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은 사람들
마1:5-16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대해서 시리즈로 설교를 하면서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이 필독서처럼 읽는 책 중에 <완득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영화로도 나와서 많은 사람이 보았습니다.
조완득, 이 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입니다. 아버지와 둘이 사는데 혼자 자기를 키운 아버지는 꼽추라고 불리는 구루병 장애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환경에 공부도 못하는 문제아입니다. 잘 하는 건 딱 하나 싸움 뿐 입니다. 가진 것도 없고, 꿈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바라는 것 딱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그의 담임 선생님인 ‘똥주’선생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선생이 사사건건 자기 일에 간섭하는데다가 급기야는 옆집 옥탑방에 이사를 와서 밤낮없이 자기를 불러댑니다. “얀마 조완득, 뭐해? 얀마 조완득! 얀마 조완득!” 자신을 늘 불러대는 담임선생이 너무 싫어서 완득이는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합니다. 기도가 뭔줄 아세요? “하나님.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 이 웃기는 이야기가 진전이 되면서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태국에서 온 이주민 여성이었던 것을 알게 되고, 부모님 두 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도 알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이 자기 어머니를 이상한 눈으로 볼 때마다 아버지가 그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너무 무시하지 마세요. 다들 자기 나라에선 나름대로 잘 나가고 잘 배운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이었던 선생님의 사랑을 통해 점점 변해가면서 자신의 장점을 발견하고 인생을 헤쳐 나가는 완득이 이야기. 우리가 드물지 않게 만나게 되는 이웃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속한 분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이름들은 하나같이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물들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보 속에는 찬란히 그 이름들이 기록된 소중한 인물들입니다. 이 분들 중에 두 사람의 이야기를 오늘 나눠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라합이라는 여인의 믿음을 통해 예수님의 계보가 이어집니다. 5절에 말씀에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오지 않습니까? 그리고 가나안 땅에 도착을 하게 되죠? 그때 모세의 리더십이 누구에게 이어집니까? 여호수아에게 이어집니다. 바로 그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되는데 여리고성이 그 첫 번째 성입니다. 이 여리고 성은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민족이 맞닥뜨린 첫 번째 성인 동시에 가장 견고한 성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성으로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이때 이 사람들이 라합이라고하는 기생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 때 한 여리고 사람이 이것을 보고 여리고의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첩자가 들어왔습니다. 라합이라는 여자의 집에 숨었습니다!” 그러자 즉시 병사들을 보내서 그들을 찾도록 합니다. 이 여인이 이 두 사람을 벌써 숨겨놓고 말합니다. 수 2:4-5말씀에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사람들이 저에게로 오기는 했습니다만,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날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떠났는데,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빨리 사람을 풀어 그들을 뒤쫓게 하시면,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단히 지혜 있는 말입니다. 속히 추적하면 이 사람들을 따라 잡을 수 있으리라고 예측하게 한 의도가 여기 숨어 있었습니다. 그냥 무턱대고, “모릅니다! 모른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 일이 어떻게 됐겠습니까? 이런 지혜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맨 밑바닥을 살아본 사람의 지혜 아니겠습니까? 지혜는 실패에서 온다 그러죠? 밑바닥까지 내려오면서 살 고생 죽을 고생 다 하면서 살아온 사람의 기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 여인에게 부어주시는 은총이 엿보입니다. 그녀에게는 이 은총이 어디서 왔느냐? 그녀의 믿음이 있었던 것을 우리가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의 병사들이 다 쫓아 나갑니다. 그때 성문이 닫혔다고 했습니다. 타이밍도 절묘하죠. 성문이 닫혔습니다. 빨리 쫓아가야 해서 다 쫓아 나가고, 그 순간에 성문이 닫혔습니다. 그 문은 밤이 지나도록 열리지 않습니다.
이제 안전해진 틈을 타서 이 여인이 지붕에 숨겨두었던 두 사람을 내려오게 합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구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 2:9-10.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실까요?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이 여인은 여호와의 이름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소문이 익히 퍼져나가고 이 소문을 이 여인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백성들에게는 여호와라고 하는 신이 있다. 그 여호와 신이 이 백성들을 인도하고 있고, 이 땅을 이미 그들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고 있고, 이 여인은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미 저 가나안 사람들에게는 여호와의 이름이 벌써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사건, 홍해를 갈라진 사건, 백성들이 그 땅을 건너는 사건(출 14), 민수기 21장에 요단 동편에 아모리왕 시혼, 바산왕 옥이 벌써 전멸된 사건(민 21:21-35), 이 사건들이 이 가나안땅에 이미 다 퍼져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간담이 다 녹은 상태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지금 우리 관점에서라면 이들이 항복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갑니다. 여러분 여기서 정신 차리고 함께 생각합시다. 이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여호와는 만민을 향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히브리인들의 민족신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가나안 사람들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경배할 뿐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공포의 대상으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죄가 주는 교만과 강퍅함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생각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되고 타민족들에게는 냉정하고 잔인한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하나님이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잘 보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연유. 이것이 큽니다. 죄로 인해 타락하였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창세기 15장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앞으로 후대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해서 들려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창 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이 예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애굽의 노예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그 때인가를 말씀하십니다. 왜 그때 그 시점인가? 이 때는 아모리(가나안) 족속의 죄가 가득한 때라는 뜻 입니다. 가나안 족속이 죄로 가득할 만큼 타락하고 그로 인해서 강퍅해지고 강퍅해져서 하나님을 믿고 깨닫지 못할 그 때, 바로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들어서 그 민족을 치신다 이 뜻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이 타락하고 강퍅해졌을 때 불순종해졌을 때, 바벨론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신 것처럼, 그 가나안땅이 강퍅해지고 타락해서 마치 소돔성 같아서 그 땅을 치셔야 했는데, 그걸 누구를 통해서 했느냐?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했다 이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착하고 순한 사람들인데, 이 잔인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서 진멸시켰다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백성들 입장에서는 소돔성처럼 심판을 받은 겁니다. 이걸 잘 알아야 됩니다. 이 구약이 돌아가는 역사를 제대로 아시고 하나님을 제대로 아시려면 요 사실을 분명히 잘 깨달아 아셔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셔서 그 타락을 심판받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여호수아 성에서도 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성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깨어있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은 왕의 왕비가 아닙니다. 요조숙녀 귀족이 아닙니다. 그녀는 기생입니다. 무명한 자입니다. 사회적 약자입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여인인 정탐꾼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민족의 반역자 아니냐 라고 냉소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민족의 반역자가 아니라, 타락한 성에 희망이 없음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타락과 두려움, 불안, 그로 인해서 자초된 마음들이 다 녹아버린 성에서 하나님을 올바로 보고 믿고 붙잡을 수 있었던 지혜의 사람이요 결단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수 2:11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개혁성경엔 뭐라고 했습니까.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라.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만민을 향하신 하나님, 온 세상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이어서 정탐꾼들에게 이제 구원의 날에 나와 우리 가족을 구원해 달라 요청합니다. 여호와의 전능하심과 또한 의로우심과 또한 긍휼하심을 그녀는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우리 주님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마 11:12). 가만히 입을 벌린 채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천국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굳건히 붙들 수 있는 사람이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생애 삶의 시간, 시간 속에 천국을 선택해야 되고, 말씀을 선택해야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히 11:31 말씀에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믿음으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오늘 내 시대에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실패라고 해서 실패했다고 해서 그게 결코 망한게 아닙니다. 이보다 더 낮아질 수 없는 신분에서 이보다 더 낮아질 수 없는 실패의 그 자리에서 주님을 붙잡고 천국을 침노하며 붙잡은 자에게 천국이 있고, 새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신 분은 오늘 주님을 영접하시고, 이미 영접하신 분이라면 정말로 말씀을 통해 주님을 더욱 굳건히 붙들고 이 대림절과 새해를 맞이하시면서 주님의 계보를 아름답고 힘있게 이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룻이라고 하는 여인의 믿음을 통해 주님의 계보가 이어졌습니다. 5절 말씀에는 보아스가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다 기록합니다. 룻은 이방여인입니다. 모압 여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 별로 안 좋아합니다. 아니 미워합니다. 출애굽하고 광야를 거치는 당시에 가나안을 향해 올 때 모압 왕이었던 발락이 이스라엘 민족을 저구하고 비난했습니다. 이후에도 모압의 여인들의 그 음행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에 저주가 찾아오고 타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압은 이스라엘에게 달가운 민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땅에 하루는 흉년이 들었는데, 그 중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이 모압으로 아내 나오미와 함께 아들들을 데리고 갑니다. 이민을 갔습니다. 하필 모압 땅으로. 거기는 경기가 좀 나을 줄 알았는데 이민 살이가 잘 풀리지 않습니다. 엘리멜렉 남편이 먼저 죽고 맙니다. 나오미가 홀로 아들들을 키워 얼마나 고생했겠습니까? 장가를 보냈는데 마침 모압 여인들을 며느리로 맞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들이 먼저 다 죽고 맙니다. 이 얼마나 한스러운 인생입니까? 한 집안에 며느리 둘, 시어머니 홀로 세 여자만 남습니다. 참으로 한스러운 이민 생활입니다. 아들 다 잃고 막막한 이 때, 고국의 소식을 들으니, 고국에 풍년이 왔다 합니다. 그래도 연명은 해야 되겠기에, 모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며느리들을 다 두고 오려고 하는데 그 중 한 며느리는 그래도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따라옵니다. 이 여인 이름이 룻입니다. 그녀가 시어머니와 함께 돌아와 라합의 아들 보아스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오벳이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계대혼인이라는 법도가 있습니다. 지난주일 야곱의 아들 유다 이야기를 하면서 들었던 이 제도는 고엘제도, 기업무르기라고도 합니다. 유업을 이어가는 제도를 말합니다. 물질 상속. 우리는 유업이야기를 하면 물질상속을 상상하는데, 물질상속을 받는 것은 물론입니다. 혈통을 이어서 대를 이어가는 것도 물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고엘제도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복의 유업을 이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복의 유업을 이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장자에게는 이 유업의 전수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아들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을 대신해서 형수를 위해 이 씨를 그의 씨를 공급함으로써 대를 물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형수가 이 동생이 너무너무 싫어서 동생의 씨를 받아 고엘을 이루기 싫다는 경우가 있다면, 그때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이 동생에게 동생의 얼굴에, 침을 퉤퉤 뱉어서 이놈 씨는 내가 안받겠다, 하는 표시를 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만나 그의 아내로 삼고자 했을 때 한 행동이 있습니다. 룻에게는 시아버지 엘리멜렉 집안의 고엘 의무가 있으므로 이어가야 했으므로 그것을 지켜야 하는데 마침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먼 친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임을 질 수 있었습니다. 한데 보아스는 자기보다 더 엘리멜렉에 가까운 친척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찾습니다. 그에게 말하기를 룻과 혼인을 하여서 고엘의 의무를 지겠습니까 했을 때 이 사람이 승낙을 합니다. 이게 웬 떡이냐. 기업을 무른다고 하는 것은 재산 상속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노려서, 영어로 Why not? 당연하죠, 내가 왜 마다하겠습니까? 그런데 보아스가 한마디를 더 하죠. ‘이 기업 무를 여인은 모압 여인입니다. 그 상속권은 당신이 아니고 엘리멜렉 집안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는 말에 이 사람이 거절하고 맙니다. 여러분 어리석은 인생들이 이렇습니다. 돈을 쫓는 인생이 그러합니다. 재산을 노렸다가 정작 중요한 축복의 계보를 놓쳐버리는 어리석은 인생의 전형입니다. 보아스는 이 어리석은 인생 덕분에 적법적으로 룻을 맞아들이고 아이를 갖게 되었으니, 그가 오벳이었습니다. 그 후로 이새가 태어났고 그 후로 다윗이 태어났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계보 속에 거절되지 않은 한 여인, 아니 아름답게 빛나는 여인의 이름이 바로 룻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미망인입니다. 유대 세계에서는 경멸 받는 이방인 출신의 여성입니다. 그러나 당당히 그 이름이 오릅니다. 그 여인이 그런 은총을 누리게 되는 이유가 있을까요? 그 이유를 담은 고귀한 구절이 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를 향해서 “나의 딸 같은 며느리들아, 이제 친정집에 돌아가서 새 인생을 살아라. 나는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겠다.” 할 때 이 시어머니에게 하는 룻의 말입니다.
룻기 1:16-17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그녀가 <무조건 순종하는 마음으로 어머니를 따라왔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핵심이 무엇입니까? 어머니의 하나님. 그것이 핵심입니다. 어떤 마음씨 좋고 덕망 있는 집사님인데, 여자 분이세요, 여집사님인데, 시금치를 안 먹는대요. 아니 그 몸에 좋은 걸 왜 안드세요? 에? 시금치 얼마나 좋습니까? 이유가 뭔지 아시죠? ‘시’자가 들어가서. 기독교 가정이라고 해도 불안하고 불편한 진실들이 있습니다. 정으로 사는 우리 민족 함께 살다보면 고운 정도 들지만 미운 정도 듭니다. 그러다 보면 정이 상해 버려서 감정이 상해서 세수대야에 있던 아기마저 버리듯이 정작 중요한 것 마저 버리는 일, 이런 일은 없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은 믿음입니다. 내게 믿음을 이어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부모님이 내게 믿음을 물려주셨다면, 우리는 더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핵심이 무엇입니까? 핵심은 믿음입니다!
오래전에 우연히 인상깊게본 드라마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응답하라 1988. 우연히 본 장면에 한 대사가 지금도 기억납니다. 여기에 둘째 딸 덕선이가 나만 차별대우 받는다고, 언니는 서울대 다닌다고 이뻐해주고, 동생은 아들이라고 이뻐해주고, 나만 매일 찬밥대접이라고, 엉엉웁니다. 딸이 하도 속상해 하니까, 주인공 성동일이 아빠가 딸을 데려다가 동네 계단에 앉혀놓고, 이렇게 지긋하게 하는 말입니다. 덕선아, 내가 처음 해봐서 그려. 나도 아빠 처음 해봐서 처음해보니까 몰라서 어설퍼서 그려. 니가 이해해줘. 우리들의 부모들 모두도 사실은 부모를 처음 해봐서 잘 모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마음에 자식을 위한 사랑은 100% 1000% 10000%있지만 부모 처음 해봐서 우리에게 보여준 건 10%였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험난했던 시대에 살아남기에도 버거웠던 분들, 자식들 입에 밥 한 톨 넣는 것만도 버거웠던 분들이 사랑 표현 제대로 못했을지 모릅니다. 아니 생각해보면 우리의 틀어진 감정이 부모님들이 주신 좋은 것들은 잊어버리고 안 좋은 기억만 남겨놓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공짜로 받았고, 노력 없이 받았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두 손에 쥔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특히 믿음을 물려준 것은 천하를 유산으로 준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길을 소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주님의 계보에 그 이름이 찬란하게 오른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혈통을 뛰어넘었습니다. 신분과 무관합니다. 환경도 아닙니다. 보아스의 어머니는 누구였다고요? 기생출신입니다. 오벳의 어머니는 누구였다고요? 외국인 이주민 출신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계보를 이어갑니다. 핵심은 하납니다. 오직 믿음,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주님의 계보에 죽도록 소중합니다. 오늘 이 예배 중에 누군가 앉아있다면 그 사람은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소중합니다. 모두가 서로서로 유리그릇처럼 소중히 아껴주어야 합니다. 그 믿음을 지켜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려주신 믿음이 있다면 무조건 그 믿음의 유업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혈통을 넘어서고, 민족을 넘어서고, 감정도 넘어서서, 이 믿음! 이 믿음이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게 하신 것을 생각하시면서, 여러분 이 대림절과 다가오는 한 해에 믿음을 든든히 세우시고 전해주며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 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제게 믿음이라는 소중한 은혜가 있음을 감사합니다. 내게 이 믿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내게 생명을 주신 부모님 주심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오시고 세상에 부어주신 구원의 은총이 오늘 내게 이어지도록 베푸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해가 가고 세월이 흐를 때 이 믿음이 더욱 굳건하게 하여주옵소서.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유업을 무르며 주님의 계보를 이룬 이들처럼, 제 인생을 통해 믿음의 유업이 잘 이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사랑하는 주님, 살몬과 보아스를 통해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은 두 여인의 이름을 듣습니다. 이방 여인이었고, 사회의 약자이며 무명하고 낮은 자들 속에, 믿음이 임재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 드리며, 오늘 이 사회 속에서, 우리 교회 속에서, 저희들 속에서 그 유업이 굳건히 이어져가는 은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주님, 주님 전 계보가 2000년을 흘러온 것처럼 2000년 후 여기까지 주님의 계보를 저희에게 이어주셨으니, 감사를 드리며, 이 믿음의 기업을 후세에 열심히 물려가는 자들 또한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