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는 성격적으로 보면, 소심한 사람인 같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 흔쾌하게 순종하지 못하고, 대단히 조심스럽게 따져 보면서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런 모세에게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을 맡기셨습니다. 출애굽 사건의 주인공으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성격이 꼼꼼하고 소심한 사람들도 불러서 연단하여 쓰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만약에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Yes,sir!” 하면서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이집트로 향했다면, 그것도 감사하지만, 출애굽기의 오늘 본문은 쓰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것이 제일 중요한 같습니다. 의심이 되면 의심이 된다고 하고, 안믿어지면 도마처럼 안믿어진다고 말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는 말씀해 주시고, 증거도 주시면서 믿게 도우시는 것입니다. 믿어지지도 않는데 믿는 척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없고, 소심한 사람은 쓰시지만, 거짓되고 위선적인 사람은 쓰시지 않으십니다.

 

출애굽기 3장과 4 사이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 다섯 거절을 합니다. 물론 거절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모세는 다섯 가지 이유를 대면서 자신이 지도자로서 적합하지 않음으로 증명하려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유에 대해, 이유가 안됨을 설명해주시면서 결국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십니다.

(1)    모세의 번째 거절은 3:11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부름받았을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걱정하지 말라. 네가 아니라 내가 것이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2)    모세의 두번째 거절은 3:13절에 나옵니다. “내가 이집트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서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보내서 왔다 하면 그들이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텐데, 내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보내시는 분의 이름도 모르면서 어떻게 있겠느냐 하며, 가고 싶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  여호와라는 이름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영원한 이름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절대이시지만, 추상적이거나 철학적인 신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하나님, 관계적인 하나님이심을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계속해서 모세는 번에 걸쳐 이집트에 가고 싶지 않음을 표현했습니다.

(3)    번째 거절은 4:1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말을 듣지 않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라고 것이라고 모세는 말했습니다. 모세는 그들이 하나님이 너를  보내셨다 것을 어떻게 수있느냐 하며 의심할 것이라고 하며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가지 표적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고, 다시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 모세의 손이 품에 넣었더니 나병이 걸리고, 다시 넣었다 빼니 회복된 기적, 나일 물을 조금 퍼다가 땅에 쏟으니 피가 기적 등입니다.

(4)    번째 거절 : 4:10절에 나옵니다. “ 주여, 저는 말을 모릅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합니다. ”  자신은 말을 못하니 지도자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5)    마지막 거절은 4:13절에 나옵니다. 이상 이유도 없자, “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어쨌든 자신은 못하겠다 말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셨더라면, 이정도 거절하면, 절대로 모세를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평양 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없지하면서 다른 사람을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는 내셨지만 모세를 버리시지 않고, 끝까지 설득하시고 결국 모세를 이집트에 보내셔서 출애굽의 인도자 삼으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저는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모세의 성격이 확근하지 않고 소심하였던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소심한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미적거리는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있으며,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귀한 교훈을 주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본문 4:1절에서 모세가 제기한 문제는 신뢰와 권위의 문제인데, 리더십에서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하리이다

모세는 리더십에서 권위와 신뢰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반 지도자들도 리더십에서 권위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권위는 신뢰에서 나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따르는사람들의 신뢰를 잃게 되면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 권위를 가질 없는 것입니다.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기란 엎어진 물을 담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한국의 헌법 재판소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을 인용한 것은, 물론 박대통령이 법을 어긴 점도 있지만, 다른 이유는 박대통령이 너무나 많은 신뢰를 잃어버렸고, 그래서 이상 대통령직을 수행할 없다는 점이 반영되지 않았나 생각해 있습니다.

하물며 영적 지도력에 있어서 신뢰의 문제와 정당한 권위의 문제는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그래서 모세는 사람들이 자기를 믿지 않고, 자기 말도 듣지 않으면서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하면 어떡하냐 걱정한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세워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백성들을 이끌 있겠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에게 있어서의 신뢰와 권위는 어디에서 나올까요? 모세가 지적한 것처럼, 영적 지도자의 권위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인정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정말 모세에게 나타나셨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모세를 보내셨는가 아니면 스스로 왔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느 나라의 대사로 다른 나라에 가서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권위의 근원이 무엇이겠습니까? 본국의 대통령이 대사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임명하였는가, 아닌가 것입니다. 대통령이 보내지 않았는데 스스로 대사라고 주장한다면 권위를 가질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권위를 세워주시기 위해 모세에게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지 이적을 통해서 모세가 스스로 리더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지도자라는 것을 증명하게 주셨습니다. 기적들은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없는 기적들이었습니다.  

(1)    번째 이적이 무엇이죠?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고,다시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되는 이적이었습니다.

하나님 : “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 : “지팡이입니다

하나님: “그것을 땅에 던지라

모세가 막대기를 땅에 던졌더니 (코브라) 되었습니다. 모세는 무서워서 피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무서워하지 말고,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꼬리를 잡는 것은 위험한 일이죠. 모세가 두려웠지만 믿음으로 손을 내밀어 꼬리를 잡으니,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2)    번째 이적이 무엇이죠? 모세의 손이 품에 넣었을 , 나병이 걸렸고, 다시 넣었다 빼엇을 때엔 원래의 손으로 돌아온 기적입니다.

나병이 치유되는 것은 당시에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표적을 믿지 않을지라도 번째 표적은 믿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번째 이적은 무엇이죠? 나일강의 물을 조금 퍼다가 땅에 쏟으면 물이 피가 되리라는 이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앞의 표적을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번째 표적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번째 표적은 모세가 직접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말씀으로 받고 믿었던 같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기록된 기적들이 구약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기적들입니다. 창세기엔 기적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신약에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신 기적이 예수님의 표적이라고 하는데,구약의 표적은 출애굽기 4 본문의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가 다시 지팡이가 되는 기적입니다.

기적이란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 초자연적인 사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자연, 초자연의 구분이 있을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적인 일도 하시고, 초자연적인 일도 하십니다. 하나님께는 아무 차이가 없으십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연적인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으로 보고, 기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과 능력을 증거하시기 위해 추가적인 일을 하실 때가 있는데, 이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기적과 표적이 어떻게 다른가? 기적-초자연적인 사건 자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표적- 같은 기적이 하나님의 지혜, 능력,사랑을 증거한다는 의미에서 표적입니다.

기적은 자체로서 의미가 보다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표적들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유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시기 위함과,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모세를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모세의 권위를 세워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신비한 능력을 행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표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 위해 표적을 허락하시지만, 표적, 기적을 추구하는 신앙은 건강한 신앙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기초를 신앙이 건강한 신앙입니다. 생각해보면 기적적인 은혜보다 자연스럽고 평범한 은혜 더욱 귀한 것입니다.

가령, 교회 오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차가 바퀴 굴렀는데, 하나도 다치지 않은 기적도 감사하지만, 감사한 것은 무사히 교통 사고 없이 예배에 있게 것입니다.

질병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치유받은 것도 은혜이지만, 없이7-80 동안 건강하게 살게 되는 것은 은혜입니다. 기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연적인 은혜에 감사하실 있를 바랍니다.  햇빛과 ,  공기, , 음식, 건강, 가정, 자녀들 수많은 자연적인 은혜들에 대해 감사하실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표적, 기적을 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적, 표적을 좋아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16:4) 요나의 표적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과 무덤에 갇혔다가 사흘 후에 부활할 것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없으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후에 살아난 표적 하나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속에 하나님의 능력, 사랑, 지혜, 정의가 담겨져 있다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 외에 무슨 표적이 필요한가 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표적을 구하는 신앙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전1:22-25,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꺼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적이 지팡이가 (코보라) 되게 하고, 다시 뱀이 자팡이가 되게 하는 기적이었습니다. 이적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고, 뱀을 제압하는 기적을 모세가 경험하게 하셨을까요?

당시 뱀은 이집트에서 신으로 숭배되기도 하고, 바로의 권력을 상징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바로왕의 홀에도 새겨져 있고, 바로의 왕관에도 뱀이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뱀은 성경에서 사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뱀을 보고 무서워 피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꼬리를 잡았더니 지팡이기 되는 기적을 보면서,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이 뱀의 능력, 사탄의 능력을  능가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있는데,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세상에서 온갖 악을 조장하는 사탄인 것입니다. 악한 사탄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이 온갖 악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뒤에서 역사하고 조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의 세력은 빛의 세력을 이길 없듯이 사탄은 하나님의 능력을 능가할 없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떤 권세도 하나님의 권세를 이길 없음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초강대국 바로의 힘도, 악한 사탄의 힘도 결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비교할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악한 세상에 보냄받은 존재로서, 항상 잊지 말아야 것은 우리 하나님의 능력은 악한 사탄의 능력에 비교할 없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그냥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10:1)  복음서에 보면, 어떤 아버지가 귀신들려 고통을 겪는 아들을 데리고 와서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 있거든 우리 아이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셨나요? “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에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9:23)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믿는 자들에겐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그들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모든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16:17-18)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우리 스스로는 느낄지 모르지만, 엄청난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사명을 다할 있도록 하나님께서 엄청난 능력과 권세를 부어 주셨습니다. 마귀가 두려워할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예수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덧입고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의 말씀들을 가르쳐 지키게 하면 되는 입니다. 믿고 순종하면 됩니다. 믿고 순종하고 나가면 주님께서 도우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종하며 나가기 보다는 나는 안된다, 나는 없다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의 모세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지 이적을 보여주시면서 담대하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여전히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모세의 핑계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었습니다.

4:10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여 나는 본래 말을 하지 못하는 자이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모세가 말에 자신감이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선천적인 측면도 있고, 환경적인 측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 일찍 이집트의 왕궁에 입양되어 들어갔기 때문에, 또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떼를 돌보는 일을 너무 오래 했기 때문일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말을 해야 한다는 - 인간적인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각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을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택하신 이유가 모세가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11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을 못하는 자나 듣는 자나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여호와가 아니냐

사람이 말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12절에서 이제 가라 내가 입과 함께 있어서 말을 가르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정도면 모세가 주님, 이제 주님만 믿고 가겠나이다라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모세는 여전히 자신은 안된다, 없다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정도면 겸손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소극적인 자세인 것입니다.

13절을 보세요. “모세가 이르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주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드디어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레위 사람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아론이 이미 너를 만나러 나오고 있다!  그가 너를 너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다.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말을 주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말할 것이다. 그는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입에 하나님 같이 되리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면, 모세는 아론에게 말하고, 아론은 모세를 대신하여 말하게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것은 장단점이 있는 같습니다. 모세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함께 동역하게 점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론이 중간에 끼면서 리더십에 혼선이 빚어질 경우가 생기게 것입니다. 아론이 아무리 충실하게 모세의 말을 전달하는역할을 한다고 해도, 중간에서 자기 생각이 들어갈 있는 것입니다.

 

아론은 확실히 모세보다 말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32장에 보면,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을 , 오랫동안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아래에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아론에게 와서 모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니,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론은 백성들에게 가서 금고리를 모아오라고 했고, 금고리를 모아오자, 그것으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엄청난 죄를 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대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려고까지 했는데, 모세의 중보기도로 인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서 돌판까지 깨뜨리면서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지르게 되었느냐따졌습니다. 잘하는 아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아세요? “백성들의 요구로 없이 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금고리를 모아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송아지가 나왔나이다”(32:24)

얼마나 말을 잘합니까? 모세가 때에 후회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말이 중요하지만, 말만 잘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있습니다. 말을 잘하는 것보다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말이 아닌 하나님께서 입에 주시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고전4:20)

우리는 말에 관한 주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12, “이제 가라 내가 입과 함께 있어 말을 가르치리라복음서에서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때에 너희에게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니라”(10:19-20)

저는 설교자로서 말씀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모릅니다.

(간증)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저도 말을 못하는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사람 앞에서 서면, 머리가 백지가 되고 잊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설교 원고를 써서 가지고 오지 않으면 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학대원에 다닐 , 다른 과목은 거의 A학점이나 B학점을 받았는데, 설교학은 C학점을 받은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지금 설교자로 불러서 쓰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일은 말이나 인간의 재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모세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서 자신감을 잃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다섯 번에 걸쳐 거절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모세를 설득해서 이집트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쓰시는가?

모세가 여러 거절하였지만, 하나님은 모세와 같은 자를 불러서 쓰시길 기뻐하십니다.

(1)    나쁘게 말하면 모세는소심하고  자신감이 없었던 사람이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은 말을 못하여 자격이 없으니,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적어도 권력을 남용한다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사람은 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영적 지도자의 가장 치명적인 유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교만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겐 그런 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점을 중시하신 같습니다.

(2)    하나님은 누구를 들어쓰시는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중심이 바른 사람을 들어서 쓰십니다. 모세는 자신은 말을 못하니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도자가에 있어서 잘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심이 중요하다고 보신 것입니다.

모세에겐 중심에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젊어서 비록 실수하긴 하였지만,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민족을 보고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주님은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마음, 열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것은 무슨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소심한 성격의 사람입니다. 자신감 없어하는 성격이예요.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엔 불이 들어 있었습니다. 민족을 향한 , 고통 당하는 사람에 대한 뜨거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모세를 불러서 쓰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 속에 열정이 있는 사람, 뜨거운 사랑이 있는 사람을 귀하게 쓰십니다.

) 다윗은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 중심이 바로 잡혀 있었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고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습니다.  - 예수께 받은 사명,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위해서는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은 사람입니다.(20:24)

주기철목사 -주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를 했던 사람입니다. 무슨 신념이 강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강인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을 위하여, 주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제물로 바치려는 각오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 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이보다 두려운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을 얻는다면 이보다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목사가 죽는다고 결코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주님 밖의 다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 보다 차라리 죽고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 가는 죽음은 나의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르고, 백합도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나에게는 오로지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줄 정직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모세가 말에 있어서 자신감이 없다고 ,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4:11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못하는 자나 듣는 자나 눈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여호와가 아니냐?”

또한 4:12절과 15절을 보세요. 아주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이제 가라 내가 입과 함께 있어서 말을 가르치리라” “내가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모세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이 부적합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이집트 왕궁에서 살았기에 히브리 말에 자신이 없었을 있습니다. 또는 오랫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다보니 말에 자신이 없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모세는 자신은 안된다는 식으로 주장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말을 못하는 것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잘하는 , 달변, 다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때문에 못하겠다고 하니, 하나님은 걱정하지 말라, 내가 입과 함께 있고, 말을 가르쳐 주겠다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 지혜로운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능력의 말이 필요다하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변화시키는 , 능력있는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불러서 보내실 때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일만 맡기시는 것이 아니라, 능력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말씀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도 안되지만 자기 자신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자기가 자기를 판단하면서 나는 안돼라고 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다른 사람의 판단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고전4:1-4,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어떤 일에 불러서 쓰실지 결정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스스로 자신은 자격없다고 하면서 판단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연약한 사람들, 없다고 하며 자신감 없어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들어서 귀하게 쓰십니다.

모세 다섯 번이나 거절하던 사람, 40년간 모래 사막에서 양을 치던 사람이요,  나이는 은퇴할 나이 80이나 되었고,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가장 귀한 일에 쓰셨습니다.

베드로 갈릴리 바다의 어부였습니다.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 성격은 불같아서, 실수를 많이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예수님은 수제자로 부르셨고, 하나님의 교회의 기초를 놓는데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쓰시기로 택한 사람은 여간해서 쉽게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부족해도, 능력이 없어도, 지혜가 부족해도, 말을 못해도 쓰십니다. 중심만 바로 잡혀 있고, 겸손하고, 오직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자세가 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들어서 쓰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이 오히려 자격이 있습니다!

모세를 불러서 쓰신 하나님은 시대에 여러분을 불러서 쓰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증인으로 보내실 , 없다고 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순종하실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