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헛그물질(눅5:1~11)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연호는 세계 공통입니다. 보통 ‘2017년’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히 하면 ‘A.D. 2017년’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A.D.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서기’, ‘서력기원후’, ‘기원후’ 등으로 옮겼는데 부정확한 말입니다. 서양의 책력으로 기원후라는 말인데 ‘기원’은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그 이전과 그 이후를 부르는 연호가 바로 B.C.와 A.D.입니다. A.D.는 본래 ‘Anno Domini’(우리 주님의 시대에)이고, B.C.는 ‘Before Christ’(그리스도 이전)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말로 정확하게 번역하면 ‘주후’(主後)와 ‘주전’(主前)입니다. 이 연호는 인류 역사가 예수님의 탄생으로 완전히 달라졌음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 개개인의 인생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경 인물들, 그리고 우리 자신과 주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습니다.
본문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역시 그 날을 기점으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그의 인생이 과연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으로 인해 인생이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이미 변화되신 분들은 더 아름답게 변화되시고, 혹시 아직 분명한 변화를 체험하지 못한 분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정말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예수님이 게네사렛 호숫가에 계셨는데 무리가 몰려와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다른 이름인데 워낙 크고(동서 12.8km, 남북 20.8 km) 파도까지 쳐서 흔히 ‘갈릴리 바다’라고 부릅니다. 그때는 날이 밝은 아침이었습니다. 간밤에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몬(베드로)를 비롯해서 몇 명의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밤새 그물질을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말하자면 헛그물질을 한 것입니다.
[1] 헛그물질을 하는 인생 : 실패의 상심, 성공의 허무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것처럼 힘쓰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헛그물질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시몬과 그 친구들처럼 실패의 상심을 안고 살아가기도 하고, 성공한 후에 오히려 허무를 느끼며 몸부림치기도 합니다.
시몬 베드로의 경우에는 실패의 상심이 있었습니다. 밤새 그물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으니 얼마나 상심이 되고 자괴감이 들었겠습니까? 본문 2절을 보면서 그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눅5: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피곤에 지친 얼굴, 축 처친 어깨를 하고서 그물을 씻고 정리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입니다. 나름대로 경험도 있고 기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밤을 꼬박 정도로 엄청난 노력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허사였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계획하고 노력한 대로 인생이 척척 되나요? 그리고 실력이나 경험대로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천하의 솔로몬도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127:1~2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 ”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안 될 때가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실패하기 일쑤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정말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력을 안 해서 실패하는 것이야 당연하다고 치지만, 노력을 하는데도 안 된다고 하면 정말 상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공을 해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성공은 허무입니다. 인간의 영혼에는 하나님이 자리하셔야만 채워지는 빈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같은 사람을 생각해 보시오. 그는 엄청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승승장구했습니다. 돈도 있고 권세도 있고 쾌락도 있었습니다. 모든 게 다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허무한 겁니다. 나중에 보니까 그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에 생긴 허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도서를 써서 후세의 독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말라고, 하나님을 꼭 만나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주제는 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없는 인생의 허무, 그리고 또 하나는 하루라도 빨리 하나님을 만나라는 권면입니다. 전1:2 보면, 하나님이 없는 인생의 허무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얼마나 사무치게 허무감을 느꼈으면 짧은 한 구절에 헛되다는 말은 다섯 번이나 말했겠습니까! ‘헛되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벨’인데 ‘입김’이란 뜻입니다. 금세 사라지는 입김, 인생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특히 전2:11을 보면 분명히 인생에서 성공하고 성취했지만 허무함을 느꼈음을 간증합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정말 그렇습니다. 무언가 열심히 살면서 성취하고 많이 소유한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인생이 짧고 그 영화는 더더욱 짧다는 말입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같은 말이 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는 인생,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채 살아가는 인생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실패의 상심을 안고 살아가거나 아니면 성공하고도 허무한 가운데 인생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당시는 농경시대라 농사를 크게 짓는 사람이 최고입니다. 한 부자가 있었는데 대농입니다. 소출이 풍성해서 곡식이 차고 넘쳤습니다. 창고가 좁아서 크게 증축합니다. 거기에 곡식과 물건을 잔뜩 쌓아둡니다. 그리고 여러 해 쓸 물건 쌓아두었으니 이제 쉬면서 즐기자고 독백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하나님이 그 영혼을 부르시면, 다시 말해서 죽음이 닥쳐오면 그 모든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겁니다. 허무한 인생으로 마치게 됩니다. 남 좋은 일만 시킵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인생의 수학 이야기입니다. 인생은 괄호입니다. 이름 옆에 괄호를 표시하는데 그 안에 출생 연도과 사망 연도가 몇 년도부터 몇 년도까지로 기록됩니다. ‘아무개(19** ~ 20**)’ 이런 식입니다. 괄호 밖에 플러스( + )가 붙어 있나 혹은 마이너스( – )가 붙어 있나 하는 게 중요합니다. 제아무리 열심히 더하기와 곱하기를 해도 괄호 밖에 마이너스( – )가 붙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많을수록 오히려 더 허무해집니다.
헤밍웨이가 쓴 소설 <노인과 바다>의 스토리를 잘 아실 줄 압니다. 노인 어부가 큰 바다로 나가서 고기잡이를 합니다. 힘쓰고 애써도 잘 잡히지 않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큰 고기를 잡게 되자 너무 좋아했습니다. 큰 물고기를 배에 매달아 포구로 가져오는데 도중에 상어가 달려들어 살점을 다 뜯어먹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앙상한 뼈만 남게 됩니다. 작가는 그런 상황에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는 휴머니즘을 강조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허무를 느끼게 됩니다. 열심히 살아도 결국은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허무입니다.
인간은 오직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안에 들어와야 그 인생이 플러스( + )로 전환됩니다. 어느 꼬마가 엄마와 함께 처음으로 교회에 갔습니다. 예배당에 앉아서 사방을 두리번거렸습니다. 모든 게 신기했습니다. 그러다가 엄마에게 귓속말을 합니다. “엄마, 저 앞에 좀 봐. 큰 더하기표가 있어. 신기하다, 그치?”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대속의 의미가 있지만 플러스( + )라는 말도 틀리지 않습니다. 십자가 이전에는 아무리 성공한 인생이라도 마이너스( – )입니다.
솔로몬은 세상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더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실패하면 상심이 되지만 그래도 다음에 성공하면 된다는 기대감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크게 성공해본 사람은 그 다음에 대한 기대감보다 오히려 허무감을 느끼게 됩니다. 솔로몬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도서의 결론으로 독자들에게 뭐라고 권면합니까? 전12:1~2 “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시몬 베드로는 다행히 실패의 상심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실패가 그 자체로 끝나면 비극이지만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오히려 축복입니다. 허무 가운데 인생을 마치면 비극이지만 그 전에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축복입니다.
[2] 예수님을 만난 인생 : 승리의 기쁨, 소명의 보람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생의 변화를 체험합니다. 승리의 기쁨, 그리고 더 나아가 소명의 보람으로 나아갑니다.
본문 2절을 보면 그때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눅5: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베드로와 동료들이 그물을 씻고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예수님이 배 두 척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두 배 중에서 의도적으로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신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이미 예수님과 베드로는 아는 사이였습니다. 몇 번을 만났는지, 만난 지 얼마나 오래 됐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히 만난 적이 있고 예수님에게 은혜도 입은 적도 있습니다. 눅4:38~39을 보면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 앓고 있을 때 고쳐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관계가 있는 가운데 베드로의 배에 올라탔다면 분명히 의도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무리와 너무 가까워서 말씀을 전하기 불편해서 거리를 두려고 배에 올라타신 이유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보다 베드로를 만나서 그를 변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3절을 봅니다. 눅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신 후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는 꼼짝없이 그 말씀을 다 들어야 했습니다. 그 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밤을 새우고 허탕을 쳤으니 얼마나 피곤하고 짜증이 났겠습니까? 그런 가운데 말씀이 끝났습니다. 그 순간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제 집에 돌아가도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를 콕 찍어서 말을 거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눅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건 상식적으로 볼 때 아주 황당한 일입니다. 밤새 수고했지만 허탕을 쳤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바다는 낮이 되면 고기가 얕은 데로 모여들어서 깊은 데서 그물을 내리는 것은 비상식적입니다. 게다가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갈릴리 바닷가에서 잔뼈가 굶은 베테랑 어부입니다. 그 반면 예수님은 외적으로 보면 누구입니까? 아버지를 도와 목공일을 하던 목수 출신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당연히 짜증을 내야 합니다. 참았던 감정이 폭발할 수도 있습니다. “이 분이 정말 눈치 없네. 예의도 없으셔. 설교도 엄청 길게 하시더니 다시 그물을 내려 보라니! 아이, 짜증나.” 이래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순종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말씀에 빠져들었고 마음속에 믿음이 생긴 겁니다. 그 전에 장모의 병을 고쳐줘서 특별한 분인 줄은 알았지만 이제 말씀을 듣고 나서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가 순종하는 모습으로 보십시오. 5절입니다. 눅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부릅니다. 말씀을 잘 가르치는 아주 훌륭한 랍비라는 겁니다. 그만큼 그의 마음속에 예수님에 대한 기대감 혹은 작은 믿음이 싹텄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에는 맞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한번 해보겠다는 반응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엄청난 일이 벌어집니다. 눅5:6~7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베드로와 친구들이 베테랑 어부들이니까 더욱 더 놀랐을 겁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의 상식, 경험, 기술, 그리고 노력을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베드로의 전공을 어업이고 예수님의 전공은 목공이라고 판단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전공은 전부입니다. 올(All) 전공입니다. 어업뿐 아니라 그 밖에 모든 것도 다 예수님의 전공입니다. 그분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아들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면에서 인간의 경험이나 지식을 넘어서는 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고전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어폐가 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에게 무슨 어리석음이나 약하심이 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이 인간의 지식이나 능력과 전혀 비교가 되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생 승리의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승리의 기쁨을 체험합니다. 성경의 많은 이적들 가운데 나타나는 공식이 있습니다. “믿음 + 순종 = 기적”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7대 이적을 살펴보십시오. 이 공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날 아침 어부 가운데 놀라운 능력을 체험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이와 같은 승리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다음 장면을 보면 좀 이상합니다. 아니, 많이 이상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어떤 모습을 합니까? 예수님에게 떠나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을 잘 모시면 계속 대박 날 텐데 참 이상합니다. 어떤 분은 그래요. 예수님과 동업해서 활어횟집 차리면 잘 될 거라고 말입니다.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그래야 됩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요? 8절을 봅니다. 눅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처음에는 베드로가 친구들과 고기가 너무 많이 잡히니까 기뻐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닌 겁니다.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이 죄임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칭호가 달라진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에서 “주여!”로 달라졌습니다. 어두운 가운데 있을 때 몰랐는데 밝은 빛 가운데 나오니까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떠나달라는 말을 한 것은 역설적인 겁니다. 예수님이 정말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연인끼리 사랑하다 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사랑하지만 자신이 너무 부족하니까 떠나달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자기가 떠나면 될 텐데 왜 그럴까요? 오히려 붙잡아 달라는 절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바짝 엎드립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지금까지는 최고 관심사가 고기를 많이 잡는 육신의 문제였지만 이제는 영적인 문제가 느껴졌습니다. 생사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제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해도 생명을 잃으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고기를 많이 잡는 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상기하면서 두려움을 느낀 겁니다. 다행히 예수님이 그를 붙잡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목적이 바로 그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눅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cf. 막2:17)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떠나 달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구원해 달라는 영혼의 절규였습니다. 이게 축복입니다. 예수님 앞에 회개하는 자는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베드로는 그 날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축복을 넘어 그에게 놀라운 은혜가 임합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눅5:10 “ …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러자 베드로도 그의 동료들도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눅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사람을 취한다는 것은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뜻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그의 이름이 시몬에서 베드로로 바뀐 것도 그런 사실을 암시합니다. 지금까지는 ‘생계형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명형 인생’이 된 것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그는 평생 고기나 잡다가 인생을 끝냈을 것이고, 그 전 날 밤 헛그물질을 한 것처럼 평생 헛그물질이나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인생이 변화됐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로! 그래서 그는 인류 역사 상, 아니 천국 역사상 위대한 인물로 우뚝 서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계형 인생에서 소명형 인생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베드로처럼 기존의 직업을 그만 두고 모두 다 복음 전도자 목사나 선교사가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거라사 광인의 치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너무 고마워서 예수님을 따라다니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했나요? 막5:18~19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그 사람은 사도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가 살던 집과 지방으로 돌아가서, 즉 삶의 자리에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각자가 갖고 있는 적성(재능)에 따라 다릅니다. 베드로는 사도로 부르셨지만 다른 사람은 기존의 직업이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든 직업이 소명입니다. 흔히 직업을 영어로 ‘calling’ 혹은 ‘vocation’이라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 ‘vocare’(=부르다, call)에서 유래합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이와 같이 소명을 발견해야 허무가 없어집니다. 그렇지 않고 생계형 인생이나 성공 지향적인 인생으로 살아가면 성공해도 허무합니다. 영원히 가치 있는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 소명을 발견하면 일의 보람을 느낍니다. 인생이 뿌듯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고도 풍요로운 것 같은데도 무의미하고 허무한 것은 바로 소명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스펄전 목사의 일화입니다. 그가 어느 집회에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시간에 큰 은혜를 받은 한 남자가 그에게 선교에 헌신하고 싶으니까 선교단체를 소개해 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그러자 그는 그 남자와 이렇게 대화했습니다. “당신의 직업이 뭐죠?” “저는 증기기관차 기관사입니다.” “당신의 동료들은 구원 받았나요?”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제가 미처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가서 그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 후에 하나님이 계속 당신을 부르셔서 거부할 수 없으면 그 때 다시 오십시오. 그때 선교단체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 소명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는 좋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소명을 발견하고 그에 걸맞게 살아갈 때 비로소 헛수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주의 일’이 곧 소명입니다. ‘주 안에서’ 하는 수고가 곧 소명입니다. 그런 가운데 힘쓰고 수고하면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허무하지도 않습니다. 인생의 보람도 느끼고 장차 천국에서 상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 또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지난 한 해 인생의 바다에서 얼마나 열심히 그물질을 하셨습니까? 혹시 헛그물질이 아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실패한 헛그물질이든 성공했지만 허무한 헛그물질이든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부디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처럼 말씀대로 살아 승리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소명을 발견함으로 인생의 보람을 맛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원히 후회 없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