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6:9-13)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기도입니다.  어떤 면에선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두 주일에 걸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기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가 지금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중요성은 기도하는 ‘내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슨 내용으로 어떻게 기도하든, 내가 하는 그 기도가 ‘길었는가, 짧았는가?  큰 소리로 하였는가, 작은 소리로 하였는가?  유창하였는가, 더듬거렸는가?  훌륭한 말을 썼는가, 서툰 말을 썼는가?’ 하는 이런 것들에 있지 않습니다.
 바르고 참된 기도의 핵심은 오직 기도하는 그 기도의 대상자이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기도를 하고 있는가?’ 하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쉬운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 어려운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며 참된 기도의 모범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의 모범대로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자에 대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찬이 됨으로서 누리게 되는 축복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모든 축복가운데서도 가장 큰 축복이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것입니다.  만약 임금님을 내가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럼 나는 곧 무엇인 것입니까?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무한하신 하나님! ― 다른 사람은 감히 두려워서 근접도 못하고 얼굴도 들 수 없어하는 그 하나님을, 우리에게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용납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 줄 깨닫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예배드리기 위해 하나님께로 나올 때마다 ‘나의 아버지께로’ 나온다는 감격을 가지십니까?
 우리는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계속 그 대상자를 깊이 인식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를 드린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 있으며,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축복하시며 사랑으로 감싸주심을 상기하며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다음에, 우리가 기도해야 할 가장 우선되는 사실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실제 하고 계시는 기도를 먼저 곰곰이 살펴보세요.  제일 먼저 여러분은 무엇부터 기도를 하십니까?
 우리가 기도함에 있어서 기도하는 그 ‘내용’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간구하는 그 내용의 ‘순서’도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가 시작되고, 그리고 제일 마지막은 송영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시작과 마지막 송영 사이에 모두 여섯 개의 간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섯 개의 간구들은 다시 둘로 나눠지는데, 먼저 앞의 세 개의 간구는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것이고, 나머지 세 개의 간구는 우리 사람에게 필요한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에게 계시해 주셨던 ‘십계명’과도 그 형식이 같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십계명은 두 개의 돌판에 새겨져 있지 않았습니까?  그 첫 번째 돌판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돌판은 우리 인간에게 관련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 항상 우선적인 것임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기도가 항상 우선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모든 간구에 앞서서 먼저 이 간구부터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출애굽기 3장에 보면, 거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루는 모세가 미디안 광야 호렙산 기슭에서 양을 치고 있었는데, 저 멀리 떨기나무에서 불이 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나무가 실재로는 불에 타고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그곳으로 갑니다.
 사실 그 나무는 하나님께서 불길의 모습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이었지요.  이 사실을 깨달은 모세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멈췄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는데, 그 첫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바로 이 장면이 아주 중요한 장면입니다.
 여러분,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이겠습니까?  현대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예배하기위하여 예배당에 들어올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그런 말인 것입니까?  또 그냥 신발만 벗으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당시 풍습에 있어서 ‘신을 벗는다’는 것은 상대방 앞에서 가장 겸손하게, 그리고 가장 큰 존경을 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내가 만나려는 그 하나님 앞에서 내 발의 신을 벗는 것! ― 다시 말해서 올바른 존경과 공경을 표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과 자세로서 예배하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들의 기도하는 자세를 곰곰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때’에 기도를 합니까?  또 주로 ‘어떤 내용’으로 기도를 합니까?
 어떤 분이 연구프로젝트로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하는 기도에 대해서 조사를 하여 보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는 대부분 그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라든지, 또한 어떤 간절히 요구되는 사항이 있을 때에 기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함에 있어서 ‘내가 필요할 때, 급한 일을 만났을 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합니다.  또 한편 기도함에 있어서도 ‘우리들 자신의 필요한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들이 대부분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분명히 우리가 기도하며 구해야 하는 내용들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도함에 있어서 그 ‘순서’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보세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하는 우리들을 위한 간구가 거기에 분명히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앞서서 무엇부터 간구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까?

 기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면, 제일 먼저 내가 해야 할 것은 ‘내 발에서 신을 벗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찬양이 먼저라는 말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이것이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가장 우선되고 첫째가 되는 간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먼저 이 ‘이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는 ‘이름’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도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분의 이름은 우리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이름은 모두가 다 우리의 부모님이나 또는 다른 어떤 분이 지어준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이 세상의 누군가가 지어준 이름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신들과 우상들 또한 그게 다 사람들이 지어서 붙여준 이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당신 스스로 계시하신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나타난 ‘이름’이란 것은, 오늘날 우리가 단순히 어떤 사람을 “아무개야”하고 부르는 그런 이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9편 10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 여기서 ‘주의 이름을 아는 자’란 말은 하나님을 자기 나라 말로 뭐라고 부르는지 그것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본성과 특성과 인격을 아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7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하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 또한 하나님의 이름이 영어로는 ‘God’이라고 한다든지, 또 “여호와”라고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하는 하나님의 본성과 특성과 인격에 대하여 나타내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결국 ‘이름’이란 바로 ‘하나님’ 그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셨는데, 바로 이 ‘거룩’이라는 개념이 중요합니다.
 ‘거룩’이란 말은 성경 원어로는 ‘하기오스’인데,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일상적인 것들과는 다른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에 보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은 다른 여섯 날들에 대해 안식일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면, 우선 옷차림부터도 집에서 그냥 막 입던 옷들과는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장에도 가고 교회에도 간다면, 이것은 ‘구별하는 마음’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거룩하게! 무엇인가 구별된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또한 ‘거룩’이라는 이 말에는 어원적으로 ‘무겁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함부로 부르거나 소홀히 하지 아니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남용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드림에 있어서 ‘자기들의 소원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자기들의 소원에 맞추는 것’으로 잘못된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히 여긴다’는 것은 중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높이며 경배한다는 의미가 그 속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받으시오며”하는 이 말에서 여러분은 이 기도가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가 거룩하게 만들어드려라”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보실 수 있으십니까?

 불교에서 보면 대웅전에 모실 부처를 만들 때―그것을 돌로 만들든 나무로 만들든 금으로 만들든―아무리 정교히 그 형상을 다 갖추었다고 해도 곧바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어느 고명하신 대사가 만들어진 그 부처의 눈에다가 점을 찍는데, 이것을 ‘점안식’이라고 그러더군요.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 앞에서 절을 할 수 있는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이 말도 그와 같은 의미의 말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우리가 거룩하게 만들어 드려라!’ 하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돌부처에게나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에 대하여 어떻게 이러고저러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가령 예를 들어서 어떤 미술가가 있는데, 그것도 전 세계에서 최고가는 미술가라고 하십시다. 
 그런데 그가 만일 말하기를 “내가 하늘에다가 그림을 좀 그려야겠다!” 하고 나선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여기시겠습니까?  아무리 그가 당대에 최고가는 미술가라고 할지라도, 여러분은 그를 미쳤다고 비웃으실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인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을 결단코 거룩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는 이 기도를 우리는 신중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이 기도는 곧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와 영광과 찬양을 드리며, 그의 이름을 높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께서는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받아 마땅한 그 자신의 영광을 받으셔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찬양 없이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생각해서도 안된다.”
 따라서 이 기도를 요즈음의 우리 어법과 기도하는 식으로 조금 의역을 하여 본다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만이 거룩하게 존중되기를 내가 소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에 이르렀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고 기도하라고 하신 이 말씀은,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이 내게서 가장 거룩한 존재로 나타나시옵소서’—‘하나님께서는 나를 온전히 주장하시는 분이 되시옵소서’ 하는,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머리를 숙이는 간구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p.380)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 무슨 말씀입니까?
 내 마음 중심 가장 귀한 곳에 ‘보좌’를 예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보좌를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항상 나의 마음에 주인이 되시고, 나로 하여금 먼저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내가 ‘나를 먼저’ 생각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만약 본다 하더라도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만 보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내게 주시오, 주시오’하는 기도만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누가복음 12장 16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어리석을 부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둔 다음에, 그가 스스로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내가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여기 이 어리석은 부자가 하고 있는 말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나의, 나를 위하여…’  바로 ‘내가, 내가’하는 말들이지요.  거기엔 하나님이라고는 없습니다.

 “내게 해 주시고, 내게 베풀어주시고, 내게 이루어 주시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거기에 있는 것은 ‘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요!  그러니 무슨 응답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보고, 그런 후에 나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도 바로 보고, 나도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경험하는 일입니다만, 기도할 때 나의 형편과 처지에 대한 답답하고 다급한 이야기들을 먼저 쏟아놓기 시작하면, 분하고 억울하고 안타까워서, 나중에는 내가 누구한테 기도하고 있는지를 모를 지경에까지 가게 됩니다.
 울다가 원망하다가 보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나의 사정만이 보여지니, 이것이 기도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응답 받는 기도’를 하시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대로 기도하세요.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여,
 나의 첫 번째 소원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최우선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나를 주장하시옵소서. 나를 쓰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치 않아서가 아닙니다. 
 ‘내게’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실 것을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보좌 ‘가장 중심’에 계셔서,
 나로 하여금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게 하시고,
 다른 무엇보다도 당신의 이름을 훼손시키는 것을 두려워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우리가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우리가 먼저 기도해야할 내용인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높이 들어내어 ‘영광 돌릴 수 있도록’ 역사 하여 달라는 뜻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대하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들어 낼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런 점들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남들과 얘기하는 가운데, 남을 칭찬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그 사람을 욕되게 하고 기분 나쁘게 하는 그런 말들이 있지요.
 가령 어떤 부부를 보고 “야, 너 마누라 참 잘 얻었다. 너보다도 몇 배나 더 났다”고 하면, 물론 그 말은 내 아내를 칭찬하는 말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사실은 내게 있어서 여간 욕된 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식 칭찬만은 예외인 것 같습니다.
 가령 어떤 아버지에게 “참으로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아버지보다도 더 준수하고, 더 훌륭하게 될 것 같습니다”하고 말하면, 그 말을 듣는 게 결코 싫지가 않거든요.

 어느 분이 첫 번째 딸에 이어서 둘째 아기로 아들을 보셨는데, 그 아이의  돌잔치에 초대받아 갔습니다.
 많은 하객들이 오셨는데, 그때 어느 분이 그러시더군요.  ‘야 그 녀석, 제 애비보다도 훨씬 더 잘생겼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고서도, 아빠 되시는 그분은 그저 싱글벙글만 하시더군요.  아마도 부모 되시는 모든 분들이 다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와 하나님은 무슨 관계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아들’이 잘 되어야, ‘아들’이 잘 하여야, ‘아버지’가 영광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면서 “그러므로 너희 빛을 비춰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은 나를 주시합니다.  내가 잘못하면 여러분, 이 나 자신만이 아니라, 내 아버지가 욕을 받습니다.  그러나 내가 잘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나는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생활’로서 하나님의 크심과, 그의 영광과, 그의 영화로운 속성을 반영해야만 합니다.  우리 크리스찬은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산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기 때문입니다.
 힘들지만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는 자체’가 바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오늘 하루를 그렇게 산다면, 내가 산 것은 나만의 하루를 산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의 ‘크리스찬’으로서의 삶을 살아감으로 인하여, 바로 우리의 하나님—우리의 아버지의 이름이 크나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서 우리는 크나 큰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이만큼 살았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이름이 이만큼 거룩히 여김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한 삶입니까?
 얼마나 값있는 삶입니까?
 얼마나 축복 받는 삶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늘 이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제 여기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이름들을 생각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많은 이름들이 계시되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몇 개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들이 여러분에 의해서 ‘어떻게 기도되고 있으며 영광 받고 있는지’를 면밀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엘로힘’이라고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엘로힘’이신 하나님이 하늘과 땅,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유일하신 창조주로서 영화롭게 하고 있습니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하는 기도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경외하며 영광 돌려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엘로힘’과 유사한 단어로 ‘엘 엘리온’이라고 또한 성경은 계시하여 주십니다.  이 이름은 “지존자이신 하나님”을 뜻하는 말로써, 통치하시며 섭리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대해서 불평을 하거나 또는 근심과 염려를 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엘 엘리온’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라고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구속주’로서 계시하여 주시는 이름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에서 구속을 약속하신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노아에게 말씀하신 분도 ‘여호와’이십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서 ‘구세주’가 태어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 바로 “예수”라고 하는 이름입니다.

 또 성경을 하나님을 ‘아도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주”라는 뜻입니다.  바로 우리 삶의 주인이십니다.  이 주님(아도나이)의 이름이 우리로 인하여 존귀하게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그분은 진정 여러분의  ‘아도나이’(주님)이십니까?
 그분은 여러분의 충성을 받고 계십니까?
 그분은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입니까?
 이와 같은 질문들에 우리가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여러분은 그분을 ‘주’로써 거룩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이렇게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가 아들이 되었다면 아버지의 ‘성(姓)’을 이어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성’을 이어받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그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높여야만 합니다.

 연세대학교의 부총장을 지내신 한 교수님께서 이런 간증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60년대 중반에 이분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LA 공항에 도착하였더니 마중 나오기로 한 친구가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LA의 ‘와츠 지구’에서부터 흑인들의 폭동이 일어나서, 시내로 통하는 모든 통신시설이 두절이 되고,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처음 와보는 미국 땅에서 얼마나 앞이 깜깜하였겠습니까?  영어가 유창한 것도 아니고 동서남북도 모르는데, 이제 어떻게 할 것입니까?
 어쩔 줄 모르고 그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는데, 어떤 중년의 남자 한 분이 자기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더라고 합니다.  그분은 자기의 친구가 온다고 해서 마중을 나왔는데, 이 폭동 소식을 미리 알고서는 아예 오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당신은 마중 나오기로 한 분이 나오지 않은 것 같은데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더랍니다.  그러면 내일 어떤 방도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딱히 어떤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 분을 따라가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저녁과 아침까지 잘 대접을 받고, 그리고 그 분이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편지에 쓰여 있는 친구 집 주소를 가지고 그 곳까지 데려다 주고는, 빠이빠이 하며 가더랍니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서, 그분에게 이름과 주소 또는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하면서 후에 꼭 은혜를 갚겠다고 하였더니, 그분이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My last name is same as yours.  I am Christian.”
 (나의 성은 당신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크리스찬입니다.)
그리고는 그저 악수를 하고는 “God bless you!” 하면서 가더랍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있는 모습입니까?
 그 교수님은 그 후로, 정말 자기도 크리스찬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겠다고 ― 크리스찬으로서 살아가며, 그래서 ‘입’으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서 기도하며 ―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크리스찬으로서 살아감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며, 그렇게 지금껏 살아오고 있노라고 간증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이어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그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높여야만 합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우리 또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하실 때 다른 모든 간구에 앞서서,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의 마음 가장 귀중한 곳에 늘 계시옵소서.  나를 주장하시옵소서.  그래서 나의 삶이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서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게 하소서!!”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드려야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는 여러분께,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크신 축복으로 확실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라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시 91: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