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 6:9-13)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결국은 ‘기도’라고 대답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전능하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파이프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전능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한편으론 참으로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높으신 어른이나 직장의 상사나 어떤 위엄 있는 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 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참으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물며 우리와 같은 존재인 ‘그 어떤 사람’도 아니고,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하는 것인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바르게 기도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저도 가끔씩 성도님들로부터 “목사님, 전 아직 기도를 잘 못하겠어요. 어떻게 해야 기도를 잘 하는 거예요?” 하고 고백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사실 기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것 같으면서도 또한 어렵습니다.

 또 한편, 이 기도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다 가지고 있는 형태입니다.  모든 종교들이 다 자기 나름대로의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자칫하면 이방 종교화되기가 쉽고, 타락하기 쉬우며 또한 변질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 같이’ 그렇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잘못된 기도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것 같이 하지 말고, “기도할 때는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시고,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럴 때 우리는 자연히 “그러면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바르게 기도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어떤 ‘기도에 길잡이가 될 수 있는 모범’을 우리는 찾게 마련입니다.
 “기도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어떤 내용을 어떤 단계로서, 또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가?  마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바른 모범’을 가지고 있으면, 그 모범에 따라서 기도하면 바른 기도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주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하고 요구하는 장면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래서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도에 대하여 ‘기도란 무엇인가?  참된 기도는 따라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가르쳐주신 다음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며 ‘참된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어떤 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던 중, 그분이 이런 놀라운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떤 교회에 가보았는데, 모두들 큰 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흔들면서 열광적으로 하기에, 자기도 그렇게 해 보니까 속에 얹힌 체증이 싹 내려가는 것 같이 후련하고, 기도하는 맛이 나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기도하는 형태에는 그렇게 울부짖으며 갈구하는 기도가 있는가 하면, 조용히 묵상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도 있고, 금식하며 하는 기도, 혼자 하는 기도,  여럿이 둘러앉아 돌아가며 하는 기도, 그 외에도 여러 형태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형태’들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도는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하는 것입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한참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대답하시더군요. “뭐,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겠지요. 나의 답답함을 기도를 통해 해소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는 말입니까?
 기도할 때, 아무리 청산유수와 같이 유창하게 기도를 하였다고 해서 그가 과연 ‘기도’를 한 것이겠습니까?
 누구에게 한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한 것입니까?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며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여간 큰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르쳐 주신대로 그렇게만 기도하면, 우리는 바른 기도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우리는 불과 15초 정도면 다 외울 수가 있습니다.  또 아무리 큰 장소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서 천천히 한 음성으로 같이 드린다고 해도 불과 30초 정도 밖에는 걸리지가 않습니다.
 또 흔히 교회에서 모임이 끝날 때면 모두 한 목소리로 이 ‘주기도’를 하니까, ‘주기도’를 할 때는 “아, 이제 끝나는가 보다” 하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입에 따라 외우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문을 우리에게 그저 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끝낼 때 사용하라고 주신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를 한 다음에 하루에 몇 번씩 이 기도를 외우라고 지시하기도 합니다만,  잘못된 것이지요.
 이 기도는 몇 번이고, 몇 만 번이고 반복하여 읊조리는 데에 그 권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가 ‘기도하는 데’에  그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어떻게 하십니까?
 ‘주기도’를 할 때면 그저 외우십니까?  아니면 그 내용 하나하나를 생각하시며 그대로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까?
 또 여러분이 하시는 여러분 자신의 개인적인 기도는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은 참된 기도를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이 주님의 기도를 배우세요.  그래서 여러분의 개인 기도가 ― 길게 하든 짧게 하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하던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하든, 어떤 형태로 하시든 간에 ― 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시며, 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와 같게 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기도는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올바른 기도가 됩니다.


 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불과 열 글자밖에 되지 않는 말입니다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다 담겨 있습니다.  바로 이 열 글자의 뜻만 우리가 바르게 이해한다면, 주기도의 남은 모든 뜻까지도 우리는 바르게 이해한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기도하십니까?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입니까?  소리치고 흥분함으로 생활에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하십니까?

 ‘내 기도의 대상자가 누구냐?’ 하는 데서부터 우리의 기도하는 내용도, 자세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하는 것은 모든 종교에서 다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도, 힌두교도, 회교도, 무속종교도 ― 그것이 고등 종교든 하등 종교든 ―  모든 종교에는 다 이 기도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기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 기도의 대상자를 내가 누구로 알고 있느냐’ 하는데 따라서 기도하는 내용도 형태도 달라지게 됩니다.
 그가 돌부처 같은 분이라면, 나는 두 손바닥이 닳도록 빌어야 할 것입니다.
 그가 만일 멀리 계신 분이라면, 나는 큰 소리를 질러야만 할 것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그의 귀가 바로 내 입술 앞에 있다고 여겨지면, 여러분은 속삭이게 될 것입니다.
 또 그가 만약 매정한 분이시라면, 여러분은 울며불며 매달려야 할 것이고, 그가 너무 엄격한 분이시라면 여러분을 숨소리하나 크게 내쉬지 못하고 겨우 읊조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여기 아주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그가 바로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라고요!!
 여러분은 바로 여기서부터 우리가 크리스찬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하나님을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음이란 것을 느낄 수 있으십니까?

 이 세상 어떤 종교도 자기의 신을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는 종교는 없습니다.  심지어는 구약 성경에서조차도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다’하고 가르쳐는 주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아버지라 부르라’고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이 귀한 의미를 여러분은 느끼고 계십니까?

 사실 “아버지 하나님!” 하는 이 말이 그저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기 위하여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같은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본래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예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 하나님께로 우리가 ‘양자가 되는 영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저는 어떤 승려를 알고 있습니다.  이분은 그들이 말하는 ‘참선’이란 기도를 통하여, ‘일각—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손가락 다섯 개를 모조리 불에 태우는 공양을 드렸습니다.  그러고서도 응답이 없어서, 애타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너무나도 멀리만 계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분이었기 때문인 것이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는 그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시라면, 그에게 우리가 손가락을 태워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느 아버지가 자기 자식의 손가락 태우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가 꼭 큰 소리를 지르며 불러야만 응답을 하십니까?  꼭 울며 가슴을 쳐야만 겨우 용돈 몇 만 원을 허락해 주십니까?!!

 또 한편, 우리의 기도하는 말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세요.
 만약 여러분의 아버지가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버지임’을 확신하신다면, 아버지께 어떤 식으로 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아주 유능하시며 누구보다도 더 현명하시며, 돈을 잘 벌어 오시는 존경하는 나의 아버님이시여! 이 불효한 소자가 용돈 몇 만원이 필요하여 이렇게 아버님께 엎드려 빌며 간구 하나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말씀드리면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야 이놈, 너 미쳤냐?”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정말로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이심’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정말로 여러분의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기도는 ‘사랑하는 아버지께’ 사랑 받는 ‘자녀가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것들입니까?

 어떤 사람이든 ‘기도하는 것’을 보면, “아, 저 사람과 하나님 사이는 바로 저런 사이이구나!”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돌부처에게 빌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저 멀리서 위엄을 부리며 군림하고 있는 그 어떤 존재에게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사랑하는 아버지’께 사랑 받는 자녀로서 기도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물론 어떤 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가령 마르틴․루터 같은 분은 그의 아버지가 술주정을 잘하는 분으로서 얼마나 난폭하고 무서운 분이셨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거리감이 느껴져서, 기도할 땐 그저 “하나님!” 그랬지 여간해선 ‘아버지’라고 부르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사실일겁니다.  가령 빈민굴에서 태어난 소년이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밤낮 술에 취해 있고 툭하면 엄마나 때리는 그런 아버지였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 ‘어떤 아버지 상’을 머리에 떠올리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에, 여기 계신 아버지이신 분들은 참으로 조심을 하셔야합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딸과 아들이 바로 하나님을 ‘꼭 여러분과 같은 모습’으로 연상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평소에 무뚝뚝하게 굴면, 자녀들에게 심어질 하나님의 모습은 자연히 무뚝뚝한 것이 될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만일 시간만 나면 가족들을 제쳐두고 TV만 보시든지 낚시만 가시든지 골프만 치러 가시면, 하나님의 모습도 여러분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그렇게 새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는 ‘아버지’란 단어는 불완전한 것이지요.  우리 육신의 아버지들이 모두 불완전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에 단순히 ‘아버지’란 말만을 쓰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는 이 말을 ‘아버지’라고 하는 말 앞에 덧붙이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는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신 ‘장소’를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 “하늘에 계신”이란 이 말은 ‘불완전한’ 우리 인간적인 아버지 상에 대하여 ‘완전한’ 아버지 되심을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주님이 부르신 것은 “우리의 완전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속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불러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어떤 하나님이, 또는 어떤 느낌이 떠오르십니까?!!


 다음으로, 이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 생각해야 할 아주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부를 때, 이 말이 내포하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첫 번째로, 이 말은 “아버지의 뜻에 내가 순전히 복종하겠습니다”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 했을 때, 여러분은 단순히 응석을 부리는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권위’를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그가 나의 아버지이시기에, 때론 나의 잘못에 대해 매를 들어 때리기도 하십니다.

 제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가끔씩 부모님이 계신 곳에 내려가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곤 하였습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의 목사로서 이 강단에 서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제가 아버지를 뵐 때면 그 분은 언제나 저의 ‘아버지’시고, 저는 그저 그분의 아들일 뿐입니다.
 아무리 연세가 높으신 분이시라도 저에게 말을 낮추거나 명령조로 얘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목사이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시며, 저는 늘 그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에도 이와 같습니다.
 내 뜻과 내 요구가 아니라, ‘그의 뜻―그의 요구’가 언제나 내 생각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아버님’이시고, 저는 그분의 ‘아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 되심’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하시는 기도의 내용을 먼저 면밀히 살펴보세요.  여러분이 하시는 기도의 내용에는 ‘나의 뜻’을 더 많이 담고 ‘나의 주장’을 더 강요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더욱 따르며 ‘그 뜻에 순종하겠다’는 자세를 더 담고 계십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두 번째로, ‘아버지’라고 하는 이 말은 ‘권위’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랑’을 의미합니다.

 제 아버님은 아주 엄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잘못을 저지르면 매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출타하신 동안, 서재에서 제 동생들과 놀다가 그만 아버지가 귀중히 여기는 물건 하나를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평소에 아버지께서 서재에 들어가선 장난하지 말라고 일러 오신 터라  여간 겁나는 게 아니었지요.
 제 동생이 그러더군요.  달아나자고요.
 그러나 우리 형제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아예 회초리를 해 갖고 가서 잘못했다고 빌자고요.
 그래서 각각 회초리를 하나씩 만들어 들고선 아버지가 들어오시자 말자 맏이인 제가 앞장서고 동생들이 뒤따라 일렬로 쭉 들어가서 절을 먼저 꾸뻑 하고, 회초리를 내놓고서는 “잘못했습니다!” 그랬지요.
 아버지께서 회초리를 들고는 손바닥을 내놓으라고 그러시더군요.  이제 불이 나는가 싶어 눈을 꼭 감고 있는데, 살짝 한 대씩 톡톡 건드리시더니만 “그만 가거라” 그러시더군요.  환히 웃음을 띠시고 말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아빠지요.  아버지는 사랑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내가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우리는 그 앞에 나가 나의 잘못을 아뢸 수 있고, 또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4절과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이 말씀,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아빠’라고 하는 말은 ‘아버지’라는 말보다 훨씬 친근감이 있는 호칭이지 않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Abba, Father)”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아람어 ‘아빠’라는 말이 우리말의 ‘아빠’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가정에서 어린 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아주 친근하게 부르는 말입니다.
 “아빠!” 할 때, 우리는 어리광 부리듯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 아빠에게 스스럼없이 친숙하게 다가가듯이, 우리는 신뢰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아빠”하고 부르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아빠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스바냐 3장 17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이 나만 보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잠잠히 사랑하시며 나로 인해 즐거워하고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어린아이가 “아빠”하고 부르며 달려 나갈 때, 마주 달려오시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우리를 기뻐하심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바로 나의 ‘아빠’가 되십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 말에는 바로 ‘모든 사람을 용납하는 사랑’이 그 속에 포함되는 그러한 말입니다!

 아주 오래 전입니다만, 제가 한번은 어떤 교도소에 당시 제가 지도하던 대학생들을 인솔하고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 있는 수감자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그중 한 분은 재범을 하고 몇 해째 복역을 하고 있는 모범수였는데, 이분이 재범을 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하더군요.
 처음엔 초범이라 가벼운 형을 치르고 나왔는데, 세상에 나오니 아무도 자기를 반겨주지 않더랍니다.  똑같은 세상인데도 도무지 자기가 소속될 데가 없더란 것이지요.  이웃과 친구는 물론, 심지어 식구들까지도 자기에게 거리를 두고 대하더랍니다.
 그가 이렇게 절규하더군요.  “나는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로지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함께 ‘소속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학교에서, 또는 어떤 단체에서, 소위 ‘왕따’라고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사실 내가 어디에 소속되지 못한다는 것! ― 이것은 얼마나 그 사람을 절망으로 내어 몰아버리는 그러한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모든 우리 인간의 차별과 장벽들을 제거하여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하나님을 우리 모두가 다같이 ‘아버지’라고 부르니, 그러면 우리는 모두 누구인 것입니까?
 “우리 아버지” 하는 기도는 그러므로 우리 모두를 ― 그가 가난하건 부유하건, 무식하건 유식하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다 하나님의 자녀로 ― 그래서 같은 식구로, 같은 형제요 자매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드릴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군중 가운데에서도 결코 어느 한 사람이라도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가령 우리가 이 세상 그 어느 누구의 관심에도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경우에 있을지라도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아무도 우리를 돌보아주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기도’를 드릴 때마다 감격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란 말은 이같이, 우리들 인간 사이의 그 어떠한 배타적인 요소들도, 차별하는 요소들도, 다 제거해 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면, 내 주위의 모든 분들은, 바로 우리의 이웃들은, 모두 우리의 형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기도하는 자는, 또한 여기 함께 있는 우리 모두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누구누구까지도 다 용납하며, 사랑을 베풀며 섬기겠다는 귀한 다짐을 우리는 마음속에 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정말 우리가 이렇게만 바로 기도할 수 있다면, 바로 이 열 글자의 기도로서 모든 것이 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와 이웃들’과의 관계까지도 다 정립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바른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까?
 만일 그러시다면,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다면 “아버지여, 아버지 손에 나의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아빠! 나도 사랑해요”하고 진실 된 사랑의 응답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신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을 해치는 원수까지라도 여러분의 형제로서 사랑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의 사람’이 되며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체니(Elizabeth Chaney)란 분이 쓴 “종달새와 메추라기”란 시가 있습니다.  이 시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종달새가 메추라기에게 말했다.
  난 정말 알 수가 없어.
  왜 저 인간들은 그렇게도
  허둥대며 걱정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메추라기가 종달새에게 대답했다.
  친구야, 아마 그건 저 인간들에겐
  너와 나를 돌보아 주시는 것과 같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없기 때문인가 봐.”
이 시가 의미하는 바가 여러분의 가슴에 와 닿으십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우리는 모두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르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 기도의 의미를 깊이 마음속에 새기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이 기도가 바로 여러분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빠입니까?  만일 그렇게 여러분이 기도하시면, 하나님께서는 어린 나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적으로 생활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며, 내가 쓰러졌을 때 일으켜 주실 것이며, 내 걸음을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까?  만일 그렇게 여러분이 기도하시면, 그분은 아버지이시기에 앞장서서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현세에 사는 날 동안 나를 돌보실 것이며, 나의 날들을 풍족하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까?  만일 그렇게 여러분이 기도하시면, 나는 그분께 영원히 속해 있으며, 내가 이 세상에서 그분의 지도를 받고 양육을 받는 동안 ‘그 어떤 세력’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나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목적을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참되게 기도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