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문에와 덕분에
< 본문 - 창세기 3:8-13 >
심리학에 ‘피터팬 증후군’(Peter Pan Syndrom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983년 미국 심리학자 댄 카일리(Dan Kiley) 박사가 자신의 저서인 『피터팬 신드롬(The Peter Pan Syndrome)』이라는 책에서 사용하면서 태어난 개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피터팬’이라는 동화에서 유추한 것인데, 1970년대 후반 들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정신상태를 설명한 용어입니다. 사람이 성장하면 마땅히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성장하고 성숙하는 데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른으로 성장했으면서도 자신은 책임을 지려하지 않고 자꾸만 책임을 회피하는 것, 그래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자신감 부족 또는 무기력증 등으로 현실을 도피하여 동화 속 나오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안주하고 싶어하는 심리상태를 ‘피터팬 증후군’이라고 말합니다.
심리학에서 ‘피터팬 증후군’과 비슷한 또 다른 용어가 있습니다. ‘키덜트’(Kidult)라는 말입니다. 키덜트라는 말은 어린아이를 뜻하는 키드(kid)와 어른을 뜻하는 어덜트(adult)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용어입니다.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아이의 분위기와 감성을 간직하고, 어린아이처럼 구는 어른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키덜트는 삶을 진지하게 살려하지 않습니다. 진지하고 무거운 것 대신에 유치하고 재미있는 것을 추구합니다. 무엇이든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나 부담을 갖는 것을 싫어합니다.
요즘에는 이 키덜트 문화가 우리 사회의 한 흐름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만 여가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들이야 가볍게 인생을 즐긴다고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책임감을 잃어버린 시대, 책임감을 회피하는 사회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의 전략가 가운데 손빈(孫臏)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손자병법』의 저자로 유명한 손무(孫武)의 5대손으로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선조 손무가 쓴 『손자병법』발전시킨 병법서를 썼습니다. 손무가 쓴 『손자병법』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것을 『손빈병법』이라고 부릅니다. 거기에서 손빈은 ‘실패하기 쉬운 지도자의 유형’을 20가지로 말합니다. 예를 들면 ‘능력이 없는데도 있는 체 한다.’ ‘힘만 믿고 오만불손하다.’ ‘욕심 많고 경솔하다.’ ‘스스로 결단력 있고 순발력 있다고 착각한다.’ ‘충직한 자의 말을 도통 듣지 않는다.’ ’독단에 흐르며 규율과 법을 무시한다.’ 등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가 ‘무책임하다.’ 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라 안에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스스로 자기 책임이라는 자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지도자가 바른 지도자이고, 그런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한 국민입니다. 지도자가 책임지혀 하지 않는다면 그는 실패할 확률이 높은 지도자입니다.
그건 비단 지도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책임적인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책임을 지려 하지 않습니다. 책임에는 때로 고통과 아픔이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책임을 지려 하기에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책임을 지려할 때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고, 희생을 각오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문제 앞에서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잘 되면 내 탓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까지 생겨나지 않았습니까? 일이 잘 안 되면 다른 사람을 탓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어려움을 당하면 카르마 때문이라고 합니다. 카르마(Karma)는 업(業)을을 뜻하는 말입니다. 브라만 문학에서 카르마는 원래 ‘종교 의무의 수행’을 의미했습니다. 윤회사상을 믿는 그들은 오늘과 현생에서 내가 선을 쌓고 덕을 쌓으면 다음 생에 더 좋은 모습으로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오늘 선을 행할 기회가 주어지면 그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리가 왜곡되면서 자신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면 ‘전생의 내 카르마가 나빠서 오늘 내가 이렇게 고생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내가 책임져야 할 문제 앞에서 전생을 들먹거림으로써 내 책임을 회피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책임회피의 문제는 이미 성경에서도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만드신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 살게 됩니다. 에덴동산은 말 그대로 이 지상에서 살기에 가장 좋은 곳입니다. 거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그저 먹고 놀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책임을 맡겨주셨습니다. 그것을 창세기 1: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책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땅을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면서 심히 좋아하셨던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도록 관리하는 것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사명이요 책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귀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돕는 배필로 하와를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서로의 부족함 점을 도와주고 보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서로에게 돕는 배필인 아담과 하와는 서로의 약점과 부족함을 함께 채워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하와가 뱀에게 유혹을 받고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동산 가운데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만 것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와는 그 열매를 따먹고는 자기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담도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8절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늘 동산을 거니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에 오셔서 아담과 하와와 함께 그 아름다움을 즐기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 먹은 그날 저녁 즈음에 하나님께서 또다시 에덴동산에 나타나셨습니다. 평소 같으면 하나님의 임재 소리가 들리면 아담과 하와도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하나님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어쩌면 평소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함께 산책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람이 불 때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셨습니다. ‘바람이 불 때’라는 말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 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그 때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후, 죄책감과 부끄럼에 휩싸여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자신을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주신 후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뜻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담과 하와를 포기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충분히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주신 후에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늘 하나님의 방문을 기쁨으로 맞이했던 아담과 하와에게 그날 하나님의 방문은 결코 반가운 방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시는 소리를 들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을 떳떳하게 만날 수 없음을 자신들이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아담을 부르십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습니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아담을 찾지 못하셔서 부르신 것은 분명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어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두려워서 숨어 있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자신들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부끄러운 죄를 인정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인간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자신들의 죄가 드러날까 두려워서 숨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와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고 여전히 부끄러움과 두려움 가운데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물으십니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내게 먹었느냐?’ 이 질문은 아담과 하와에게 자신들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인정하고 진실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과 ‘내가 네게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라는 질문을 통해서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이 지은 죄를 바로 보고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네게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라는 물음에 아담은 그 책임을 하와에게 떠넘기고 맙니다. 에덴동산의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의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 자체가 죄이긴 하지만, 그것이 비극의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범죄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자처럼 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순간적인 유혹과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죄에 빠져들곤 합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런 우리 인간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실수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때론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렇게 부족하고 모자란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서로를 돕는 존재가 되도록 그들을 부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서로에게 돕는 존재라면 상대방이 실수하여 넘어졌을 때 그를 일으켜 세워주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연약하여 유혹에 흔들릴 때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서로를 붙들어주어야 합니다. 그게 돕는 배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가 네게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라고 물으실 때 아담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의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2절) 맞는 말입니다. 객관적인 사실관계에서 따진다면 아담의 말 가운데 틀린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아담의 책임회피요 핑계입니다. 아담은 자신이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지은 원인이 하와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주 부드럽게 표현했습니다만, 당시의 정황으로 읽는다면 아담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저 여편네 때문에 제가 그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저 여편네만 아니었으면 안 먹었겠죠. 그리고 저 여편네를 제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러니 하나님 책임도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이라구요!’ 하와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와를 자신에게 허락하신 하나님 때문이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하와 역시 자신이 잘못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뱀이 나를 꾀었기 때문에 먹었습니다.’ ‘뱀 그놈 때문입니다!’ 그런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악된 인간 본성을 보게 됩니다. 아담이나 하와 모두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회개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모두 남을 탓합니다. 아담은 ‘하와 때문에 먹었다’고, 그리고 그 하와를 자신의 아내로 주신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하와 역시 자신의 무지나 연약함 때문에 뱀의 꾐에 넘어갔으니 자신이 잘못했노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유혹한 뱀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행동이나 자신이 한 결정을 자기 스스로 책임을 지려하지 않고 누군가 때문이라고, 누군가에게 탓을 돌린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분명 매일이 비극의 자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우리는 늘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내게 힘든 일이 일어나면 그 탓을 돌릴 만한 사람이 없나 하고 두리번거립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연결고리라도 있으면 그 연결고리를 통해서 모든 책임을 그 사람에게 돌리고 맙니다. ‘저 사람 때문에 이렇게 되었노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어 마음에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나 대신에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 주어야 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누군가를 탓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아무개 때문이야!’라고 다른 사람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책임을 져야할 일들에 대해서 ‘아무개 때문’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념겨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진실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자기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3년 동안이나 선생님이요 주님으로 모시던 주님을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부인했음에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만나셨을 때 ‘그 때 왜 그랬었느냐?’고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스승이신 주님을 배신하고 팔아먹은 가롯 유다에게도 ‘내가 이렇게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하는 것이 다 너 때문이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가롯 유다가 자신을 팔아먹을 것을 아시면서도 그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주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고 산다면 우리는 그런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사람은 ‘너 때문이야!’ ‘다 네 탓이야!’라는 말 대신에 ‘당신 덕분입니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어주심으로 그 덕분에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삶속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그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은혜’라고 하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그것은 ‘덕분에’라는 말입니다.
‘덕분에’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보면, 덕덕(德)자에 나눌 분(分)자를 씁니다. 덕분이라는 말은 나에게 있는 덕을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덕을 나눠 받은 사람이 우리라고 한다면, 예수님께로부터 우리가 받은 그 덕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 바로 ‘덕분에’ 인생입니다. 우리가 덕을 나누는 것은 곧 은혜를 나누는 것이고,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덕분에 인생을 사는 사람은 행복을 나누고 생명을 나누며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에만 ‘덕분에’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같은 조건, 같은 상황에서도 ‘때문에’라는 말을 쓰느냐, ‘덕분에’라는 말을 쓰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파나소닉이라는 회사를 설립한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1894-1989)입니다.<사진1> 그는 자주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세 가지 역경 덕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힘든 일을 하며 세상살이에 필요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두 번째는 허약한 몸 덕분에 항상 운동에 힘을 썼기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덕분에 만나는 모든 사람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묻고 배우면서 익혔습니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3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9살 때에 소학교를 중퇴해야 했습니다. 이후 오사카로 상경해서 화로가게와 자전거 가게 등에서 심부름꾼으로 일을 했습니다. 16살 때 전등회사의 견습공으로 일하다가 23살에 마쓰시타 전기기구 제작소를 차렸습니다. ‘물건을 만들기 전에 사람을 만든다.’는 기업철학을 가지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회사를 운영하면서 엄청난 기업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1년 가운데 거의 절반의 시간을 누워있어야 할 정도로 약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운동을 했기에 95세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만약 ‘때문에’라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면 그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난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노라고, 몸이 너무 허약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용기가 없었노라고, 배운 것이 없기 때문에 늘 기죽어 살아야 했노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때문에’라는 생각 대신 ‘덕분에’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힘든 여건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덕분에’라는 생각과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군가 때문에’라는 생각은 우리를 패배자로 만들 뿐입니다. 그건 범죄한 아담이 가졌던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주님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당신 덕분에 이렇게 행복하고 기쁩니다.’ 라고 말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주님 덕분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늘 새 힘을 주십니다. 주님의 은혜를 누군가에게 나누는 ‘당신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며 사는 사람에게도 우리 주님은 늘 그의 삶을 복되게 인도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