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18:21-35, "용서와 축복으로 새해를 열라"
 

 

 

오늘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듣고 실천해야 말씀으로, 하나님께서는 용서에 관한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용서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최우선적인 단계입니다. 용서는 사람의 성품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용서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 인간들에게 용서를 베푸시고, 그와 같이 용서를 베풀며 살라고 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용서가 쉬웠다면 예수님께서 용서에게 대해 강조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용서는 어렵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원수 갚은 , 복수에 관한 것들은 많아도 용서에 관한 것들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부분으로 나눌 있습니다.

(1)    21절과 22절은 용서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2)    23절부터 34절은 용서할 모르는 종의 비유입니다.

(a)    23-27-1 달란트 빚을 탕감해 주는 자비

(b)    28-34- 데나리온 때문에 동료를 옥에 가두는 무자비

(3)    35절은 비유의 결론입니다. 용서받은 자로서 마땅히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부분에서 예수님은 죄가 교회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말씀,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말씀과, 교회가 용서의 권한을 갖고 있음을 말씀하셨을 , 베드로가 용서에 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시에 유대인 랍비들이 누가 잘못을 , ‘ 용서해 주어야 한다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일곱 정도 용서해 주면 되겠지요!’라는 생각으로 질문을 것입니다.

18:21, “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베드로는 일곱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셨나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베드로와 예수님의 문답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용서에 대한 생각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세번 정도, 많으면, 일곱번 정도 용서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계 자체를 정하지 말고 끝까지, 영원히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용서에 대해 베드로처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한계를 정하지 말고, 숫자를 세지도 말고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의 차이점을 쉽게 이해시키시기 위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      먼저 18:23-27절을 읽고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달란트 빚진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엎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팔아 갚게 하라 하니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갚으리이다 하거늘 종의 주인이 불쌍히여겨 놓아 보내며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성경에서는 빚의 탕감 사건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건은 결코 간략한 사건이 아닙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1 달란트 - 얼마나 돈인가? 우리 중에 누구도 평생 만져볼 있는 돈이 아닙니다. 달란트- 6000데나리온입니다. 데나리온-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1만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미국에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백불정도로 계산하면, 60 달러에 해당합니다. (한국돈으로 계산하면 하루 품삯을 10만원-6조원에 해당함)

예수님의 비유에서 종이 자신과 아내와 자식들과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도 갚을 없는 양의 돈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에서 놀라운 것은 임금의 자비심입니다. 세상에 이런 임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갚을 없는 종이 참으소서라며 빌었을 , 주인이 깨끗하게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양의 빚을 탕감해 것입니다.

여기서 임금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죄인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죄가 그렇게 무거운 것입니다. 스스로 씻을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가 그렇게 엄청난 것입니다.

 

임금이 1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이야기는 무엇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알듯이, 하나님의 구원(구속) 은혜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모든 죄가 사해진 것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모든 원죄가 사해졌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되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도 없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드릴 있게 자체가 일만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모든 죄가 사해졌으며,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게 것입니다.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뿐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도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깨끗이 씻겨진 진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3:23-24,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되었느니라

8:1-2,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되, 동에서 서가 같이 우리 죄과를 멀리 옮기셨습니다.(1-3:12) 또한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해 주신 후에는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31:34)

 

2)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임금이 자비를 베푼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비를 베풀며 살았으면 얼마나 좋아겠습니까? 그러나 이야기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습니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는 종은 나가서 동료에게는 무자비하게 대했습니다.

 

본문 18:28-30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데나리온 빚진 동료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1 달란트에 비해 데나리온이 얼마나 적은 돈인가? 6조원에 비하면 1000만원정도 것입니다. 한채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의자 하나 값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보다 심한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갚을 없은 돈이지만, 일백 데나리온은 충분히 갚을 있는 양입니다.

동료의 부탁 자기가 임금에게 했던 부탁과 너무나 같은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자신이 용서 받은 것처럼, 용서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어리석은 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받은 은혜를 망각하고, 동료에게 무자비하게 굴었습니다. “그사람의 목을 잡았고”, “ 빚을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둔 것입니다.”

임금이 베푼 은혜에 대해 정반대로 행했습니다. 자비를 무자비로, 숨을 쉬게 해준 것을, 목을 잡는 것으로, 옥에서의 해방을, 동료를 옥에 가두는 일로 갚았습니다.

 

3)      예수님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못된 종에 관한 이야기가 임금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빚을 탕감받는 종이,  자기에게 적은 빚을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소식을 들은 임금이 어떻게 했나요?

18: 31-34절을 같이 읽어봅니다. “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일을 알리니 이게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빚을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그러면 그의 동료도 Happy할수 있었고, 자신도 영원히 감옥에 오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자비를 남에게 베풀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도 옥살이하고 자신도 다시 옥에 들어와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게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서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빚과 감옥에 대해 말씀하실까요?

죄는 빚을 지는 것과 같습니다. 갚을 때까지 자유를 빼앗습니다. 잠도 편히 없습니다.

죄를 짓고 용서받지 못하는 것과 남을 용서해 주지 않는 것은 옥에 갇히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마음 옥에 갇힌 것처럼 답답합니다. 용서를 통해서 풀어내 주어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도 스스로 감옥에 갇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 이야기 속의 어리석은 종처럼  용서해 주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옥에 갇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용서 받았다가 무자비하게 살다가 다시 옥에 살던 종이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할 감옥에 다시 갇히게 되었을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수천만불의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좋아하다가 복권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억울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감옥에서 계속 , , 하며 후회하였을 같습니다.

“1만달란트 탕감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할껄!”

감사가 입술만의 감사가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확장되도록 !”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을 ,  깨끗이 용서해 줄껄!”

 

4)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전히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18:35 말씀을 같이 읽어봅니다.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이 명심하고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베풀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리스도인에겐 용서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해도 되고, 원치 않으면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용서해 주어야 하며, 용서를 통해 죄도 용서받아야 하겠습니다.

본문 35절을 다시 읽어보세요. 교리적으로 보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읽어보세요. 우리가 진심으로 형제 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우리도 하나님께 용서받기 힘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폐의 호흡과 같기 때문입니다. 숨을 내쉬지 않으면 들이마실 없습니다. 반드시 숨을 내쉬어야 다시 숨을 들이마실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죄를 용서해 주시 않으려고 하면, 용서의 숨을 들이쉴 수도 없습니다. 내쉬는 것과 들이마시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라이트, 마태복음3, p.68)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지은 자를 사하여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사함받았으면서, 형제 자매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주기도를 드릴 수도 없고, 하나님의 용서가 취소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야기에서 만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이 동료를 용서해 주지 않았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시 옥에 갇혔으며, 영영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남을 위해서도 하지만, 용서는 자신을 위해서도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면, 하나님의 용서가 계속 유효해집니다. 용서하면, 용서한 사람이 자유롭게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일만 달란트의 탕감에 비유됩니다. 이웃의 잘못이나 우리가 용서해 주어야 부분은 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도저히 용서해 없는 일도 주님의 은혜에 비하면 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용서를 몸소 체험하고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 나옵니다. 요셉과 다윗입니다.

(1)    요셉

우리는 요셉이 요셉이니까 형들을 용서해 주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형들에게 당한 것을 생각해 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17 소년 때에, 형들의 시기, 미움, 악행 때문에 어느 죽을 고비를 맞이했을 뿐아니라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고대 시대의 노예는 인간 대우를 받을 없었습니다. 짐승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노예 시장에서 팔렸고, 매도 많이 맞았으며,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집트 경호대장인 보디발의 집서 자리잡을 시점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과 질투, 모함으로 인해 억울한 옥살이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옥살이- 오늘날의 감옥과 다릅니다. 한번 들어가면 나올 까지 빛을 보지 못하는 지하 감옥이었던 것입니다.

 

형들로 인해 이런 억울한 고통, 시련을 겪게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형들에 대한 원망, 미움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용서했습니다. 당했을 곧바로 용서해주지는 못했다고 해도 어느 시점에 형들을 용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용서를 선택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용서가 되지는 않았겠지만 어는 시점에 용서를 결정한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후에 모든 사람을 용서해 주기로 것입니다.)

아마 그때부터 요셉은 노예였지만, 자유했으며, 감옥에 갇혔지만 마음만은 평화로왔을 것입니다. 만약 형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품고 있었다면, 물리적인 감옥이 아닌 마음의 감옥에 갇혀 영원히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에 하나인 요셉과 형들의 만남 장면에서 요셉이 어떻게 고백합니까?

요셉의 정체가 밝혀졌을 , 형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땅에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하나님으로 삼으시고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45:5-8)

 

요셉이 이렇게 용서해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용서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로 용서하지 못하고 힘들어 하십니까? 사건()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야곱이 죽은 후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용서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빠집니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엔, 아버지 때문에 요셉이 참았지만,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요셉의 마음이 변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요셉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형들에게 용서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뿐만 아니라 은혜 위에 은혜를 했습니다. 형들의 가족들까지 돌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으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더라” (50:19-21)

 

(2)    다윗

다윗도 요셉 못지 않은 억울한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전쟁터에서 사울왕과 나라를 위해 충성했는데 돌아 것은 사울왕의 시기와 모함, 살해 위협이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사울왕을 피해 도망칠 밖에 없었습니다. 고향, 가족, 나라까지 떠나서 방랑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거의 10여년간 피신해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울왕에 대한 미움, 원망, 복수심이 자랄 있었을 텐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죽일 있는 절호의 찬스를 두번씩이나 맞이 했을 , 부하들이 기회는 여호와께서 주신 기회라고 때도, 그들을 말리며 죽이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참은 것입니다.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가?

억울하게 누명을 씌운 사람, 경제적으로 손해를 끼친 사람, 말로써 계속 상처를 입히는 사람 용서해 주고 싶어도 용서해 주기 어려운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 그래도 용서해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6:14-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깨달을 비로서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해 있습니다. 1 달란트에 비해 데나리온이 얼마나 적은 양입니까?

 

용서의 실천

어제 새벽에 기도데 대해 말씀드리면서 기도에 대한 지식, 이론을 많이 알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능력이 없는 것처럼,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용서에 관한 말씀을 듣고 용서해야겠다고 다짐을 해도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주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용서는 용서를 넘어 화해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선 마음으로 용서해 주어야 하지만, 다음 단계는 가능하면 화해로 이어져야 하겠습니다.

용서는 일방적일 있지만, 화해는 쌍방적입니다. 다시 만나는 것이고, 다시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또한 용서는 축복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까지 축복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5:43,-44, “ 너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사도 바울의 권면도 비슷합니다.

12:14,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2:18-20,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그 머리 위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용서의 선물

용서가 주는 축복은 말로 표현할 없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의 평안을 얻을 있습니다. 용서한 마음은 천국, 용서하지 않은 마음은 지옥입니다.

막혔던 기도가 뚫릴 있습니다. 기도를 막는 것은 미움과 같은 죄입니다. 용서해주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기도를 막을 있습니다.

치유의 은혜가 임합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병을 고치시기 전에 먼저 용서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왜요? 용서가 치유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새해 주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일년을 시작하게 하신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은혜에 대한 순종은 용서라고 믿습니다. 누구든 무슨 사연이든 완전히 용서해주시고 자유를 누리실 있기를 축원합니다.

해도 예수님을 본받아 용서를 실천하며 화평케 하는 자들로 사실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