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마 6:9-13)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생에는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이라고 하는 시련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이, 모두가 다 이 시험과 유혹을 끊임없이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때때로 이 시험과 유혹을 이기고 물리칠 때도 있지만, 그러나 때때로 그냥 거기에 휩쓸리는 경우도 적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국회에서 하는 인사청문회를 통해서 항상 보게 되는 사실이 있지 않습니까?  당시에는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해서 했던 일들이었는데, 그것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큰 걸림돌이 되어서 좌절과 낭패를 겪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오늘 내가 이런 자리에 있게 될 줄을 조금이라도 예상했더라면, 그때 결코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하는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낙심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모습이 어느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니라고 하는 데에 우리 인생의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런 청문회 자리에 있게 된다면, 아니 꼭 그런 자리가 아니더라도 지금 현재 내가 있는 위치에서 나의 지난날들을 하나하나 검증한다고 하면, 과연 어떤 결과가 되리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그러므로 이 시험과 유혹의 문제는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참으로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며 모범된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이제 마지막 여섯 번째의 간구가 바로 이 시험과 유혹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하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공통되게 있게 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가르치신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하는 간구를 ‘시험’에 대해 강조하여 곁들이신 것을 보면, 시험을 받는 중에 자칫 이기지 못하면 ‘악’에로 빠질 위험성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동시에 암시하고 계신 것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과 ‘유혹’을 이긴다고 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는 실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이기지 못하면, 결국 인생의 실패자가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하는 이 기도는 우리 삶에 있어서 아주 실제적인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 이 기도가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왜 우리에게 시험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이 시험(유혹)이란 것이 있습니다.  구약성경 욥기 7장 1절에 보면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 ‘노동’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 ‘70인역’(Septuagint, LXX)에는 ‘유혹’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교회의 교부였던 오리겐(Origen, c.185-c.254)은 이 구절을 “끊임없이 유혹에 시달리는 것이 이 세상의 인생이 아니냐?”로 번역하며 “인간이 이성을 갖게 된 이래로 한 시라도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었는가?”하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란 이렇게 아무런 유혹을 받지 않고서 살아갈 수는 없는 그러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시험’이라 하면, 대부분의 경우 어려움을 당했거나 악에 빠질 지경이 되어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곤란한 상태에 있음을 연상하곤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시험에 들었다고 하면, 무슨 올무에 걸려든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선의로 보다는 악의로,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으로 더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시험’이란 말은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시험’과는 좀 다르게 사용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시험’이란 말을 성경 원어로 보면 ‘페이라스모스’(peirasmos)란 말이 쓰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유혹’이란 의미도 물론 담고 있습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특성을 ‘시험해 본다, 테스트(test)해 본다’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어떤 사람을 연단하기 위해서 ‘시험’을 거치게 하는, 영어로 말하자면 ‘trial’이란 의미가 강하게 담겨져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것인지 테스트를 해보지 않습니까?  이때 ‘페이라스모스’란 단어가 쓰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 충성심이 있는지, 또는 저 사람이 선을 행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가 선을 행한 동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젊은이들이 연애할 때 간혹 ‘저 사람이 과연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 사람을 흔들어 시험해보지 않습니까?  이때도 ‘페이라스모스’란 단어가 쓰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시험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우리가 무슨 잘못을 범했기 때문에 벌주시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먼저 신명기 13장 3절에 보면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2-4절에서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면, 우리에게 시험이 오는 것은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한 것이란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가 여기에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가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는 주문을 하신 것이지요.  1절에 보면,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하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아브라함이 100세에 겨우 얻은 아들! ―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아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을 잡아서 각을 뜨고, 장작불 위에 태워 제사로 드리라고 그러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보다도 더 큰 시련이란 없었을 것입니다.

 왜 이런 시험을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이겠습니까?

 어쩌면 그 당시 아브라함은 100세에 외아들을 얻자 너무나도 좋아서, 그만 하나님보다도 아들 이삭에게 온통 기울어져 있었을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냐 아들이냐?’  ‘하나님에의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아픈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길을 택하며 이 시험을 이기고 무사히 통과를 했습니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올라가서,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죽여서 ‘번제물’로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에로 결단을 하는 것이지요.
 이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진실로 순종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
 “네게 복을 주어 번성하게 하고,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해주겠다!” ― 여러분,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축복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이 엄청난 축복을, 이렇게 시험을 통과한 후에 허락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좀 다른 각도로 돌려서 말한다면, 이와 같은 축복을 받을 수 있게, 그래서 ‘열국의 아비’로—‘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이와 같은 시험으로 ‘연단’하신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크리스찬에게도 이와 같은 시험이 항상 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흔히들 예수를 믿으면 축복을 받아 시험과 환란을 받지 않게 될 줄로 생각합니다만,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축복을 받게’ 하시기 위하여 ‘연단’을 더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또 흔히 잘못 생각하기를, 시험은 믿음이 약한 자에게나 연단키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성령을 충만히 받고 그래서 신앙이 돈독한 사람에게는 시험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예수님께서도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것도 40일을 금식기도 하신 직후에, 어떤 의미에서는 신앙적으로 절정에 이르는 그 시간에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또한 시험은 어디에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가정에서도 있고 직장에서도 있고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있습니다.  시험을 피해 기도원으로 또는 산으로 올라간다고 해도, 그 곳에도 시험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과 높을 담을 쌓고 격리되어 지내는 수도원 속에서도 이 시험이 있습니다.
 이같이 시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험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건강문제나 경제문제나 명예문제나 또는 향락적이며 감각적인 방향에서 오기도 하고, 또한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오기도 하고,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가족으로부터 올 수도 있습니다.
 또한 지난날에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마치 갚지 못한 빚과 같이 어두운 그림자로 따라다니기도 하고, 허물이란 것이 타성으로 남아 계속 우리를 시험하기고 하고, 그런가 하면 나의 성격, 나약성, 게으름 등등 나 자신의 내적인 것으로 인해 시험이 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확증시키시기 위해, 그래서 앞으로 내리실 복을 받을 만한 그릇으로 준비시키시기 위해서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당하는 시험이란 어떤 것이든, 두려워해야 할 시험도 슬퍼해야 할 시험도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욥과 같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연단’일 뿐입니다.
 문제는 “내가 이 시험을 잘 통과하여 믿음의 연단으로 삼고 그래서 고귀한 ‘정금’과도 같이 되느냐, 아니면 이 시험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죄를 범하는 자가 되고 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마다 늘 기도해야 합니다.  이 시험을 잘 통과할 수 있게, 이기게 해 달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간구를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드리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이 간구에서 생각해야할 것은, 그러면 만약 우리가 이 시험을 잘 감당하여 이기지 못하고, 그냥 거기에 휩쓸리게 된다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결국은 실족하여 악에게로 떨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도의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것은, 이 기도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란 말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하는 두 개의 간구가 아니라, 서로가 연결된 한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영어문법에서 나오는 “not—but”의 용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경 원어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but’ 이하의 사실이 더욱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시험을 이기지 못하여 악에게로 떨어지지 않도록, 그래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시험이란 우리로 실족시키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에게 시험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나타나지 아니합니다만, 영어로 보면 “Lead us not into temptation”이라고 ‘into’란 전치사가 나타납니다. 
 성경 원어에는 ‘eis’란 전치사가 쓰이는데, 그 의미는 “~의 손안에, ~의 세력 안에”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유혹에 사로잡혀 그 속에 빠지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유혹을 받는 것’과 ‘유혹에 빠지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시험이요 연단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인’에게도 유혹은 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은 이 유혹을 받기는 하지만, 유혹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이기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악의 세력에로 빨려 들어가서 악의 세력에 굴복하고 정복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있는 시험(유혹)을 우리를 연단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과, 우리를 악에 빠지게 하기 위해서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을 구분하여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현실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보았을 때는 그렇게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 시험을 잘 통과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시험이었다고, 또 반대로 잘 통과하지 못하고 악에게로 떨어졌을 때 그것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악마로부터 온 유혹이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시험을 받는 ‘그 순간—그 현장’에서는 이것이 전혀 구분되지 않고 ‘그냥 시험(유혹)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는 우리가 시험(유혹)을 당할 때 할 수만 있으면 우리로 넘어지고 악에로 떨어지도록 온갖 계책을 다 부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거기에 어떻게 임했느냐’ 하는데 따라서 이렇게 다른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아브라함이, 또는 욥이, 그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고 굴복해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마귀의 자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마귀는 우리가 시험을 당하는 때마다, 그 시험에 달라붙어 될 수만 있으면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빠지게 하고, 그래서 신앙을 멸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시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을 보면, 바로 우리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이 시험에 임하기 때문에 악에로 빠지게 된다고 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그 첫 시험에서부터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다고 말해주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에로 빠지는 시험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마음 속에 ‘욕심’과 ‘정욕’이 그리로 빠져 들어가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3-15절에서 이렇게 분명히 말씀해 줍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히브리 속담에, 마귀가 우리 인간을 유혹에 빠지게 할 때 가장 잘 사용하는 비장의 무기가 있는데, 다음의 네 가지 말로 사람을 악에 빠지게 한다고 그럽니다.
 첫째는, “누구든지 다 하는 것이니까”하는 말입니다.
 둘째는, “이까짓 일 정도는 괜찮을 거야”  뭐 이 정도쯤이야…
 셋째는, “이번 한번만 더” 하는 것입니다. 이번 한번만 더…
 그리고 넷째는, “아직도 시간이 많은데 뭐.  차차 하지…”
 어떻습니까?  흔히 우리가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들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라는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시험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이 시험을 이기는 것이요, 유혹에 빠져 악의 세력 속에 굴복 당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의 세력은 얼마나 교묘합니까?  사탄 마귀가 얼마나 간사하게, 달콤하게, 그러면서도 막강한 힘으로 우리를 악에로 빠지도록 유혹하고 있습니까?
 마귀의 힘은 강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유혹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 유혹으로부터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하고 우리는 간곡하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세상에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내게도 유혹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때에 나를 내버려두지 마옵시고, 그 유혹의 순간에 악의 세력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시옵소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도 마귀와 싸워 이길 자신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도’ 악에게 빠지지 아니할 자신이 있으시냐는 말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시험을 받되 시험에 빠지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제 세 번째로, 그러면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에 “어떻게 시험에 빠지지 않고, 악에게 승리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 야고보서는 또한 분명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을 보세요.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우리가 시험받을 때에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라.”  그리고는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겠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시험을 받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험을 받든지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으로 그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마귀는 우리가 이런 시험을 받을 때마다 할 수만 있으면 우리를 시험에 빠져서 악에로 굴복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길을 교묘히 막으며, 인간의 욕심과 불평과 불만을 충동질하고, 인간의 게으름을 자극하여 악에게로 떨어지도록 유혹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받을 때에 또한 마귀와 대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경우가 좋은 모범이 될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형들에 의해 팔리었을 때, 그의 나이 17세였습니다. 그 후 15년간을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2년간은 애굽왕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고, 그 유혹을 물리쳤으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에 대한 요셉의 태도가 어떠하였습니까?
 그동안 요셉이 당했던 일들을 생각해보세요.  어지간해야 말이지요.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며 원망할만하지 않습니까?

 또 한편,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못 이기는 척 그냥 받아들이면, 그야말로 앞으로 소위 출세의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유혹을 물리쳤는데, 오히려 사형수가 되어 친위대의 감옥에 갇혀서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계시는 건가? 나는 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애를 썼는데, 상을 주시진 못할망정 어째서 이렇게 감옥에 갇히게 하시는 것인가?” ― 매사에 원망하고 저주하고 좌절할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창세기 45장 5절을 보세요.  요셉은 그의 형들에게 자기의 모든 시험의 나날들을 회고하며,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형들이 자기를 노예로 판 것도, 15년간 종살이 한 것도,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은 것도, 그로 인해 2년간이나 감옥살이를 한 것도 ― 그는 매 순간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연단이요 시험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지냈다는 말입니다.
 요셉이라고 해서 그의 마음속에 원망스러운 마음, 실망되는 마음이 왜 안 생겼겠습니까?  마귀가 요셉이라고 해서 그냥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럴 때 요셉은 저항합니다.  마귀와 싸운 것이지요!

 창세기 50장 20절에서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바로 이 말에서, 요셉이 자기가 받은 시험에 대하여 ‘복종’과 ‘저항’으로 동시에 대처한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요셉은 그가 당하는 모든 환란, 심지어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까지도 “하나님께서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계획 속에서 자기에게 주시는 시험”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남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믿음으로 복종합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그와 같은 시험을 겪으면서 결코 시험에 빠지지 아니합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며, 그래서 ‘마귀의 유혹에 빠져 악에게로 떨어지는 것’에서 철저히 대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복종’과 ‘대적’으로 이 시험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까?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약한 힘으로 어떻게 악의 권세를 싸워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악의 세력은 강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리 대적하려 해도 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목자’만 있으면, 아무리 힘없는 양이라고 할지라도 사자나 늑대가 무섭지 않지 않습니까?  목자가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기도하는 양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 ‘목자가 그 옆에 지켜주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기도하는 성도 그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를 들으시며 그 기도에 중보자가 되어주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직 ‘기도’만이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과 용기를 주시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난날을 돌이켜 보세요.
 시험에 넘어져서 실패한 적이 있으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여러분, 여러 가지 변명과 이유들을 나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된 일은 성공한 것 같아도 실패입니다.  오직 기도하고 이루어진 일만이 승리요 축복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시험을 당할 때 여기에 하나님의 연단을 통한 더 큰 경륜이 있음을 믿고 기도해야 하며, 또한 이 시험으로 인해 악에게로 넘어지지 않도록 도와주셔서 승리하게 해 주심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말씀’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11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또 에베소서 6장 17절에서는, 마귀와 대적하여 싸워 이길 수 있는 무기는 오로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당하셨던 시험을 보세요. 예수님은 무엇으로 시험을 이기셨습니까?
 ‘육신의 정욕’으로 마귀가 유혹합니다.  돌로 떡이 되게 하여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 때 물리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 바로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안목의 정욕’으로 유혹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고 “야, 굉장하다!” 하며 그를 추종하고 따를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때 물리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 또한 신명기 6장 16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이생의 자랑’으로 유혹합니다.  불의한 세력들과 적당히 타협해서라도 세상의 지위와 명예를 얻으라는 것이지요.
 그때 물리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 역시 신명기 6장 13절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만 사탄의 시험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우리의 ‘검’,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며, 또한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시험도 이길 수 있으며, 그래서 승리하는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미 믿음 생활을 하시는 동안에 이런 승리의 경험을 여러분은 모두 이런 저런 모양으로 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하고 있으며, 이제 더욱 큰 승리의 행진을 계속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일을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거룩히 지키며,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 자체가 바로 승리하고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미 사탄 마귀의 유혹을 이겼기에 여기에 나온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시간의 십일조를 주님께 온전히 드리고, 우리의 물질의 십일조를 주님께 온전히 드리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탄을 이기는 구체적 방법이자 또한 승리의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가 봉사하며 수고하며 충성하는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가 승리하고 있는 구체적 내용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완성되어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더욱 힘차게 전진해 나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