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곤한 세상에서 참 안식을 누리는 삶 3 ✦
“참된 안식일 정신의 실천”
(신명기 5:12-15)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목사가 설교하기 힘든 주제로 뭐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가장 언급하기 어려운 주제는 헌금과 십일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떻게 설교를 하더라도 오해를 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습니다. 평소에 잘 나가다가도 헌금과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게 되면, ‘이제 드디어 본색이 드러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오해를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목회자가 교회에서 쫓겨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헌금이라는 것은 신앙에 있어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교회 재정을 늘리려는 목적이나 불순한 동기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헌금생활을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도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듣기 불편한 설교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성도들의 귀에 듣기 좋은 설교만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거짓 선지자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설교하기가 힘들어진 또 다른 주제가 있는데, 바로 지금 다루고 있는 안식일, 오늘 우리 식의 표현으로는 주일성수입니다. 사회적으로 주일을 지키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주일을 제대로 지켜야 한다는 설교는 많은 성도들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지난 두 주에 걸쳐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오늘도 또 그것을 다루려고 하니, 부담이 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제가 여러분의 마음을 무겁게 하기 위해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잘되기를 원하지, 결코 잘못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헌금이나 십일조도 그렇고, 주일을 지키는 것도 그렇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길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이런 주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헌금이나 십일조와 일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입니다. 헌금도 십일조도 돈으로 하는 것이고, 일을 해서 버는 것도 돈입니다. 그러니까 둘 다 돈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학생의 학생 됨은 학교생활에서 나오고, 직장인의 직장인 됨은 회사 생활에서 나오듯이, 크리스천의 바른 삶은 바른 교회생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바른 교회생활이 교회 밖에서도 바른 삶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교회 속에서의 모습과 사회 속에서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교회생활이 바르지 못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바른 교회생활을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두 주 동안 안식일에 대해 원론적인 것들을 다루다 보니까, 실제적으로 어떻게 주일을 지켜야 하는지 자세히 다루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또 몇 분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묻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원래 다른 내용을 하려고 했다가 한 번 더 주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 실제적인 질문들을 다루어보려 합니다. 이것에 대해 전부 다 다룰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주일에 대해 궁금해 할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며 거기에 대한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주일성수를 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먼저, 주일성수라고 할 때 ‘성수(聖守)’라는 단어는, 한자로 ‘거룩할 성, 지킬 수’입니다. 그러니까 주일성수라는 말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뜻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그 삶이 판가름 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주일성수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지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처음 십계명이 나오는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은 네 번째 명령입니다. 오늘 신명기 본문도 같은 명령이 나와 있습니다.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찌니라” (14절)
본문에 의하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은 전혀 움직이지 말고 누워서 빈둥거리며 그저 가만히만 있으라는 말입니까?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3절)
여기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의 전제가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엿새 동안은 힘써 모든 일을 행하는 것, 즉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그저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며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말되, 그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키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거룩하지 않은 인간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고 회복하는 날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나머지 6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휴식을 한다고 해서 하루 종일 잠만 자면 어떻게 됩니까? 더 몸이 찌뿌듯하고 피곤합니다. 오히려 쉬는 날 야외 공원에 나가서 산책도 하고 자연을 즐기면 더 신선하고 좋습니다. 언젠가 뉴스에서 한국의 낚시 광들에 대한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에 밤새 낚시를 하고 와서 월요일에 직장으로 일하러 나갑니다. 사실 저 같은 사람은 그것이 이해가 안 갑니다. 그렇게 밤새 낚시를 했으니까 굉장히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낚시를 하면 심신의 피로가 풀린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낚시를 하는 것이 오히려 안식을 하는 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안식이 아니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안식입니다. 주일에 나와서 점심을 만들거나 교사나 성가대로 일찍부터 나와서 준비하며 봉사하다 보면, 사실 주일이 더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일을 거룩히 지키다 보면 몸은 피곤할지 몰라도 오히려 영은 맑아집니다. 그래서 주일을 엉망으로 지키면 안 됩니다. 주일을 놓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2. 주일성수의 의미는 무엇인가?
1)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 31:15)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고 일하는 자를 심지어 죽이라고까지 하십니다. 왜 이렇게 엄격하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일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자신이 돈을 벌어 금전적 이익을 취하는 것을 더 중요시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돈과 일이 우상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안식일에 자기 유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우상 숭배자와 같기 때문에 죽이라고 하십니다.
요즘 ‘셀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 같아도 미국 사람들은 전혀 쓰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 말이 또 있는데 아십니까? ‘화이팅(fighting)’이라는 말입니다. 영어에는 전혀 없습니다. ‘셀카’도 ‘셀프 카메라(self-camera)’라고, 영어에는 없는 완전 한국식 표현입니다. 스마트폰이나 카메라를 가지고 자기 얼굴을 겨냥하며 사진을 찍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온갖 표정을 다 지으며 찍습니다.
그런데 셀카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다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진을 잘 찍는 사람들은 꽃 하나,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에 초점을 맞추어 기막힌 예술 사진들을 찍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내 영의 카메라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을 말합니다.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셀카’가 아니라 ‘하카’입니다. 그래서 나머지 6일 동안의 삶에서도 하나님이 드러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에도 내 영혼의 카메라의 초점을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나에게 맞추어 셀카를 찍겠다는 것은, 나머지 6일도 내 맘대로 살겠다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부정하는 잘못된 태도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렇게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을 부정하시겠다는 것입니다.
2) 반드시 지키되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2절)
‘거룩’이란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그 날을 구별되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에는 구별된 예배가 있어야 하고 구별된 봉사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내 유익을 위해 일했지만, 주일에 교회에서는 주님의 목적을 위해 구별된 예배와교제와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다른 날들도 다 주님의 것으로 여기고 매일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특별히 주일에는 일상적인 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열심히 일하며 사는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하루는 따로 구분하여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일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데 주일날 돈을 써도 됩니까? 요즘엔 이런 문제조차 거론하지 않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주일날 돈을 써도 되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을 했었습니다.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주일날 버스도 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돈을 쓰기 때문입니다. 저번에 주일날 교회 끝나고 짜장면을 사먹어도 되는가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신학대학원에 가서 강의를 하면서 주일날 열심히 주님의 일로 섬기다가 배가 고프면 짜장면을 사먹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한 신학생(전도사)이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아주 경건하게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탕수육은 안 됩니까?”
너무 아무렇게나 해도 안 되겠지만, 그렇게 경직된 의식도 곤란합니다. 주일날 돈을 써도 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왜?”입니다. 왜 돈을 쓰려고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주일날 구별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가느라고 돈을 써서 버스나 택시나 지하철을 탄다면 어떻습니까? 자동차 연료를 채워 넣는다면 어떻습니까? 괜찮은 것입니다.
나가서 밥을 사먹는 것도, 단순히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외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날 하루 사랑하는 아내가 늘 식사준비로 수고하는데 아내로 하여금 부엌일에서 해방되어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갖기 위해 외식을 하는 데 돈을 쓴다면 그것은 거룩한 돈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자기 욕심입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자기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면 다 압니다. 이 돈을 쓰는 것이 정말 구별된 하루를 위해 쓰는 것인지, 자기 욕심을 위해 쓰는 것인지 자기가 다 알지 않습니까.
3. 주일에 반드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주일에 꼭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냥 집에서 해도 되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너희가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예배하도록 내가 정하여 준 곳이면 어디든지, 내가 가서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 (출 20:24)
그 외에도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곳에서 예배하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그 장소는 성막(Tabernacle)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텐트를 가지고 다니며 예배드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생긴 후에는 그 장소가 성전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곳이 어디입니까? 예배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별된 날에 구별된 예배를 드릴 때에는 구별된 곳,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지정된 장소에 지정된 시간에 식구들과 함께 찾아가는 것 자체가 훈련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있습니다. 개신교의 핵심은 만인제사장설입니다. 즉,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을 통하지 않는 제사는 무효였고, 지금도 천주교에서는 예배를 사제들만 집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누구나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9)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3:16)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제사장이고 성전이라면 굳이 교회당에 갈 것 없이 각자 자기 집에서 예배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분명 교회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닙니다. 그러면 뭐 하러 이렇게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까? 그냥 집에서 가족끼리 예배를 드리면 그것이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집에서 예배를 드려도 됩니다. 꼭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부모가 예배를 인도하고, 가족이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며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가족이 어디를 놀러갈 때 주일이 끼면 따로 근처에 있는 교회에 나가지 않고 그냥 가족끼리 예배를 드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 우리가 반드시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주일 저녁이나 다른 날 가정예배로 드리는 정도가 아니라, 주일예배를 가정에서 드리기 위해서는 이것을 반드시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집에서 가족끼리 주일예배를 드릴 때에도 예배당에 나와서 드리는 것처럼 나의 영적 카메라가 주님께 집중되어 있는가? 만약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집에서 드려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예배드리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집중도가 형편없이 떨어진다면 가정예배가 주일예배를 결코 대치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유한한 인간입니다.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여기서 하나 저기서 하나 똑같다고 말을 해도 똑같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도 예배당에 와서 하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집에서 하는 것과 다릅니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의 분위기 속에서 주님께 구별된 예배를 드리는 자세는 없으면서, 단지 자기 편리에 따라 장소를 바꾸어 예배를 드리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와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주일이 되어서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서 졸다 오더라도, 주일성수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예배 시간에 딴 생각을 했든, 설교를 들으며 어젯밤에 보았던 영화나 드라마를 깊이 묵상하든, 일단 자기 몸이 교회에 갔다 오면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좀 더 오래 머물면서 교제를 나누거나 여러 봉사활동에 참여하면 좀 더 열심히 주일성수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 역시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어디서 예배를 드리든지, 주일날 내 영적 카메라가 주님께 집중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중에 내 삶에서 드러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일 하루를 망치게 되면 일주일을 다 망치게 됩니다. 주일을 몇 번만 빠지면 영적으로 한 달 전체를 망치는 것과 같습니다.
4. 주일성수의 실제적인 예
그러나 이 모든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참된 안식일 정신이 빠져 있다면, 우리의 주일성수는 외식과 위선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주일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찌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14-15절)
무슨 말입니까?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일을 구별하여 예배드려야 할뿐 아니라, 그 구원의 감격과 감사함을 가지고 온 힘을 다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는
예를 들어, 주일이 되어 교회를 향해 가는데, 길에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배 시간을 지키기 위해 그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서 예배당에 앉아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예배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멈춰서 돕다가 나중에 보니까 예배시간을 놓쳤는데, 그래도 죽어가는 그 사람을 살린 것이 정말 예배입니까?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내용의 비유를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장 먼저 그곳을 지나간 사람은 제사장이고 다음은 레위인입니다. 그들을 나쁜 사람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그날 제사장과 레위인은 오늘 우리의 표현으로 하면 목사와 장로입니다. 아마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시간에 맞추기 위해, 그냥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천하게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은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여관에 맡기면서 비용이 초과하면 자기가 나중에 와서 갚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누가 이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으셨고, 질문을 받은 바리새인은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중에만 하고 안식일에는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 한 번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들어가셨다가 손 마른 사람이 있어서 고쳐주십니다(막 3). 그랬더니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벌 떼같이 들고 일어나 비난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가축 중 하나가 웅덩이에 빠지면 안식일이라도 끄집어내지 않느냐고 지적하셨습니다. “짐승도 안식일에 살리기 위해 끌어낸다면 사람은 당연하지 않느냐?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말씀을 생각하면서, 어떤 교인이 경찰인데 주일에 호출이 되어 교회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어떻게든 수를 쓰고 요령을 피워 주일날 교회에 나와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참된 예배이겠습니까? 아니면 자기가 일하는 그 자리에 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원하면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예배이겠습니까?
지금 한국에 엄청난 태풍이 불어온다고 합니다. 플로리다에도 허리케인이 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태풍이 불어서 온 나라에 부상자들이 속출했습니다. 그런데 구급약이 떨어져서 제약회사들이 쉬지 않고 밤낮으로 돌려 약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아주 믿음이 좋은 크리스천인 제약회사 사장이 자기는 거룩한 주일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일을 중단하고 가서 예배드려야겠다고 하며 갑니다. 그러한 결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면 그것이 예배입니까? 사장부터 팔 걷어 부치고 한 알이라도 더 만들어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주신 의미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주일을 못 지킬 만한 직업을 선택하거나 욕심 때문에 주일을 못 지킨다면, 그것이 곧 거룩하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정말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래 전 제가 시애틀에서 청소년 사역을 할 때 한 학생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처음 딱 봤을 때부터 눈에 독기가 있고 옷차림도 불량했습니다. 10학년 때 처음 봤는데 12학년 졸업할 때가 되도록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졸업 전 마지막 겨울수련회가 12월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마지막 날 예배가 끝날 때쯤 엎드려서 막 우는 겁니다. 바로 그 전날에도 여자아이랑 둘이 가서 숨고 그랬는데 그날 은혜를 받았는지 펑펑 울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다들 나갈 때까지도 혼자 엎드려 울더니 결국 일어났는데, 아~ 그 얼굴에 독기가 사라지고 얼마나 평안한 표정이던지!
그날로부터 그 학생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부활절이 되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교회를 빌려서 사용하느라 오후에 예배를 드렸는데, 토요일에 세례 문답을 다 하고 세례를 받는 날인데 이 아이가 안 나타나는 겁니다. 예배는 시작했고 세례를 받을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안 왔습니다. 저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안절부절 하며 나와서 기다리는데 세례 시간 5분 전쯤에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헤이!” 하면서 건들건들 걸어오는 겁니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빨리 들어가라 하며 세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다 끝난 다음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자기가 운전을 하고 오는데 길에 자동차가 그냥 서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이상하게 그날은 자기가 도와주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제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정말 그런 마음이야말로 참된 예배의 정신이고 주일을 잘 지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배를 드릴 때 예배당 안에서 시작된 예배는 삶에서 끝이 납니다. 예배당 안에서만 드리는 예배만 생각하면 삶의 예배를 버리는 율법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삶의 예배를 드린다고 예배당 예배를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참된 예배는 주일날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날 영적 카메라의 초점을 주님께 잘 맞춰서 나머지 6일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중인격자가 되고 맙니다. 이처럼 안식을 지키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엄청납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 58:13-14)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높은 곳에 올리고 존귀하게 해준다고 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면 하나님은 나를 존귀하게 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키면 복된 삶이 됩니다. 존귀한 삶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터치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자기부인입니다. 하나님의 터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터치 속에서 적용과 실천이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당에서 시작되어 삶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에서 주일성수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터치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세상에서 가진 것이 많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별 의미 없는 조잡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안식일 정신을 실천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큰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게 될 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