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 5
영적 침체를 회복 시키시는 하나님 2 (열왕기상 19:9-18)
“삶은 고해다. 이것은 위대한 진리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진리 중에 하나다. 이것이 위대한 진리인 까닭은 진정으로 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삶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면, 즉 진정으로 그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삶은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된다. 일단 받아 들이게 되면 삶이 힘들다는 사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M. Scott Peck, 아직도 가야 할 길)
정말 마음에 공감이 가는 명언이지요. 삶은 힘?니다. 결코 그렇게 만만치가 않은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든지, 아니면 부인하려고 합니다.
직장을 잃기도 하고, 관계의 갈등, 건강의 문제등이 생기면 그 것을 해결하는 가운데 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낙심이 찾아 옵니다. 실패와 실수, 그리고 실망이 우리를 쓰러트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연약함 존재라는 것이지요.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를 하였지만 바로 그 다음에는 영적침체로 쓰러져 있는 엘리야의 모습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를 정죄하거나 책망치 않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지난 주에 살펴 보았습니다.
오히려 그 낙심과 영적침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다시 깊이 만나는 엘리야, 그리고 그는 치유와 회복이 되어서 결국 다시 일어 나게 됩니다.
- 굴에서 머문 엘리야를 나오게 하십니다
로뎀나무에서 쓰러져 있는 엘리야를 푹 쉬게 하시고, 어루만져 주시며 먹게 하셨습니다. 힘을 공급 받고 난 후 사십 주야를 가서 호렙 산에는 도착 했지만 그가 들어간 곳은 어디였지요? 굴이 었습니다.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9절)
구약시대에서 호렙산 (시내산) 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는 가장 대표적인 곳을 상징합니다. 그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곳에 도착은 했지만 동굴로 들어가 버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단절시킨채 숨어 있겠다는 것이지요.
예배의 자리에는 나왔지만 여러 영역에 단절된 그리스도인들
하나님과의 단절, 지체들과의 단절
우리 삶에 다양한 굴들- 실망과 낙심, 그리고 두려움의 굴 – 몇 년동안 방에서만 있는 젊은 친구 심방
- 배신의 굴 –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차단시키는 경우
- 회피의 굴 – 영적침체나 우울증으로 밖에 나오지 않는 경우들을 보게 됨
- 굴은 어두운 곳, 사람들의 접촉을 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곳에 있는 엘리야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이었나요?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왜 물어 보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엘리야가 어디 있는지 모르셔서가 아닙니다.
로뎀나무에 쓰러져 있던 그를 먹이시고 일으켜 그 곳으로 가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럼 “네가 왜 굴 안에 있느냐?”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담 –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던 그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베드로로 비슷함 – 자기의 업종으로 돌아간 그를 찾아 가신 예수님
하나님의 회복의 방법이 비슷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번이나 똑같은 질문으로 물어 보세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Where are you? Why are you here? What is your story?
물어 보시고 들어 주심 – 우리 영혼의 상담과 치유자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히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0절, 14절)
여러분, 엘리야의 이야기를 잘 들어 보세요. 사실이지만 사실이 아니거든요.
동굴에서 일어나는 특징에 두가지가 대표적으로 나옵니다.- 극대화
사실, 주의 선지자들을 죽인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었슴
아합과 이세벨 이었지요. 그런데 온 이스라엘이 한편이라고 생각하니 소망이 사라진 것 입니다.
소수 때문에 다 나쁜 사람처럼 여겨짐
“나는 쓸모 없는 사람이야. 아무도 나를 알아 주지 않아.”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어.” “남자는 다 늑대야.” “이 교회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비관적 자세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게 됨
- 자신에게로 부터 벗어 나지 못함 (Consumed by self)
엘리야에게도 비슷한 반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의인이 자기 혼자 만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 것이 사실이었습니까?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18절)
자기가 보지 못한다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신앙은 제대로 서 있지 못한 것 처럼 여겨짐 (특히 자기의 열심이 유별나다고 생각될 때에…)
종교적 영웅심 – 예배, 기도, 교회 정책, 설교등 자기의 잣대로 보게됨
자신의 의 (Self-righteousness)
“Self-righteousness is usually the last sin we see in ourselves; it is the hardest to see, the hardest to admit to. For that reason it may take years and years before we begin to see how self-righteous we are. 자신의 의를 세우는 죄는 보통 우리 안에서 가장 늦게 발견되어 진다. 가장 발견하기 어렵고 인정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 이유 때문에 이 죄에 빠져 있는 자신을 보는 것은 수년의 세월이 걸리기도 한다.” (R. T. Kendall)
아니면 또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요.
자기 연민 (Self-pity)
Self-righteousness and self-pity are twins. ‘자기의 의’ 와 ‘자기 연민’ 은 쌍둥이입니다. 영적 침체가 오면 자연스럽게 함께 오는 것은 바로 자기 연민입니다.
스스로 단절한 관계, 그리고 자신 혼자만 처량하게 생각이 됨
피해 의식, 무력감가운데 계속 굴 속 깊숙히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 혼자만 그렇게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생각이 되는 것이지요.
자기 연민을 극복하는 일곱가지 방법 (Ingrid Trobisch, 기독교 교양)
“슬픔과 자기 연민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라.”
어려움이 찾아 오면 슬픈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것이지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 가면 성장과 성숙이 찾아 옵니다. 그런데 반대로 자기 만의 문제로 계속 바라 보게 되면 자기 연민이 되고 스스로를 더 깊은 굴로 끌고 들어 가 버립니다.
이 두가지의 양상 (극대화와 자기에게로 벗어 나지 못함) 이 굴 속에 있는 사람에게 벌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로 하여금 굴에서 나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11절)
굴에서 나와야 영적으로 삽니다. 굴에서 나와야만 자신을 왜곡된 관점으로 보는 것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다 해결 되야 나오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사탄의 거짓된 음성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지체들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있는 곳에서 어떻게 해결을 받을 수 있습니까? 잘못된 엘리야의 관점과 나레이트를 고쳐 주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습니다.
- 세미한 음성으로 만나 주십니다
온전한 회복은 결국 하나님을 만날 때에 이루어 집니다. 몸이 육체적으로 시내산에 있다고 다 영적으로 회복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에 있다고, 설교를 듣는 다고 다 회복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명심해야만 합니다. 차단 되어 있는 굴에서 나와서 그 분의 음성을 들어야만 온전한 회복이 일어 난 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강한 바람, 지진, 불이 임하는 데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셨다는 거예요. 사실, 바람으로 이전에 말씀하시기도 하셨어요. - 노아 (창세기 8:1)
-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출애굽기 14:22)
- 엘리야도 바람을 통하여 이미 경험함 (열왕기상 18: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로 내리는 지라” (열왕기상 18:45)
그렇기 때문에, 바람을 통해서 또 보여 주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지진, 불 도 마찬가지였어요. 하나님께서 예전에 그렇게 나타나신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번에는 세미하지만 놀라운 방법으로 다가오신 것이지요.
여러분, 세미한 소리로 나의 영혼에 다가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만 하는 것이지요. - 갈멜산에서 dramatic 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엘리야
- 불과 비로 기도를 응답 받았던 그의 분명한 간증
그러한 간증들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를 진정 깊숙이 변화 시키며 회복 시키시는 방법은 그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일상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늘 그런 식으로 우리를 만나 주시지는 않습니다.
조용히 우리의 영혼을 어루 만지시고 자녀들을 세워 가시는 그 분의 자상하심과 성실하심은 세미한 음성을 통하여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Charismatic church – 쓰러트리는 교회
사실 우리를 매일 변화 시키며, 성장과 성숙을 가져다 주는 것은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시내산에서 듣는 조용한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듣는 훈련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요. - 큰 집회, 유명한 강사
- 아주 훌륭한 레스토랑
- Post Missions Syndrome
- 종료 주일 – 호산나 외치며 큰 기대를 걸었던 군중들
- 하지만 그들은 곧 실망하게 됩니다
-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 나귀를 타시고 들어가심
넘어져 있고 마음의 고통 가운데 쓰러져 있는 엘리야를 일으켜 세우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었던 것 처럼 인생에 지쳐 있고 소망의 단절 가운데 있는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 꾸었습니다. 불과 비로…..
예수님은 열방을 회복 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요란하게 성취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 새로운 사명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십니다
“너는 네 길을 돌이켜” (15절)
다시 돌아가라! Go back! Get back!
사실 산 아래 문제가 해결 된 것은 없습니다. 바깥 세상에 상황이 바뀐 것도 없어요.
그렇지만 엘리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새로운 사명 가운데 용기를 얻습니다.
New Assignments – 3가지의 assignments 를 주십니다.
엘리야에게 주신 3가지의 새로운 사명들- 다메섹의 하사엘에게 아람 왕으로 되는 기름 부음을 주게 하심
-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심
-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후계자로 삼게 하심
이스라엘을 포함한 열방의 주권자는 결국 하나님이시며 그 권위도 주심을 다시 깨닫는 것이지요. 사람 때문에 다시 일어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6절 b)
결국 사명이 다시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베드로에게도 마찬가지로 회복시키신 후에 사명을 주셨지요. 여러분은 어떤 사명을 받으셨습니까?
우리의 심장이 뛰게 만드는 사명… 그 사명이 우리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니다.
문제의 연속 – 이 것들을 통하여 용기와 지혜를 터득하게 되지요.
사명 – 대가를 치뤄야 만 함
문제의 해결 – 중요한 경기에서 문제가 생기면 해결사를 등판 시킴
반대로 포기하면 그 때 부턴 벤치에만 앉아 있던 후보 선수들만 올려 보냅니다.
그 것이 싫으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달라진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함께 여호와를 섬기는 칠천 명이 있었고 사명을 수행하는 동반자 엘리사를 부쳐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You are not alone!
칠천 명이 다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함께 끝까지 갈 한 사람이 우리 인생에서 필요한 것이지요.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고 말씀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 말씀에서도 하나님 말씀만 먹으면 되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육체적으로도 먹게 하신 하나님
어려운 인생, 함께 가는 사람을 통하여 용기가 생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옆에 보이지 않았던 엘리사가 보이게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회복 시키는 공동체는 함께 가는 공동체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공동체는 부활의 영광을 함께 바라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