력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만 사업하나요? 아니면 멀리까지 가나요?

소비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하나요? 혁신에 혁신을 더하고 있습니다. 구태의연한 제품으로는 이길 없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 모릅니다.

물건을 팔고 돈을 버는 일도 이렇게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는데, 하물며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 귀한 일인데, 게으름을 피워서야 되겠습니까?

물건을 팔기 위해 아프리카 오지까지 가는데,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무나 당연하다고 있겠습니다.

 

5)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점은 은화 므나 비유에서 칭찬받은 종들이 무엇 때문에 칭찬을 받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일의 결과 때문일까요, 아니면 자세 때문일까요?

주인의 칭찬의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과 때문이 아니라 자세 때문이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기 때문에 칭찬도 받고, 주인의 통치에 동참하는 상도 받게 되었습니다.

19:17절을 보세요. “주인이 이르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그가 칭찬받은 이유는 작은 것에 충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있었던 것은 주인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구하는 것은 결과라기 보다는 충성입니다. 태도입니다. 만약에 주인이 맡겨준 므나를 수건에 싸두지 않고 가지고 가서 열심히 장사하다가 이윤을 남기지 못했다 해도, 주인이 그렇게 노여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기회를 주었을 것입니다.

가장 답답한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충성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은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길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서 서서 계산해야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영원한 나라의 삶에 비해 땅에서의 인생은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할 모릅니다. 그러나 나라에서 주인의 즐거움, 주인의 통치에 동참하는 유일한 길은 지극히 작은 처럼 보이는 인생을 소중하게 여기고, 열심히 사는 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동참할 밖에 없습니다.

지금 작은 일에 충성하고, 최선을 다해서, 그날 주님 앞에서 착한 종아, 충성했으니 하였구나하는 칭찬을 들으실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