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곤한 세상에서 참 안식을 누리는 삶 2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애굽기 20:8-11)

 

 

[들어가는 말]

 

제가 이민 오기 전에 한국에서 학생 시절 다니던 교회는 보수적인 장로교단 소속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일성수 즉 주일을 지키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한 번은 고등부 수련회 때 부목사님이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것을 보면 당시 그것이 저에게 상당히 인상 깊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주일날 예배 끝나고 나가서 짜장면이나 짬뽕을 사먹어도 되는가?” 물론 다들 사먹고 있었습니다. 교회 바로 뒤에 중국집이 있어서 우리를 비롯하여 교인들이 하도 많이 가서 사먹었기 때문에 고맙다고 선물을 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을 하시니까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그 질문을 시작으로 해서, 주일의 의미가 무엇인가, 왜 주일성수를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주일성수를 제대로 하는 것인가를 설명해주셨습니다. 말씀이 다 끝난 후에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데, 그때 어느 선배가 장난기 넘치는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그래서 주일날 짜장면을 사먹어도 된다는 겁니까, 안 된다는 겁니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도 있듯이, 그때부터 독특한 질문을 던지던 그 선배는 지금 한국에서 유명한 목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때 그 부목사님도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십니다. 저도 그때 질문을 좀 독특하게 잘했으면 지금쯤 유명해져 있을 텐데.....

 

여러분, 이 시대에 극 보수 교인들 외에 그런 질문을 하는 크리스천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 끝나고 나가서 짜장면을 사먹어도 됩니까, 안 됩니까? 예배 후에 쇼핑을 해도 됩니까, 안 됩니까? 주일 오후에 놀러가도 됩니까, 안 됩니까? 너무 당연해서 질문조차 하지 않는 내용입니다. 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런 질문들 자체가 그리 바람직한 질문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주일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날로 지키고 있는가입니다. 내가 주일날 짜장면 사먹느냐 안 먹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날 나의 삶을 기뻐하고 계시느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주일로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주일을 지킴에 있어 안식일 정신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안식일을 기억하고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고 보면 참 독특한 계명입니다. 이 치열한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푹 쉬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진리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일 때문에 못 보는 소중한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은 안식일에 깨닫는 두 가지 소중한 진리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날

 

오늘 본문을 함께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8-11절)

 

10절에 보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의 중심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 지치고 일에 치이다 보면 때로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급한 일들에 집중하느라, 하나님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일에 치어 잊어버렸던, 공부에 묻혀 잊고 있었던, 여러 활동들에 묶여 신경조차 쓰지 못했던 하나님을 다시 보는 날, 그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은 돈이 우상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강력한 우상이 돈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God vs. Gold). 그런데 그 돈이 무엇입니까? 결국 돈은 일입니다. 일해서 돈을 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모두 일에서 나옵니다. 일이 없어지면 그것들도 사라집니다. 일을 못하면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습니다. 직장을 잃게 되면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지쳤어도 또 다시 일터로 나갑니다.

 

그만큼 우리는 일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요 나의 요새시라”는 시편 말씀이 있는데, 그게 아니라 ‘일은 나의 반석이요 요새시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심해지면 신앙은 버려도 일은 못 버린다, 하나님은 버려도 직장 또는 사업은 지킨다고 말하며, 일하러 나갑니다. 그래서 일이 나의 우상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생각하셨습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일도 좋지만, 일 때문에 내 자녀들이 신앙도 잃어버리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명령하십니다.

 

안식일은 일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물론 우리는 안식일만 아니라 매일 주님을 기억하고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특별히 이렇게 시간을 정해서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나의 일이 나의 힘과 방패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힘과 방패라는 사실을 선포하며 고백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일이 차지해버린 내 삶의 중심에 다시 하나님을 앉히는 날, 잊고 살던 하나님을 내 마음에 다시 모시는 날, 그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는 날마다 이 안식일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가?’를 늘 점검하며 살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나는 정말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대우해드리며 모시고 사는 사람인가?’

 

이것을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일을 멈추고 쉴 수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6일 동안 온 힘을 다해 일하듯이, 일주일에 하루 온 힘을 다해 일에서 손을 뗄 수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지금 말하는 이 ‘일’에는 직장이나 사업뿐 아니라 나의 일상생활과 가정에 대한 것도 포함됩니다. 자녀교육을 위한 활동이나 내가 즐기는 취미생활도 다 포함됩니다.

 

‘일’이 자신의 힘이고 방패인 사람은 쉬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의 힘이고 방패인 사람은 쉴 수 있습니다.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쉴 수 있습니다. 나를 지켜주는 나의 방패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결단의 날이기도 합니다. 일을 의지하고 살지,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지, 둘 사이에서 선택하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생존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직장생활이나 사업, 내 건강을 위해서 하는 운동, 내가 즐기는 어떤 취미활동, 내 자녀가 잘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공부나 운동이나 예술 활동 등, 이러한 일을 의지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정말 의지할 것인지, 둘 사이에서 선택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주일에 하루를 온전히 쉰다는 것은 신앙을 고백하는 믿음의 행위가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시고 나의 요새이시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고 방패이시다. 내가 의지하는 것은 돈도 아니고, 일도 아니고, 성공도 아니고, 오직 나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 것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고백이 나 자신의 고백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증명해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증명합니까? 쉬면 됩니다. 일주일에 6일은 이 땅에서의 생존을 위해 땀 흘려 일하지만 일주일에 하루는 주님께 모두 맡기고 푹 쉬는 겁니다. 물론 무조건 잠을 많이 자고 육체적으로만 푹 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손해를 보면 어떻게 합니까? 그냥 손해를 보면 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그냥 쉬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에 집중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손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손해가 오히려 더 좋은 선물을 받는 길이 될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보려다가 손해도 보았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굻어보기도 했습니다.”라며 큰소리도 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너는 내 계명을 어떻게 지켰니?”라고 하실 때 “무슨 계명이요? 그런 거 모르는데요.”라고 하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일주일에 하루를 푹 쉬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에 집중하며 나아가는 사람에게 영원토록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공급해주십니다.

 

언젠가 일도 끝나고 돈도 끝나고 내 육신도 끝나고, 이 땅에서 우리가 의지했던 소중했던 것들이 모두다 힘을 잃고 다 끝나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셔서 끝까지 우리의 반석과 요새가 되시고 힘과 방해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는 연습을 하는 것이 바로 안식일(주일)입니다.

 

 

2.   사람이 사람 되는 날

 

안식일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날인 동시에 사람이 사람 되는 날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존귀하다는 것, 특히 당시 노예도 존귀한 사람이라는 진리를 보여주는 날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처음 안식일을 명령하셨을 때 특히 누구보다도 안식일은 노예를 위한 날이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도 그랬지만, 구약시대 당시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재산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일하는 기계에 불과했습니다. 돈을 받고 팔아버릴 수도 있는 물건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 물건과 같은 노예에게도 가슴 벅찬 날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존귀한 사람이 되는 하루가 있었습니다. 바로 안식일입니다.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0절)

 

그날만큼은 주인이 노예에게 일을 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날만큼은 주인이 노예를 돈 받고 팔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노예도 존귀한 사람이 되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고 사는 것도, 옷을 입고 사는 것도, 또 집에 사는 것이나 차를 타고 다니는 것 모두 우리는 필요한 것을 일을 통해 얻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일이 우리에게 모든 축복과 필요의 통로가 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소중한 일이 우리를 불행과 괴로움으로 이끌 수가 있습니다. 일에 눈이 어두워서 사람을 못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일이 너무 소중해서 그보다 훨씬 더 소중한 사람을 놓쳐 버립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놓쳐 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각하셨습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저 노예도 물건이 아니라 내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사람인데, 그것을 내가 알려주어야겠다.’ 그래서 명령하십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다시 말씀드리는데, 우리가 주일을 지키고 있지만 안식일 정신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그 정신은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도록 하는 것이고, 동시에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해주는 날입니다. 있는 그대로 존귀한 사람으로 보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람을 숫자로 봅니다. 연봉이 얼마인지 그 숫자, 집 평수(미국은 square footage)의 숫자, 학생들은 시험 성적의 숫자, 또 젊은 여성들에게는 신체 사이즈 숫자, 목회자들에게는 교인 숫자를 붙입니다.

 

능력이나 스펙이라고 부르는 이 숫자가 마치 그 사람 자신인 것처럼 따라다닙니다. 그런 숫자들과 더불어 무슨, 무슨 타이틀이 붙은 것을 그 사람의 ‘가치’와 같다고 봅니다. 숫자가 높고 많은 타이틀을 가진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 귀한 사람이고, 숫자가 낮거나 가진 타이틀이 별로 없으면 무능한 사람, 심지어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생각하셨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조금 숫자가 낮아도, 가진 타이틀이 없어도, 여전히 존귀한 사람인데, 연봉이 적고 졸업장이 없어도 여전히 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사람인데, 이 사실을 온 천하에 보여주어야겠다.’ 그래서 명령하십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안식일은 그 사람의 숫자를 떠나, 그 사람이 가진 어떤 타이틀을 떠나,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날입니다. 그 사람의 능력, 신분, 재산, 외모, 학력, 배경, 그 외의 어떤 조건도 다 떼어 버리고,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보는 날, 그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정받는 안식일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방향입니다.

 

그런데 교회 내에도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전에 다니던 교회에 선거철만 되면 교회를 방문하는 국회의원 후보들이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소개를 해달라니까 “아무개 의원님이 오셨습니다.”라고 광고를 했습니다. 그 외에도 교회 내에서 서로를 부를 때 OOO 교수님, OOO 박사님, 닥터 O, 사장님, 회장님, 전무님 등등 세상의 타이틀로 부를 때가 있습니다.

 

사실 그런 타이틀을 가진 분들은 좀 서운하실지도 모릅니다. 교회에서도 나를 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데 전혀 알아주지를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회에서 달았던 계급장을 그대로 달고 들어오는 데가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사람도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계급장을 다 떼고, 숫자나 타이틀을 다 떼고, 오직 사람 자체로서만 만나서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서 모여 함께 예배하고 교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안식일 정신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안식일 정신을 지키는 교회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1세기 당시 교회에게도 어려웠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당시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이 한 가지 소개됩니다. 당시 교회에는 부자도 오고 가난한 사람도 왔습니다. 특히 노예도 오고 그 주인도 왔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오면 아무래도 반가운 마음에 뛰어나가 환영을 하고, 가난한 사람이 오면 대충 저기 아무 데나 앉으라고 함부로 대하는 겁니다. 그것을 야고보는 엄하게 꾸짖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믿음을 의심하기까지 합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든지 하오.’ 하고 말하면, 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약 2:1-4)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증거 중의 하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 차별은 스스로 믿음을 부정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교회, 사람이 가진 것이나 못 가진 것에 따라 대하는 것이 다르지 않고 똑같이 존귀하게 여기는 교회, 그런 교회가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입니다. 그런 성도가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나가는 말]

 

"Chariots of Fire"(불의 전차)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1924년 올림픽 경기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는데, 여기에 참가한 선수 중에 스코틀랜드의 육상 스타인 에릭 리델(Eric Liddel)이 있었습니다. 그는 100미터 육상경기의 우승 후보로서 세인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으며, 이 경기를 위해 여러 달 동안 강도 높은 훈련을 쌓아 온 터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경기 일정이 공교롭게도 주일날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 좋은 크리스천이었으므로 마음에 심한 갈등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나라의 명예를 위해서는 주일을 범하고 경기에 참가해야 옳으나, 그의 신앙 양심은 이를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주일에 운동장을 달린다고 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되지 못한다고 확신한 그는 경기를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팬들은 크게 실망했고 분노했습니다. 그를 격찬하던 사람들은 그를 모두 바보로 취급했으나 그의 마음을 채운 기쁨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주간에 출전하게 되어 있던 스코틀랜드의 400미터 경기 선수가 부득이한 일로 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리델은 자기가 훈련한 종목보다 4배나 되는 힘든 경기였지만 그 경주에 자기가 뛰겠다고 신청했습니다. 100미터 경기 선수인 리델이 400미터 경기에서 아주 좋은 기록을 세우며 당당히 우승했습니다.

 

후에 리델은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되어 평생 선교 사역을 하다가 1945년 중국의 군인 캠프에서 세상을 마쳤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한 그를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해주셨습니다.

 

물론 항상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크리스천 선수들이 전부 그렇게 한다면, 프로 풋볼(Football) 같은 경우는 거의 주일날 경기를 하는데, 다 빠져 나가면 누가 경기를 하겠습니다. 하지만 리델 선수는 그 당시 믿음으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 끝나고 나서 짜장면 사서 드시겠습니까? 그래도 됩니까, 안 됩니까? 그러나 안식일을 그런 식으로 무겁게 생각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율법적인 날이 아닙니다. 오히려 안식일은 참 행복한 날이고 귀한 날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날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날입니다. 일에 가려졌던 나의 하나님을 다시 새롭게 발견하는 날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날입니다. 또한 안식일은 사람이 사람 되는 날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존귀한 아들딸로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 날입니다.

 

나는 오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드리고 있습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을 존귀한 사람으로 대접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