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 6:5-8)

 

 

지금 우리는 가공할만한 과학의 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불과 10여년전만해도 상상도 못했던 여러 가지 첨단 과학의 장비들이 한 달이 멀다고 우리를 놀래게 만드는 이와 같은 시대이지 않습니까?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현대 과학의 모든 힘들이 다 평화적으로만 이용된다고 하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말이지요. 전 세계는 과연 낙원으로 화하게 될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굉장히 편리해지는 면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슬기와 자제함으로 원자력의 그 가공할 파괴력을 억제하며, 또 과학의 지혜를 총동원하여 건설 면에만 쓰인다고 해도, 과연 과학의 힘이 슬픈 사람을 위로해 주는 그런 힘, 불량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그런 힘도 될 수 있을 것입니까?

아니 그 점 말고도, 과연 불신과 증오와 불안의 이 세계를 신뢰와 사랑과 평화의 세계로 바꾸어 줄 수 있을 것입니까?

 

과학의 힘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이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부정적입니다. 과학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와 같은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사회학자인 오슬로란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불행한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악인을 선인으로 변화시켜주고, 잔인한 사람을 너그러운 사람으로, 완고한 사람을 부드러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과학의 힘보다 더 강한 다른 종류의 힘이 필요하다. 만약 이 힘이 없다면 인간은 과학으로 인한 파괴력이란 힘에 의해 굴복당하고, 그 힘의 폭력 앞에 전율을 금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과학의 힘보다 더 강한 ‘다른 종류의 힘’이 우리 인간 사회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과학의 힘보다 더 강한 힘, 원자력보다도 더 강한 힘, 오히려 차원을 달리하는 그 힘이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과연 인간존재를 변화시키고, 불행한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악인을 선인으로 변화시켜주고, 잔인한 사람을 너그러운 사람으로, 완고한 사람을 부드러운 사람으로, 나만을 위하던 이기적인 사람을 이웃과 사회를 위한 그런 마음으로 바꾸어줍니까?

그런 힘이 과연 있기나 한 것입니까?

 

여러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능력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최대의 힘은 바로 나사렛 예수가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땀과 눈물과 피를 뿌림으로 성취한, 바로 세상의 모든 죄를 멸하시고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완전히 이기신 바로 그 힘입니다!

 

이 힘은 실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이 세상에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힘은 무한하여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큼 무한히 공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그 힘을 공급받아 소유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제가 미국에 유학하고 있을 당시에 한번은 제 부모님이 은퇴하신 후 미국을 방문하셔서, 제가 부모님을 모시고 후버댐을 구경시켜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랜드캐년의 협곡을 따라 흘러나오는 코로라도 강을 막은 그 거대한 댐에는 정말이지 엄청난 양의 물들이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댐의 계곡 너머에는 나무 하나 제대로 자라지 아니하는 사막입니다. 물이 없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 댐에는 넘치도록 물이 있는데도, 바로 너머에는 물이 없어서 나무 한 그루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보니, 그 사막 한가운데 나무가 우거지고 파란 잔디밭이 아름답게 펼쳐진 곳이 있었습니다. 어찐 일인가 해서 가보았더니, 다른 게 아니에요. 바로 파이프를 통해서 후버댐의 물이 거기에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파이프만 연결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사막들이 다 푸른 들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이 파이프가 바로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해 주신 이 힘은 실재하고 있습니다.

또 이 힘은 무한하여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큼 무한히 공급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어디에 있는 사람도 ― 그가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이든 노인이든 ― 누구든지 간에 단지 ‘기도’라고 하는 파이프만 연결하기만 하면, 무한하게도 이 힘이 공급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기도하는 생활이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며, 또 한편 기도생활이 잘못되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신앙생활 모두가 잘못되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기도이기 때문에, 바로 여기에 또한 가장 큰 문제점이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기도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우리 기독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당종교에도 촛불과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기도가 있고, 또 명상이나 고행이나 참선과 같은 이름으로 모든 종교마다 기도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란 어느 종교에나 다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이방 종교화되기가 쉽고, 타락하기 쉬우며, 또한 변질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제가 군에 복무하고 있을 때, 한번은 북한산을 순찰하던 중 재미있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골짜기마다 조그만 동굴들이 있고, 각종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기도처소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들른 한쪽 골짜기는 기독교인들의 ‘기도 처소’였는데, 곳곳에서 찬송도 하며 소리도 지르며 기도를 하고 있는데, 참으로 열렬히 기도를 하더군요.

그런데 돌아서 저쪽 골짜기로 가니, 거기엔 나무마다 알록달록한 천들이 걸려있고, 떡이랑 과일들을 차려놓고 열심히 빌고들 있었는데, 무얼 구하나 하고 가까이 가서 들어보았더니,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는 이 말만 없을 뿐이지 저쪽 기도원 골짜기에서 본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구하는 내용도 비슷하고요, 기도하는 모양도 비슷합니다.

같이 순찰하던 동료가 이러더군요. “야, 이거 뭐 똑 같잖아!”

 

여러분, 바로 여기에 문제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고 시작했지만, 이방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기들 신께 비는 그런 내용과 태도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결과가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방인과 같이”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성경에서 가르쳐주신 그대로 기도하도록 힘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면서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 주셨고, ‘주기도문’으로서 ‘모범된 기도의 표본’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오늘 분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여러분, 주님의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무슨 뜻인 것입니까?

 

이 말씀에 관하여 많은 오해들이 있어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공중기도’가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은밀히,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 하셨지 않으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어리석은 것이지요. 왜냐하면,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께서도 공적으로 기도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분은 말하기를 “저는 기도하는 모임에 나가지 않습니다. 저는 혼자서 은밀히 기도합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또 초대교회의 모든 크리스찬들이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기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은 ‘두세 사람이 함께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기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계신데, 여기서 우리는 ‘참된 기도’를 위한 세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네 골방에 들어가라”는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되세요?

기도에는 특별한 장소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남의 골방”이 아니라 “네 골방”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의 골방!” ―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위해서는 특별한 장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산에 가야만 기도가 되고, 어떤 사람은 기도원에 가야만 기도가 되는 줄 알고 있는데, 이게 다 이교적인 요소들입니다. 풍수설적인 나쁜 고정관념인 것이지요.

성경을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밖에 있는 어떤 장소를 지정하지 않으시고 “네 골방”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문을 닫으라고 하십니까?

문을 닫으면 밖에서는 전혀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지요. 또 문을 닫으면 안에서도 전혀 밖을 알지를 못합니다. 문을 닫으면 이 ‘안’과 ‘밖’의 요소들이 철저히 차단되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이 말씀은, 참된 기도에는 철저히 배제하는 단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지금 내가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가?’―그 대상을 깨달으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 대상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철저히 차단되고 배제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도란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다른 동료 인간들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대해서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대해서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공석에서 기도하든 개인적으로 기도하든, 먼저는 우리가 철저히 배제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나의 기도함에 있어서 오로지 기도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들은 배제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데도, 때로는 ‘사람의 귀’에 신경을 쓰게 되면 “은혜로운 기도였다”든지 “기도 잘 한다”는 소리를 듣고자 미사여구를 붙이게 되고, 또 “저 사람은 기도 열심히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래서 기도하는 것도 쓸데없이 길어져 버리기가 쉬운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기도에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귀가 아니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며,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께 지금 기도함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요소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모든 문들을 닫아버리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기도해야 한다!!’ ― 이것이 ‘네 골방에 들어가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는 ‘네 골방’이라는 의미가 ‘장소’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바쁜 길거리에서 혼자 걸으시거나, 집안의 이방에서 저방으로 건너가실 때에도 골방에 들어가실 수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운전하실 때에도 골방에 들어가실 수가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면 ― 언제고, 어디서고 간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아니 계신 곳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무시는 때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기도와 골방은 서로 연결된 것이기 때문에, 이 골방이란 결국 여러분의 삶 자체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골방이어야 하고, 여러분의 직장이 골방이어야 하고, 걸으실 때나 운전하실 때나, 다른 사람과 만나는 모든 때가 다 골방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이 사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시다는 이 사실! ― 이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의 마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서만 열려져야 합니다.

 

시편 86편 11절에 보면 따라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리이다.” ― 여러분, 이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 오로지 하나님과만 통하는 골방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바로 이런 골방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참된 기도의 두 번째 단계는 인식의 단계입니다. 배제한 후에 인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고 하면, 바로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누구시라는 사실을 바로 인식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인류의 역사를 주장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털 하나까지라도 다 헤아리시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는, 만왕의 왕, 여호와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먼저 우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전능하시고 절대자이시며, 영원하시고 높고 크시며,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 거룩하시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뵙는 ‘알현실’에 들어가고 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바로 이것이다.”

 

여러분이 임금님을 만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태도는 어떠할 것이며, 말씨는 어떠할 것입니까?

임금님은 고사하고서라도, 우리가 뽑은 대통령을 만나는데 있어서도 그게 어디 쉽게 되는 일입니까? 여러분은 내가 청와대에 한번 들어가고 싶다고 지금 그대로 들어가실 수가 있습니까?

또 만약 허락이 되었다면, 어떻게 하며 들어가시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기도로서 하나님을 만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것은 여간 특권이지 않겠습니까?

누구도 함부로 만날 수 없는 그분을 내가 지금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나의 말씨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가 바로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오래 전 얘기입니다만, 제가 고등학교 학생시절에 신문에 크게 보도된 사진 한 장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 바로 백악관의 oval office입니다.

또 거기엔 국무장관과 국방장관 등 중요한 각료들이 함께 앉아 중요한 국사를 의논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특급 기밀들이 논의되는 곳이기에 그 어떤 사람도 거기엔 함부로 출입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 불청객이 불쑥 나타납니다. 그것도 첩첩이 쌓인 경호원들의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서 말입니다.

바로 Kennedy 대통령의 집무실에 그의 꼬마 아들 John이 나타난 것이지요. 이 꼬마 녀석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도 아랑곳 않고, 아무 때고 간에 당당히 그곳을 드나듭니다.

남들은 함부로 들어올 수도 없는 곳에, 또 들어와서도 부동자세로 있는 곳에 허락도 예고도 없이 들어와서는, 대통령의 바지를 잡아 다니며, 등에 기어 올라가며, 아주 마음 편히 들어와서 놉니다. 아빠니까요!

 

기도는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남들은 두려워서 감히 근접도 못하는 그분께, 나는 아들이므로―아주 사랑 받는 아들이므로―어느 때고 간에 그곳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 마음껏 아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찬에게 주어진 기도의 특권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인식하십니까?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것을 여러분이 깨달을 수 있다면,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가 과연 그의 자녀요, 기도할 때마다 어린 아이가 자기 아빠에게 가는 것과 같음을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가 기도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24시간 어느 한 때이고 간에 아버지께로, 그 존전으로 나가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기도가 어렵다고 생각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기도할 시간을 가지기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분들이 계십니까?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인식하면, 기도란 내가 하나님의 존전에 드나드는 특권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 어찌 이 특권을 기쁘게 행사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참된 기도의 세 번째 단계는 ‘신뢰’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아빠가 사랑하는 아이에게 무엇이든지 들어주지 않을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요, 하나님은 나를 축복하시기를 기뻐하시며, 내가 받으려는 것보다 훨씬 이상으로 주실 준비가 되어 계시며, 이미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아마도 여러분은 이런 그림이나 글을 보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에다 걸어놓는 조그만 액자들 가운데 이렇게 쓰여진 것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향하여 물었다. ‘예수님, 나를 얼마만큼 사랑하세요?’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이만큼이나!’ 그리곤 두 손을 크게 벌리시곤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에 메 달리시며, 나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나에게 이 엄청난 선물을 주셨는데, 나의 조그만 이 기도―이 간구! 들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가령,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가 잘 아는 어느 분의 집에 갔더니 video와 audio system을 아주 훌륭하게 갖추고 계시더군요. 그 가격이 모두 합하여서 수억 원이나 된다고 하는데, 그분을 존경하는 어떤 분이 선물한 것이라고 자랑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그 분을 존경하여서 그 system을 선물한 것이었다면, 이제 그분이 들어볼 레코드판이 없다고 하면서 몇 장을 달라고 하는데, 그것을 아깝다고 선물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수억 원짜리를 기쁜 마음으로 선물하였는데, 불과 몇 만원을 아끼겠습니까? 반드시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 말씀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이 말씀이 ‘우리의 구하는 것’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고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기도에 대하여 많은 간증문을 남기신 루벤․토레이 목사님이 이런 간증 하나를 그의 책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처음 목회를 하고 계실 때 어떤 여자 분이 교회에 나왔는데, 등록을 하지 않겠다고 하더랍니다. 왜냐고 알아보았더니, 성경에 있는 약속들을 시험해 보았는데 그 약속들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네가 기도할 때에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은 줄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그것을 갖게 되리라”고 약속하였는데, 이 여자 분이 어떤 일로 매우 열심히 간구하였는데 그것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레이 목사님이 우리가 지금 같이 읽은 이 요한일서 21절 22절 말씀을 보여주었더니, 그 여자 분이 대뜸 받아서 하시는 말씀이 “보세요. 여기도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더랍니다.

토레이 목사님은 그 여자의 말에 일단은 긍정하고 난 뒤, 다음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당신은 먼저 당신이 응답 받을 수 있는 사람가운데 하나인가를 확인해 보셔야만 합니다. 당신은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약속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고 계십니까?”

“성경은 기도의 응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분명히 규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기도는, 이 구절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을 행하는 신자들의 기도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계십니까?”

 

이 말을 듣고 그 여인은 자신이 계명들을 지키지 않고 있었음을 고백하더랍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여인은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갔으며, 그 교회의 가장 유익하고 활발한 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날 성도들 가운데서도 바로 이 여인과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불행한 일이지요. 누구든지 이 여인과 같은 입장에서 머물고 계셔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 분명히 마음속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결국 기도는 우리의 생활입니다.

기도는 나의 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기도는 나의 기도하는 양에 달려 있지도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적절한 용어를 사용하였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는지, 그것도 다 이차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저의 이 말에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차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내가 내 삶을 통하여 기도하고 있는가?’

‘응답 받을 수 있는 온전한 기도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응답 받는 기도를 드릴 자격’을 갖추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려고 애쓰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까?

성경에 보면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잃은 양 하나를 여러분이 찾는 그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이 일에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계십니까?

 

또한 기도함에 있어서, 내가 하는 기도가 오로지 하나님께로만 향하는 것이며, 내가 기도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무상으로 만나는 특권임을 깨닫고 계십니까?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계십니까? 그래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온전히 이루고 계십니까?

무엇보다도, 나의 삶 자체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나의 골방이 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마다 그를 만날 것이요,

여러분의 기도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경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 질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세요!

 

이 귀한 은혜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온전히 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