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6:9-13)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면서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 주셨는데,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간구를 세 개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것”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한 간구를 또한 세 개로 가르쳐 주셨는데, “일용할 양식”과 “죄
사함”과 “시험과 악에서 구함 받음”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이 세 개의 간구 안에서 ‘우리 인간의 삶 전체’가 다 들어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 인간은 ‘육’과 ‘혼’과 ‘영’으로 이루어진 존재이지 않습니까? 이
기도는 바로 우리 육신에 필요한 것, 우리 정신에 필요한 것, 그리고 우리 영혼에 필요한 것을 각각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몸’도 하나님께 기억하신바 되었고, ‘혼’도 기억하신바 되었고, ‘영’도 기억하신바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존을 계속할 수 있기 위해서는 ‘꼭 있어야만 하는 그것’에 대해서 관심하십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음식을 먹음으로써 생명을 계속 유지해야만 하는
그런 존재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육신에게 꼭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의 삶을 돌보아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과도 같은 뜻’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항상 베푸시며 돌보시는 하나님이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 영적으로만 생각하는 나머지 신앙생활이란 ‘영적인 삶’에만 관한 것이고, ‘육신의 삶’은 세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육신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선 우리 주님의 생애를 여러분 한번
잘 살펴보세요. 예수님은 우리가 일상의 생활을 위해서 어떻게 땀을 흘리고 있는가 하는 그 형편을 자상히 알고
계셨습니다.
과부가 헌금하는 동전 ‘두 렙돈’의 의미를 알고 계셨고,
잃은 동전을 찾기 위해 애쓰는 자의 심정을 우리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시장에서, 가계부를 이리저리 맞추어가며 식료품을 사야 하는 가난한 자의 그 고충을 알고 계셨고,
그래서 ‘한 푼에 두 마리 하는 참새’를 사는 여인에 대하여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의
양식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주셨습니다.
먼동이 트는 어느 새벽,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저 멀리서 배를 타고 제자들이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무엇인가
그들을 위해서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을 준비하고 계셨겠습니까?
‘기도회’였겠습니까? 사실 그들에겐 기도가 필요한 때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이 보였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하라는 기도는 안하고 잠만 자다가, 예수님이 잡히시자 신앙이고 무엇이고 다 팽개치고는 달아나기만 했었던 그들이기
때문이지요.
또는 그들이 깜짝 놀라며 감격하도록, 부활하신 주님의
장엄하신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셨겠습니까? 사실 그것도 그들에겐 필요한 때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십자가로 인해서 낙심하였고, 믿음을 잃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여기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주님의 모습을 여러분
한번 곰곰이 상상해보세요.
주님의 그 발은 십자가에서 상한 발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발을 이끌고, 해변 가 자갈밭을 다니시면서 밥 지을 나무를 주워 모으십니다.
또한 그의 손에는 커다란 못 자국이 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손으로 생선의 비늘을 벗기고, 다듬고
씻으시면서 아침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영광된 주님께서 이렇게
손수 제자들을 위해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계시는 이 모습을, 여러분은 지금 그려볼 수 있으십니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와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의 필요에 대해서 ― 우리가
식료품을 사야하고, 방세를 내야하고, 필요한 의복을 구입해야 하고, 아이들을 위해 교육비가 들어가야 하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 필수품을
위해서 돈을 마련해야 하고, 보험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필요한 줄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말은 단지 우리가 먹는 식물(食物)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용어는 그 의미상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요구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 모든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우리에게 다 주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미리 다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의 기록을 여러분, 면밀히 한번 살펴보세요. 천지를 창조하시는 일이
얼마나 엄청나고 중요한 일입니까?
이런 큰일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누군가의 도와줄 손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도와줄 ‘사람’을 제일 먼저 만드신 다음에 그들에게 ‘나를 좀 도와다오’ 할 것 같은데,
성경에 보면 첫째 날에도 둘째 날에도 셋째 날에도, 빛을 만드시고 하늘을 만드시고 땅을 만드시고, 식물을 만드시고 동물을 만드시고 그래서 천지의
만물을 다 만드시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당신 혼자서 다 만드셨습니다.
우리 사람은 언제 만드셨습니까?
여섯째 날, 그것도 모든 천지의 만물들을 다 만드신 다음에, 제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쉬셨다고
하였습니다. 더 이상 일하지 않으신 것이지요.
그런데 이 일곱째
날은,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고 나서 맞이하는 첫 번째 날이 됩니다. 바로 이 날, 그들이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도와서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미리 다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약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오늘은 우리가 맞이한 ‘첫날’인데,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어라고
대답하셨겠습니까?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예비해 놓았다. 그러니
걱정 근심하지 말고, 믿고 순종하며 살아라!”
아담과 하와를 위해 엿새 동안
준비하시고, 에덴동산을 마련하셔서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실과를 나게 하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모든
아버지가 그러하듯, 하나님께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들을 위해서 ‘해 주시기를 원치 않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며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다음 두 번째로, 그러면 이와
같은 의식주 문제를 위해서 우리가 간구를 드리되 ‘어떤 내용’으로 드려야 하겠습니까?
여기에 대해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하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오늘’이라고 하는 이 말 (지금 우리가 쓰는 개역개정판 성경은 “오늘”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그전에 쓰던 개역 성경은 “오늘날”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이 “오늘날”이란 말도 ‘오늘’이라고 하는 바로 ‘이 날’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자칫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여러 날들’―말하자면 앞으로 다가 오게 될 모든 날들에 대해서 생각하며, 그래서 그날들에 필요한 양식까지 미리미리 준비하듯 간구해야 함을 연상하기가 쉬웠습니다. 그래서 개역개정판 성경은 ‘오늘’이라고 바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용할’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그 날 그 날에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그 날 그 날에 필요한 양식을 그 날에 구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말은 ‘우리들이 살아감에 있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우리의 삶의 자세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는 매일매일—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을 위하여 매일 매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며,
매일 매일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확신해야 하며,
또한 매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며 감사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을 축복해
주시고 책임져 주시며, 우리 인간사회 전체가 아름답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혹 어떤 분들은 우리가 이렇게 매일
매일 간구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이미 다 아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시는데(마6:8), 만일 그러하다면 “다 아시는 것들을 어째서 계속 구해야만 하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써 생각해 보세요.
‘기도’는 우리로
하나님과 접촉하고 만남을 유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가리켜서 “하나님과의 만남”이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매일매일 기도하며 아뢰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이런 것을 모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써, 그 자녀에게
바로 이런 긴밀한 관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한편,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들을 미리 다 ‘큰 한 뭉치’로써 주신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그 탕자처럼 그가 받은 선물을 모두 다 탕진해버리고, 더 필요할 때까지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방탕하게 지내기가 쉽습니다.
또는 어리석은
그 부자와도 같이, 스스로의 오만 속에 빠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모두 아시지만―그래서 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시고 미리 예비해 두셨지만―우리가 항상 기도하며 감사하기를 원하시며,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당신께로 기도하며 나오는 것을 보실 때에 이것이 하나님께는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같이 ‘우리가 항상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하고 기도하라 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초청인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육신의 필요에 대해서 관심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의 삶을 위한 필요들을 미리 다 예비해 두셨고, 또한 채워주고
계십니다.
매일 아침마다 태양이 떠올라서 우리가 사는 이 지구를
따뜻하게 비춰 줍니다. 단 일분이라도 햇볕이 지구에 비취지를 않는다면, 땅위의 모든 생명체들은 다 죽어 없어져버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비가 와서 땅을 적셔줍니다. 흙이 있고 그 속에 거름이
있습니다. 씨앗 속에는 생명력이 있고, 공기 속에는 생명체를 위한 산소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매일 매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것이며,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섭리는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들 주위에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경시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것들에 대해서 얼마만큼 매일 매일 기도하며 감사하고 있었습니까?
미국에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 1723-1793)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으로서,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의 전신인 뉴저지 대학의 총장을 지낸 분이십니다.
이분은 학교에서 약 2마일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이륜마차를 몰고 학교에 출퇴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루는 이른 아침에 이웃 사람 한 분이 흥분하여서 그의 서재로 뛰어 들어오면서 외칩니다.
“위더스푼 박사님, 저와 함께 감사기도를 드립시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저를 구했습니다.
오늘 아침 마차를 타고 오는데, 말이 뛰기 시작해서 이륜마차는 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고 말은 달아났지만, 나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섭리입니까?”
위더스푼이 대답합니다. “그래요,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훨씬 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제가 말씀드리지요.
나는 그 길을 수백 번도 더 지나다녔지만 말이 달아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마차도 깨진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저도 조금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당신에게 지금 내린 것보다도 더욱 풍성히 내리고 있은 더 좋은 예가
아니겠습니까?!!”
위더스푼이 한 이 말을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바로 우리의 매일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말이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옆 올림픽 대로에는 차들이
시속 80km 이상씩 쌩쌩 달리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그리로 다니고 있습니다.
어떤 때 우리는 교통사고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 크리스찬은 “비록 사고는 났지만 사람이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하나님의 은혜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그게 뭐가 감사하냐고요. “정말
하나님이 감사한 하나님이시라면, 그 사고조차도 나지 않게 해 주었어야지…” 하고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그 사람은 지금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어제도 오늘도 우리는 차를 타고 다녔지만, 우리에게 차사고가 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고속도로 갓길에서 차를 멈추고,
뒤에서 따라오는 차를 기다려 본 적이 있습니다.
차를 타고 달릴 때에는
‘시속 100km’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별로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막상 차 밖으로 나와서보니까, 옆으로 쌩쌩 하고 지나가는 차들의 속력이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더군요.
그런 속을 우리는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매일 매일을 지켜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매일 매일에, 우리는 얼마만큼 ‘감사하며’ 지내고 있었습니까?
그
매일 매일을 위해 우리는 얼마만큼 기도하고 있었습니까?
매일 매일을
위해 그 날 그 날에 기도하라! 감사하라!! ―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이 기도는 우리의 매일의 생존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매 순간 인식하면서 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용할’이란 이 말은
우리에게 규칙적으로, 꾸준히 계속하여 하나님께 나오도록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매일같이! 꾸준히 규칙적으로! ―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잔칫집에 간다고 몇 끼를 굶고서 그런 다음 잔뜩 먹으면, 그것으로 보충이 됩니까? 오히려 건강을 해칠 뿐이지요. 양식이란 끼니를
거르지 않고 매일 매일 먹어야지, 한 두 끼 잘 먹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하는 것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흥집회 다녀왔다고 몇 주일
교회예배를 거르고, 며칠씩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겠습니까?!!
또 한편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면 ‘한 번에 하루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직 우리에게 오지도 않은 미래에 관하여 근심하거나 불안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의학자인
오슬러(William Osler, 1849-1919)박사는 미국의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에 초청받아가 행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제의 문을 잠가버리십시오. 그리고 내일의 커튼도
닫으십시오. 그러면 오늘은 완전한 날이 됩니다. 인간 구제의 날은 바로 지금입니다. 뚜렷한 오늘이라는 시간을 영위하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일 대학생들에게 “어제 먹었어야 할 묵은
빵에 대한 불평도, 내일의 빵에 대한 걱정도 아니라, 오늘의 빵이야 말로 사람의 입에 넣을 수 있는 유일한 양식”임을 말하면서 “오늘의 양식을
주옵소서”하는 이 기도로써 하루를 시작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며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하셨습니다.(마6:27,34)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으로서, 매일 매순간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의 진정한
문제점은, 우리들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있지 아니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구하는 것들을 살펴보세요.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저축하고 쌓아둘
그런 것을 구하고 계십니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을 믿고
삽니다. 매일 매일 감사하며 삽니다.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아니하고 삽니다. 그러기에 서로를 도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인생에는 욕심이 있고,
불평이 있고, 싸움이 있고, 원망이 있고, 온갖 불행이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필요한 만큼의 양식,
적절한 양의 필수적인 양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넘어서면 ‘욕심’이 되고 말며, 부족하면 물질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주린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30장 8-9절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하고 기도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주신 것에 만족하고 기뻐하며 감사하게 되며, 이렇게 감사할 줄 알 때 복된 삶이
더욱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하고 기도함에 있어서 우리가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할 중요한 사실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이 사실을 믿고 기도하라는 것은, 이를 위해 우리가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실제로 어떻게 응답되는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 기도만 하고 앉아서 손 안에 양식이 떨어지기만 기다린다면, 그 사람은 굶어죽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음식을
만들어서 사람의 입에 떠 넣어주시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하고, 또한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따라서, 그 기도를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가 믿고
또한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열심히 다 해야 함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가 말씀하신 것처럼, 행함이 없는 기도는 행함이 없는
신앙과 마찬가지로 ‘죽은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약3:26). 이 기도는 하나님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또한
우리의 노력과 실천이 없이는 하나님도 아무 것도 이루어주시지 않는다는 기본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또한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 “일용할 양식”이란 단순히 ‘먹는 양식’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양식’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인간은 육과 혼과 영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이란 ‘육을 위한 양식’과 함께, ‘혼과 영을
위한 양식’까지 사실상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의 양식을
생각할 때, 우리는 거기서 영의 양식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8장 3절 말씀은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점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2-35)
유대인들은 이 떡이란 말에서 먹는
떡만을 생각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은 마실 물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의 사람은 이 눈에 보이는 떡을 보면서 또한
‘신령한 떡’을 생각하며,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할 때 “내 영혼의 양식도 주셔서 주님의 장성한 그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나아가서는 매일 세수를 하면서도 “내 육신을 이렇게 깨끗이 함과 같이 내 영혼도 깨끗이 씻어 주옵소서”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며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하는 이 기도는,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릴 때 ‘나에게’라고 하지 않고 ‘우리에게’라고 기도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함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한번
살펴보세요. 가난과 기근과 궁핍의 문제가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의 문제는 넉넉지 못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나누어지지 못한 데 있다고 전문가들이 공통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식물은 충분하고도 남으리만큼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해마다 음식물 쓰레기로 인한 그
처리비용만도 수 조원이 소요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점에 대해 성 바실리우스(St.
Basilius, 330-379)가 일찍이 한 말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집에서 썩고 있는 그 빵은 굶주린 이들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발장에서 곰팡내를 풍기고 있는 그 신발은
신발 없는 이들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옷장에 쌓여 있는 그 옷은 헐벗은 이들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금고에서 그 가치가 절하되고 있는 그 돈은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그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양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면서 먹을 때,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임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남을 위해 살 수 있는 넉넉한 삶이라는 뜻입니다. 남을
섬길 수 있고 함께 나눌 수 있는 복이 이미 내게 주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 성인 남자만 5천명이나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배가 고픈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이 두루 살펴보았지만, 어린 소년이 점심으로 싸가지고 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어리 외에는 더 이상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이건 혼자서 먹기에도 부족하다”고 단정을 짓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을
그것을 주님께로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 손에 들려질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오천 명을
먹이기에도 충분하였고, 먹고도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하였습니다.
우리가 베풀며 나눌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풍성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땅에서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것을 나 자신에게서부터 확대하면 가족과
친구가 되고, 좀 더 확대하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되고, 더 확대하면 나라와 민족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애국애족하는 사람이었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우리에게!”―이렇게
기도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이 주실 줄을 믿고, 이를 입으로
고백하며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렇게 하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고 하였습니다. 여기 ‘쓸 것’이란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 곧
일용할 양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생각해보면
그저 감사할 것밖에는 없습니다. 햇빛을 주시고, 공기를 주시고, 물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영생을 주신 하나님께 어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구할 때도
감사하고, 구한 것을 받을 때도 감사를 하여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사하는 생활을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에서 그
보배로운 피를 다 쏟아 부으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하여 준비해 두셨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계신 텔레비전,
타고 다니는 자동차, 지금 입고 계신 의복… 어느 것 하나라도 주님의 뜻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땅에서
나온 것이며, 우리의 손이 닿는 곳에 예비해 두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미 오래 전에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진실로 우리에게
응답을 이미 해 준 문제입니다.
여러분,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세요.
일용할 양식! 매일 매일의 양식! ― 이것이 우리의
기도여야 하고, 우리의 감사여야 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매일 매일의 우리의 삶을 지켜주시고, 채워주시고,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매일같이
기도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