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흔적을 가진 성도 * 본문/ 갈라디아 6:14-18

 

중세 교회에 있어서 성자로 추앙받고 있는 Francis of Assisi(Giovanni Francesco Bernardone; born 1181/1182 October 3, 1226, a friar and the founder of the Order of Friars Minor, more commonly known as the Franciscans)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사모하였던 지 말년에는 그의 몸에서 못이 뚫고 나와 항상 피가 흘렀다고 합니다. 그가 그렇게 십자가를 사모하게 된 이유는 오늘 본문 갈 6:17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어떤 분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실제로 바울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1. 바울의 흔적고백

 

1) 용어/ 이 단어의 뜻은 무엇일까요? 헬라어 Stigmata 라는 이 말은 Mark(표식), Badge(배지),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의 표식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2) 배경/ 그가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배경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이제까지 갈라디아서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알게 된 바로, 바울 사도는 그의 사역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심각한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전통 바리새인이었던 그가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의 도를 전하는 사도가 된 것에 대하여 반발한 열성 유대 주의자들이 그를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도적이었습니다. 신분에 있어서 12 사도에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전하는 사역의 내용에 대한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한 그의 사역은 전통 유대인의 심각한 반발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그를 죽이려고 하는 음모가 항상 그의 사역의 현장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시도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들 때문에 피하여 다른 지역으로 가면 그를 추적하여 대적들은 항상 뒤 따라와서 그를 괴롭게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그는 이미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고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가 이런 신앙적 기반에서 유대 주의자들의 집요한 방해와 강요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흔들리게 된 사실을 알고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수의 바른 구원의 복음으로 이들을 바르게 세우고자 부단한 노력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 그리고 헌신의 열정적으로 아름다운 인 모습입니다.

 

3) 의미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실제로 사도 바울의 몸에 예수의 흔적 즉 십자가의 처형당한 흔적이 남아있을까요? 양손과 양발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이 남아있을까요?

 

17절은 두 가지의 경고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는, 자신을 추적하고 고통스럽게 핍박하는 이들에 대하여 더 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경고하며 그들과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모든 성도들에게 이 십자가의 자랑이 모든 성도들에게 있기에 주를 위하여 온전한 헌신을 하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Francis of Assisi 같은 성도가 출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표현은 역사적으로 뿐 아니라, 성경적으로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로서, 첫째, 바울의 이 흔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사역하면서 얻게 된 다양한 상처를 의미합니다(참고, 14:8-20; 고후 11:23-25).

*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 고후 11:23b-27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 이유로서, 둘째, 유대인들은 육체적인 흔적 즉 몸에 칼을 대어 할례를 받은 자국이 있지만, 자신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흔적 즉 믿음의 표식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이유로, 이 표현은 종의 표식을 의미합니다. 즉 주인에게 소속된 자임을 밝히는 자신이 노예 신분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1:1)

* 15:17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찌니라

 

바울이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하는 말은 자신이 예수의 종임을 주장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 J. Calvin, " 이 사도바울의 말은 주를 위하여 당한 온갖 고초의 흔적을 의미한다. 이는 마치 전쟁의 영웅과 같은 것이다. 그는 세상에서 전쟁이 영웅들이 영광의 상처를 내어 놓고 자랑하듯이 우리의 대장되시는 예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주시는 영광스러운 훈장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마크는 세상의 군인들이 받는 훈장과는 판이한 것이다. 그것은 세상 적으로는 치욕적인 것이나 예수 안에서는 영광스러운 흔적이기 때문이다. “

 

그렇습니다. 이 표현은 바울 자신이 형식적 유대인 즉 할례를 받아 몸에 표식(mark)이 있는 형식적 유대인이 아닌, 참된 이스라엘 사람,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신이 영적 싸움에서 받은 전쟁의 상처를 갖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전쟁 영웅들이 갖고 있는 전쟁의 흔적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영광과 자랑이요, 그에 따른 훈장(badge), 즉 예수의 병사로서의 주를 위하여 이제까지 사역 현장에서 당한 온갖 고통스러운 순교적 경험들을 의미합니다.

* Lightfoot, "예수의 흔적이란 표현은 바울이 주를 위하여 사역하면서 당한 핍박으로 인하여 생긴 상처들을 의미한다.“

 

사실, 예수의 십자가는 세상 적으로 보면 치욕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것이요 고귀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사모하여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어떤 사람이 이러한 주님의 제자로서의 길, 즉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성도가 될 수 있을까요?

어찌 사도 바울만의 고백이되겠습니까? 우리 모두 주를 따르는 제자들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 예수의 흔적을 가진 성도

* 6:14-15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바울은 이 말씀에서 새로 지음 받은 자(New Creatures)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지음 받은 자인가 아닌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중요성을 의미합니다. 이 예수의 십자가는 믿는 믿음의 중요성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은 예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유대인들은 육체의 흔적 즉 할례의 흔적을 자랑하지만,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세 가지의 십자가를 언급합니다. 첫째는 예수의 십자가, 둘째는 세상 가운데서 죽은 자신의 십자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과 결별한 성도들의 십자가입니다.

 

1) 예수의 십자가-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2) 자신의 십자가- 세상이 바울을 십자가에 못 밖은 것입니다. 세상으로 부터의 핍박과 고통을 겪으며 세상과 등진 삶을 살아가게 하는 사도로서의 고난의 삶을 의미합니다.

3) 성도의 십자가-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그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음으로 고백하고 세상 가운데서 동화되지 않고 당당하게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성도가 지고 가는 십자가의 삶-성화의 삶을 의미합니다.

 

* 6:8-11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성도의 삶이 거듭남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즉 거듭남, 중생(Regeneration)이 단회적인 사건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일어나게 되는 영적 과정임을 의미합니다.

 

* Timothy George " 새창조는 변화의 과정(theprocess of change)도 포함한다. 성령의 중생이 역사는 회개-믿음- 일상의 삶 속에서의 고행(mortification), 당당하게 살아감(vivification), 예수의 형상이 완성되기까지 역사하시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 전체를 의미한다. 그럼으로 이 성령의 새로 지으심은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른 차원의 욕망과 열정, 습관의 새로운 구조(new system)로 변화되는 새로운 창조물을 의미한다. “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이러한 변화가 가능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성도 여러분, 이 놀라운 변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결과로 발생하는 영적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그의 편지를 마감하며 축복하고 있음을 봅니다.

 

3. 축복

*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

 

여기서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은 조건적인 축복(conditional blessings)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이 규례를 행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여기서 이 규례(Rule)는 법입니다. 즉 십자가의 원리를 통하여 얻게 되는 복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자유)과 긍휼입니다.

 

이는 육체적인 유대인이 지켜야 하는 율법의 억압으로 얻어지게 되는 압박과 불안과는 다른 차원의 평강과 긍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예수 믿어 구원받아 자유인이 된 영적 이스라엘, 즉 유대인이나 헬라인, 이방인 모두에게 미치는 복음의 혜택으로 되어진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 1:16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공동체 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배하여 함께 모여 경배하는 공동체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즉 새 이스라엘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육체의 할례를 받아야만 하는 형식적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 판에 영적인 할례 받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할례를 받았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믿음을 가졌는가, 아닌가가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참된 변화는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기때문입니다.

*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결론

 

Rev. Campbell Morgan(영국 Westmister Senior Pastor), "십자가에서 죽은 자만이 십자가를 전할 수 있습니다. 도마가 부활의 예수님에 대하여 내가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한 것처럼, 오늘날 세상 역시 모든 설교자에게 같은 질문을 합니다. ‘내가 못자국을 당신의 손에서 보기 전에는 당신의 말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은 그 사람만이 예수의 십자가를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십자가를 자랑함이 설교자에게만 주어진 것일까요? 이 엄위로운 사역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요구되는 삶이 아닐까요?”

 

성도여러분, 오늘날 교회는 십자가를 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번영과 영광과 축복만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No Cross, No Crown!" 십자가의 고난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구원받는 성숙하게 성화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해마다 고난주간이 되면 Catholic 국가들에서 연례행사로 하는 십자가 처형을 재현하는 식의 육체의 형식을 내려고 종교적 형식과 절차에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우리 심령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강력하신 역사를 사모하여 그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말씀과 인도하심에 대하여 온전히 순종하려는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비록 그 일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지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 30번째로 마감하는 갈라디아서 강해를 사도바울의 마지막 축복의 말씀으로 마감하려고 합니다. 구원이란 우리 심령 속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가능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진정 여러분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