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이 이루어 지이다” (마6:9-13)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모두가 다 이 땅위에서, 바로 ‘시간’과 ‘공간’이란 제약이 있는 이 땅위에서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할 것 없이 많은 소원들을 가지고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무엇을 가장 많이 소원하셨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또 무엇을 소원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가지셨던 그 소원들을 이 시간 한번 곰곰이 되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소원들의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어떤 소원을 함에 있어서,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세상이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항상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어떤 때 내가 원하는 그대로 무엇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아주 만족하며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내 뜻이 꺾일 때면, 우린 좌절감과 섭섭함과 답답함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내 뜻을 꼭 성취시켜보고자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문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내 뜻’을 내세우고 ‘내 뜻대로’ 다 이루어지게 해버린다고 하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생기게 될 것 같으냐 하는 것입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선, 어떤 땐 다른 사람의 뜻은 꺾여야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 뜻이 이루어졌다고 웃을 때, 다른 사람은 그의 뜻이 꺾어짐으로 인하여 울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살이의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람 또한 자기의 뜻을 꺾지 않고 꼭 이루고야 말겠다고 끝까지 달라붙을 때, 그래서 그 사람도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고 ‘내가’ ‘내가’를 외치고 나올 때, 그러면 어떤 결과가 생기고 말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먼저, 바로 이 이기심과 오만과 자기고집에 대해 경고하시는 성경말씀에 주의를 기우리게 됩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14장 12-15절에 보면, ‘아침의 아들 계명성’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이 ‘계명성’이란 말은 라틴어로는 ‘루시퍼’ (Lucifer)인데, 밀턴(John Milton, 1608-74)은 그의 서사시 ‘실낙원’ (Paradise Lost)에서 타락한 천사 곧 사탄의 이름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이 아름다운 천사 ‘아침의 아들’이었던 자가 어떻게 타락하여서 악마가 되어버렸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성경 원어로 읽어볼 때, 여기서 이 루시퍼가 “내가 …하리라”란 표현을 무려 다섯 번이나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하늘로 올라가리라.  내가 내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보다 높아지리라.
 내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이 되리라.”
 보세요. 내가 하리라, 내가 하리라, 내가 하리라, 내가 하리라.

 이에 대해 15절에 하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보시다시피 “내가 하리라”의 결과는 타락이요, 반역이요, 분쟁이요, 그리고 멸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내가 하리라”는 그 결과로써 멸망으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비해 우리 주님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30)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39)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하심으로 ‘구원’과 ‘평화’와 ‘기쁨’을 우리 온 인류에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 주님이시기에,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결국 이 세상에는 두 개의 의지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완전한 의지’ 곧 ‘하나님의 뜻’이요, 다른 하나는 ‘타락한 의지’ 곧 ‘내가 하리라’고 하는 의지입니다.
 사탄이 타락한 이래, ‘내가 하리라’는 이 ‘타락한 의지’들은 계속 기하급수적으로 증가를 합니다.  두 개가 네 개로 불어나고, 네 개가 여덟 개로, 그리하여 수억만 개의 의지들로 불어났습니다.  이 속에는 여러분의 의지와 저의 의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많은 의지들은 서로가 다르고, 서로가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는 그러한 의지들입니다.  이 모든 의지들은 이기적이고 부패했으며, 끝없는 죄와 반역의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매일같이 보게 되는, 이 사회 속에 들끓고 있는 죄악상들인 것입니다.
 이것들을 치유할 방법이란 없는 것입니까?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유한한 이 땅에서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살아가는 가운데 필연적으로 우리 모두가 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소원과 의지들을 우리 모두가 다 가지게 마련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일한 치유의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많은 우리 인간들의 의지들이 이제는 그 완전한 의지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의지 아래 통제될 때, 비로소 이 땅에는 질서가 있고, 평화가 있고, 기쁨이 있을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땐, 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간에, 분쟁이 있고 시기가 있고 약육강식이 있고, 끊임없는 파멸과 자멸만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루시퍼가 어디 따로 있습니까?  “내가 하리라”를 오늘도 우리가 반복하는 한, 내가 루시퍼요 우리가 루시퍼요 이 사회가 루시퍼요, 사탄의 권세 아래 종노릇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고 말이지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바로 여기에 인류의 희망이 있고, 내 가정의 희망이 있고, 내 개인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기도함에 있어서, 몇 가지 이 기도가 가르쳐주는 요점을 우리는 마음속에 분명히 새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첫째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라고 여러분은 생각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하나님의 뜻대로’라고 말할 때, 어떤 경우에 이런 표현들을 여러분은 주로 사용하십니까?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우에 있어서, 때로는 분명히 그렇게 확신하지도 않은 채, 그저 으레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기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 안티파스가 교회 중에서 지도자 몇 사람을 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먼저 열두 제자중 하나인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고, 베드로도 잡아다가 일단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이 때 이들이 어떤 기도를 하였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이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셔서 베드로가 죽지 않고 석방되기를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도하고 있는 중에, 베드로가 옥에서 나와 그들의 집에 당도하여 대문을 두드립니다.  로데라 하는 여종이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미처 문을 열어주지도 않은 채 기도하는 무리에게 가서 베드로가 대문밖에 서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이들이 보인 반응을 보세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모두가 다 로데를 향해 “네가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재차 분명 베드로라고 하였더니, 그러면 그의 천사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런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야고보가 이미 죽었는데, 베드로도 틀림없이 순교 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면서 살아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었지만, 정말 살아 돌아올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 가운데 그저 으레 그렇게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또 간혹 보면, 어떤 나쁜 일이나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그저 체념하듯 말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뭐, 그저 하나님의 뜻이지…” 하고 말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선 결코 우리에게 그저 으레 그렇게 기도하거나, 또한 체념이나 숙명론으로 받아들이라고 이 기도를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기도를 자세히 보세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여러분은 ‘하늘’이란 말을 들을 때 무엇을 연상하게 되십니까?
 아마도 ‘평화’와 ‘풍족함’과 ‘온전한 기쁨’과, 그리고 ‘고통’이나 ‘환란’이나 ‘눈물’이 없는 곳을 연상하실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계시록 21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와 같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요, 우리의 소망이며, 또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님은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할 때는, 먼저 하나님의 뜻은 가장 선하고 행복한 길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찬들 중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무분별하게 아무데서나 적용시킴으로서, 많은 해독과 과오를 저지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의의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게 된 가정이나, 불치의 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 부모를 잃고 비탄에 잠겨있는 가정을 찾아가서 고작 위로한다고 하는 것이 “이것은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순종하며 받아들이십시오!” 한다면, 그러면 결국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 되고 마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지요.  저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요!!

 부주의하거나 또는 술에 취한 운전자에 의해 무고히 희생당하는 것이나, 여러 가지 질병으로부터 고통당하는 것이나 ― 이런 것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우리 인간의 죄의 결과이며, 또 그것은 반드시 피해자 자신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이 인류사회의 죄로 인한 결과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결단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런 고통과 슬픔과 재난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질병을 고쳐주셨고, 우리의 죄로 인한 이 억울한 고통들을 보시고 그 거룩한 얼굴에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제가 하는 이 말에 결코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자에게는 결단코 이와 같은 일들이 없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는 이와 같은 연단하는 것, 말하자면 고통이나 질병이나 희생이나 어려움 등등 이런 것들이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일 때도 있고, 우리에게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는 것일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그러한 경우라 할지라도, 거기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의 결과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과 인내와 희생이 요구되는 그런 하나님의 뜻에 때때로 처하게 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더욱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바와 같은 교통사고나 질병 같은 어려운 형편에 처해진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 우리 크리스찬은 뭐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정신에 따르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오로지 우리 인간들의 죄와 어리석음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지금 이런 고통을 직접 겪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내어서 하나님 앞에 다시 굳건히 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런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강건해져서, 당신 주위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을 이전보다도 더 잘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자를 위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과 당신이 겪고 있는 이 고통마저도 하나님께서 사용해 주시기를 바라며, 그를 신뢰할 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분명히 선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왜 하나님은 나를 지금껏 살려 두시는 것입니까?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왜 그런 시련이 내게 있었던 것입니까?
 인간에게는 ‘우연’이 있어도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실수’라는 것이 있어도 하나님께는 없습니다.  모두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하기 위해서 있는 ‘의미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우연한 사고 같고 우연한 기회인 것 같았는데,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것이 솔직히 우리가 우리의 지난날들을 믿음의 눈으로 돌아보았을 때 깨닫게 되는 사실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할 수 있고, 또한 주위의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잃지 않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통해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 대해 고린도후서 1장 4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사실 그렇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어떤 크나큰 아픔과 슬픔에 처해 있을 때, 이런 슬픔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와서 하는 위로의 말들은 사실상 그렇게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와 같은 슬픔에 처했던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그저 나와 함께 울어만 주어도, 우리는 놀랍게도 위로를 받게 되지 않습니까?
 성경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겪는 아픔으로 인해서 이제부터 우리는 진정으로 이와 같은 아픔을 겪게 되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따라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며, 그래서 오히려 그 일로 인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로하며, 희망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뜻이 이루어지이다”하고 기도함에 있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는 반드시 같지만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부터 우리가 먼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좋아 보이는데 하나님은 저것을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의 뜻을 고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고 기도를 드리기보다는, 계속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하고 자꾸 조르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결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 바뀌어질 수 있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어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이것은 잘못된 기도인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며 온전한 뜻을 이루어주시는 분이심을 믿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완전히 맡기는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바울은 복음전파를 위해 자신의 온 생애를 바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아시아 일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지금의 터키가 있는 소아시아 일대를 전도하며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어인 일인지 사도행전 16장 6절 이하를 보면, 그가 가는 곳마다 면전에서 문들이 쾅쾅하고 닫히고만 있습니다.  얼마나 낙심되는 일입니까?
 결국 그는 밀리고 밀려서, 그 나라 서쪽 끝에 있는 ‘두로아’라 하는 마을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니, 거기서부터는 문들이 열려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애초에 자기가 계획했던 아시아 쪽을 포기하고, 대신 서쪽 유럽으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믿고, 그리로 건너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내가 하는 일에 ‘문들이 열려져야만, 일이 잘되어가야만’ 하나님의 뜻인 줄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닫힌 문’들도 ‘열려진 문’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쓰인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겸허히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을 보세요.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런데 이렇게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마음속에 분명히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기사들 중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야기는 정말로 우리에게 아주 큰 교훈을 주는 얘기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구약 다니엘 3장 17절과 18절 말씀을 보세요.
 느브갓네살 왕이 자기가 만든 우상 앞에 절하지 아니하면 극렬히 타는 뜨거운 용광로에 넣어 죽이겠다고 위협할 때, 그들은 용감하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이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아니, 여러분의 가슴에 깊이 와 닿는 말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여러분, 여러분의 성경에 바로 이 말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는 말 밑에 아주 굵게 밑줄을 그어 놓아보세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의 삶의 원리는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어떤 일을 하게 하실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나는 이렇게 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만족과 평안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이렇게 믿고,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행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떠하였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고, 그 뜻에 그대로 맡기세요!  여러분, 그렇게 기도하세요!!  그러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체험했던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에게 온전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본 자,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를 체험해 본 자는 분명히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 그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항상 체험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의 초점은 바로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고 기도하는 이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같이, 오늘의 이 땅에서도 ‘내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나의 일상의 생활에서, 가정에서와 직장에서의 구체적인 현실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매일의 삶을 한번 점검해보세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아마도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알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는 것입니까?

 네, 있습니다.  성경은 그 방법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골로새서 3장 15절 말씀을 보세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먼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화!’―이 평강이 우리 내부에서 심판자와 같이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 아래 있는지’를 판단하여 준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습니까? 이 평강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어떤 뜻을 품고, 그리고 그 뜻을 남에게 말하거나 실천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씀에 의하면, 여러분은 지금 ‘자신의 뜻’ 가운데만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는 아직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무언가 내 뜻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뜻이 내게 기쁨이 오고 평화가 오고, 다른 사람도 기뻐하며 그 뜻에 화평의 마음들이 생겨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화목하는 일, 평화를 도모하는 일을 하라고요.  항상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또 한편으로는 ‘감사’가 기준이 됩니다.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내게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무지 감사할 게 없습니까?  그러면 어디에선가부터 나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뜻’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넘치는 감사는 넘치는 은혜와 넘치는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을 결심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나의 삶 속에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이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게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늘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늘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이 이렇게 살기를 축복하시며 원하고 계십니다!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선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즐기기 위해서 세상을 이용하지만, 악인들은 반대로 세상을 즐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여 든다.”
 세상을 즐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가 세상에서 얻었다고 생각했던 것들과 함께, 결국 자신 자신도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신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에겐,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은 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복된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며 살 때, 우리는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하나님의 신비를 알 수 있고, 세상 만물을 보면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오늘이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은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오늘’은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선물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인생은 참으로 경탄할 만한 것이며, 항상 새롭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금 이 세상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이 세상에는 불완전하고 이기적인 의지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기적인 의지들 때문에,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하여 비참하고도 안타까운 소식들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하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구하고 우리가 그 뜻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병든 이 세상이 치유되며, 죄로 인해 파괴되었던 하나님의 기뻐하신 그 원래의 창조질서가 회복되게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여기에서만 내 자신에게, 내 가정에, 나아가 내 나라와 세계에 평화가 오며, 화해와 일치와 이해와 협력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