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6:9-15)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생을 가리켜서 흔히들 “고해(苦海)”와 같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고통의 문제’를 안고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인생에는 이와 같은 고통이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여러분, 실제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에게 있는 이 고통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난 때문입니까, 혹은 명예 때문입니까?
 고통의 이유는 바로 ‘죄와 죽음’ 때문입니다.  몸이 아플 때에도 사실 ‘아픈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혹 이것 때문에 죽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 크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시금 생각해 보면, ‘죽음’보다도 더 큰 문제는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죽어도 천국에 간다는 것만 확실히 보장된다면, 사실 죽음인들 문제이겠습니까?
 결국 죽음의 뒷면에는 죄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고, 병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죄의 형벌로써 망한 것 같고, 또한 형벌로써 병에 걸린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고통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가 바로 우리 인생에게 가장 큰 걸림돌인 것이지요.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 죄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로마서 7장 18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 속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것과 함께 악이 또한 있음을 보면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하고 애통해 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며 절규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이도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면,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습니까?!!
 
 혹 어떤 분들은 ‘죄’라고 했을 때, 그 말 자체에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도 짓기에 ‘죄인’ ‘죄인’ 하느냐고 말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든 생명체는 살아있는 동안에 반드시 부패물을 부산물로 배출하게 됩니다.  우리의 몸을 보세요.  매일같이 죽은 세포들을 몸 밖으로 밀어내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우리는 ‘때’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또한 음식을 먹은 다음에는 소화를 시키고 난 찌꺼기를 몸 밖으로 꾸준히 내보내고 있습니다.
 이 같은 ‘배출물’들을 우리는 몹시 더럽고 지저분하게 여깁니다만,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보세요.  내게서 이같이 부패물이 생긴다는 것은 곧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죽은 몸에는 이 같은 것들이 생기지가 않지 않습니까?  ‘살아있기 때문에’ 부산물로서 이같은 부패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겨나는 부패물들! ― 이것은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들입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이것들을 반드시 몸 밖으로 배출시켜야만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병에 걸리고 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살아있는 영혼도 살아있기 때문에, 반드시 부패물을 생산하게 마련입니다.  이 영혼에 있어서의 부패물을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죄’가 있다고 하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육체이기에 ‘때’가 나오듯이, 우리 영혼도 살아있기 때문에 ‘죄’가 생기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죄’라는 부패물도 우리는 반드시 밖으로 배출시켜야만 합니다.  이 ‘죄’를 우리가 밖으로 배출시키지 못하면, 우리의 영혼도 ‘병’이 들고 마는 것이지요.  그래서 반드시 배출시켜 씻어야만 하는데, 이렇게 ‘밖으로 배출시키고 씻는’ 이것을 죄에 대한 ‘회개’와 거기에 대한 ‘용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살아있는 존재에게는 절대적으로 있어야만 하는 요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먼저 육신의 삶을 위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신 다음에, 두 번째로 우리 영혼을 위하여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기도하라 하신 그대로 기도하게 될 때, 우리가 이 기도에서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기도문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겠다”는 ‘용서’가 전제되고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용서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복’이 여러 가지로 많이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누구나 반드시 받아야만 하고 또한 계속적으로 받아야 할 ‘복’은 바로 이 ‘죄에 대한 용서’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가장 큰 목적도 결국은 ‘죄 사함’을 받고 천국 가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죄’라고 하는 말이 무수히도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은 모두가 ‘죄’라고 하는 이 한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성경 원어로 보면 이 ‘죄’에 대해서 다섯 개의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는 단어가 ‘하말티아’(hamartia)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과녁을 벗어났다는 뜻으로써,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표준에 이르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파라바시스’(parabasis)란 말인데, 줄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따라가야 할 바른 길에서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파라프토마’(paraptoma)란 말인데, 미끄러진다는 의미입니다.  말이나 감정이나 행동을 잘 조절하지 못하고 순간적 충동에 이끌리어 실족하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는 ‘아노미아’(anomia)인데, 불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어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오페이레마’(opheilema)란 말인데, 이 말은 무언가 지불되고 갚아져야 할 ‘부채’, 다시 말해서 ‘빚’이란 뜻입니다.

 오늘 이 기도에서 사용되고 있는 ‘죄’라고 하는 단어는 바로 ‘오페이레마’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가리켜 마땅히 지불해야 할 것을 지불하지 않은 ‘채무—빚’이란 뜻으로써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빚’이라고 했을 때, 이 ‘빚’에 대해서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빚’이라고 하는 것은 갚지를 아니하면 언제나 남아있게 되고, 또한 늘어나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빚’이란 갚지 않고서는 해결할 방법이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갚지 않고 떼어먹는 사람도 더러 있긴 합니다.  그러나 떼어먹는다고 해서 ‘빚’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거기다가 더 큰 죄를 더하게 될 뿐이지요.  언젠가는 집달리에 의해 전 재산을 차압당하거나 구속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도 ‘빚’이 되어 하늘나라 장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 이하에 보면, 모든 사람마다 이 ‘죄란 빚’이 하나도 빠짐이 없이 다 기록되어 있다고 하시며, 거기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된다고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또 한편, ‘빚’이란 “왜 내가 빚졌던고” 하고 후회하고 뉘우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죄’가 그러합니다.  뉘우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들 잘 못 생각하기를, 혼자 뉘우치고 이제부터는 다시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결단하면 죄가 사해지는 줄 아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빚’이므로 갚지 않고서는 해결되지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빚’은 장부에 기록되어 있음으로, 지금 당장은 갚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결산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빚지고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만, 그러나 언제까지나 통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결산하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갚기 전’에는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아주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 ‘빚’이 너무나도 커서 나로선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면, 그럼 어떻게 됩니까?
 내가 갚지 못한다면, 누군가가 대신이라도 갚아야 합니다.  그래서 빚보증 섰던 사람들이, 또는 가족들이, 대신 책임을 맡아서 나서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죄란 빚’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갚지를 못할 것이기에,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일곱 개의 말씀을 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요한복음은 “다 이루었다” 하는 말씀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 이루었다”고 하는 말을 성경원어로 보면 ‘테텔레스토아(tetelestoa)’란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완료수동형의 단어로써, 이 말의 뜻은 “모든 빚이 다 갚아졌다—pay off 되었다” 하는 뜻입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갚지 못하는 ‘죄의 빚’을 예수님에 의해 대신 다 갚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라 하신 말씀에는, 이미 우리의 ‘죄란 빚’을 다 갚아 주신 ‘하나님의 용서’가 전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제 네가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용서하고파 하는 심정’으로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과도 같은 ‘하나님의 심정’을 볼 수 있으십니까?

 가끔 보면, 어떤 아이들은 잘못을 한 뒤에도 부모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지 않습니다.  그러면 엄마가 매를 때리면서 “잘못했다고 그래라”고 재촉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입을 꼭 다물고 고집을 부린다면, 매를 때리는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아파집니까?
 매를 때리지만 사실은 애원을 하지요.  제발 잘못했다고 그래달라고요.  잘못했다고 한마디만 하면 어머니는 다 용서할 터인데…,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우리를 위해 ‘용서’를 준비해 두시고, 우리가 용서를 빌기만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용서받지 못할 죄라곤 없습니다.  십자가의 구속으로 갚지 못할 죄라고는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회개’하기만 하면, 그 순간 우리의 죄는 이미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따라서 만약 우리 죄가 용서받지를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우리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은 그래서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용서하지 못하신다” 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미국의 제7대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1767-1845) 재임 중에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조지 윌슨(George Wilson)이라는 사람이 우체국에서 강도 행각을 벌이다 강도와 살인죄로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주위의 친구들이 그를 위해서 탄원하였고, 드디어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특별 사면령’을 얻어내었습니다. 
 이제 그는 이 사면령에 의해서 법적으로 무죄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감옥에 갇혀있을 이유가 없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어찐 일인지 이 조지 윌슨은 사면령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감옥 밖으로 나가지를 아니합니다.
 법적으로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죄해진 자’를 감옥에 계속 가둬둘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법학자들 사이에 일대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대법원에서 이를 다루게 되었는데, 그때 내려진 결론이 이와 같습니다.  “이미 그에게는 사면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 사면은 그가 받아들이기까지는 효력이 유보된다.”
 결국 조지 윌슨은 ‘사면, 즉 용서’는 받았지만, 그 용서를 본인이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인해서, 결국은 사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든 인류가 처한 입장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의 ‘죄의 빚’을 다 갚으시고 “너희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사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고 맙니까?  결국 자기의 죄로 인해 사형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 이 간구로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모두가 다 죄인임’을 알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간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죄를 깨닫는 것 없이는 죄 용서를 받기 위한 기도를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는 바로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죄인 것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서 아직도 ‘용서의 확신’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이 있으십니까?  바로 지금이 기회입니다.  하나님께 용서함을 구하세요.  기도하세요.  회개하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와 ‘구세주’로 시인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죄가 없는 사람’으로 인정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자녀 됨의 특권’을 누리게 되십니다!!


 다음으로 이 기도의 중요한 점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고 하는 바로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들은, 그동안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모두가 결코 빠뜨려서는 아니 될 중요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 이것들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것입니다.  또한 ‘일용할 양식’도 우리의 육신생활에 있어서 없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독 이 ‘죄의 용서’에 대해서만은,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다 가르치신 다음에 계속 이어서, 다시금 설명을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교환조건으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이겠습니까?
 또는 우리가 남을 용서하면,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도 우리가 ‘용서받게 되는 권리’를 가지게 된다는 말이겠습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기도문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이 기도는 결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하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사실을 근거로 해서 용서하소서’ 라고 되어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의 용서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조건이라고 구태여 말한다면, 오로지 ‘용서를 구하라’고 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용서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하나의 문제점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회개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알 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알 수가 있습니다.  참된 ‘회개의 증거’가 바로 우리의 ‘용서하는 정신’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하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마치 ‘비’와 같아서, 하늘로부터 누구에게나 다 내립니다.  비가 오면 모든 땅과 초목들이 촉촉이 젖어들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비는 분명히 내리고 있지만, 우리는 커다란 비닐 보자기를 가지고 나무를 덮어서 빗물이 전혀 나무에 닿지 않게도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비닐 보자기’를 씌우는 것과 같은 일이 우리들에게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남을 용서하지 아니하려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 이런 것들이 바로 ‘비닐 보자기’가 되어 이것으로 우리의 영을 뒤집어씌우게 되면, 결국 나는 내 스스로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그 ‘자비’를 차단시키는 결과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용서를 구하는 자—참으로 회개하는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의 둘레에서 이 ‘비닐 보자기’를 제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지 않겠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가 자기에게 비닐을 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고 있지 않은 증거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그 사람에게는 용서를 받은 일이라고는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가 하루는 어떤 잘 아는 분을 만나서 말합니다.  “자네, 아직도 그 친구를 용서치 않고 원수로 지내는가?”
 그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난 그를 용서할 수 없네. 그 사람은 자기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해.”
 이 말에 웨슬리가 엄숙히 말해줍니다.  “그래? 그러면 자네는 앞으로 어떤 조그만 죄라도 지어서는 안 될 걸세. 자네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터이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기도를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세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만일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려면 자신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아내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려면 남편은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남편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려면 아내도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여러분 옆의 그 사람을—이웃의 그 사람을 지금 여러분이 용서하지 않는다면—화해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도 결단코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이웃에 대한 용서와 하나님의 용서는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임금님으로부터 그 빚을 탕감을 받고서도, 겨우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의 빚을 용서하지 않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자기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여주셨습니다.(마18:23-35)
 그리고 나아가서, 자기가 이웃을 정죄하는 바로 그것으로서 자신이 정죄를 받게 되며(마7:2), 또한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됨과(마5:7)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게 된다고(약2:13)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혼자서는 살지를 못합니다.  함께 더불어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누구도 완전하지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들이 모이면 서로의 ‘차이’로 인해 ‘죄’가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성격차이가 나타나고, 형제간에 성격차이가 나타나고, 이웃간에 성격차이가 나타나고, 교인간에도 차이가 나타나고, 그래서 서로가 부딪히게 됩니다.
 사람마다 ‘자기중심’과 ‘교만’과 ‘질투’와 ‘야심’들이 있어서 서로 부딪히게 마련이고, 이렇게 부딪히면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이 ‘상처’는 결국 원한이 되고 미움이 되어, 질투와 시기와 모략(謀略)과 중상(中傷)으로 나타나게 되고, 결국은 ‘죄’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인간사회에 ― 부부사이에, 자녀와의 관계에, 이웃과의 관계에 ― 참된 ‘치유의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것이 되겠습니까?
 오직 ‘용서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그대로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라고는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이제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셨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분노와 미움이 마음에 가득하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실제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여기에 뒤따르게 됩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용서를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부분을 다시금 강조하신 것을 보면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우리 인간들이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차 강조하신 것임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남을 용서한다고 하는 것이 어디 그저 마음만 먹는다고 해서 하게 되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일입니까?
 진심으로 이웃의 잘못과 실수를 용서해 본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용서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용서에는 언제나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 ‘고난’과 ‘아픔’이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때에도, 아무런 대가가 없이 쉽게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야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바로 여기에 우리가 꼭 깨닫고 마음속에 새겨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대가를 누가 치렀습니까?  죄를 범한 우리들입니까?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치르셨습니다.  용서를 받는 자가 아니라 용서를 해 주는 자가 십자가의 고난을 치르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웃을 용서하려면, 이와 같은 십자가의 아픔이 우리에게 따르게 됩니다.  나의 ‘분노’, 나의 ‘주장’, 나의 ‘생각’, 나의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고서는, ‘용서’가 나에게서 나오지를 아니합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나의 ‘미움’과 ‘교만’과 ‘감정’이 살아있는 한, ‘용서’는 결단코 내게서 나오지를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용서해 주려면, 먼저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내 자아의 죽음’이 선행되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내가 일체가 될 때만이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지 않고서도 진심으로 남을 용서하실 수가 있으셨습니까?  ‘십자가의 아픔’이 없이도 손쉽게 ‘용서할 수가 있더냐’는 말입니다.

 남을 용서하는 일에는 ‘내가 십자가를 지는 부담’이 따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분명히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아픔이 따릅니다.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들이 나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던져서 ‘나 중심의 생각’과 ‘교만’과 ‘분노’와 ‘자기주장’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넘치게 보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개인이 부활되고, 가정이 부활되고, 친구사이가 부활되고, 생활이 부활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이 같은 용서를 가지려면, 우리는 십자가를 진다는 각오를 가지고 먼저 ‘이해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데는 항상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연약함이 이유일 수도 있고,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몰랐었지만, 실제로 알고 보았더니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더라 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제로 보게 되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당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15:1)고 말씀하십니다.  이해하려고만 노력한다면 용서는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또한 ‘잊어버리기를’ 배워야 합니다.  멸시 당했던 일과 손해 본 일을 기억하고 거기에 집착하고 있는 한, 우리가 용서해 줄 가능성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3-4)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맑게 씻으시는 영만이, 우리의 잊어버려야만 할 과거의 모든 괴로움을 떼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받은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확증해준 그 사랑이 내게 무조건 주어짐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 영원한 나라에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못하는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게서 감동하며 역사할 때 우리는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그 결과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날 수많은 사람들이 ‘원한’과 ‘미움’ 때문에 얼마나 멍이 들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파괴되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우의(友誼)’들이 깨어지고 있습니까?
 ‘용서’는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반드시 지켜야 할  ‘치료의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않아도 될 만큼 의로운 사람이라고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아 의인으로 인정함을 받았기 때문에, ‘빚진 의인’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빚은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이 나에게 지고 있는 빚으로서의 죄’를 내가 용서해 줌으로서, 나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탕감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 대해 용서해 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장 가까이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릴 때에
 비록 우리들 사이에 성격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모자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부딪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용서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되며,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