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본질

 

요 3:9-21

 

살다보면 크고 작은 선택을 많이 합니다. 어떤 학교를 선택할 것인가, 어떤 직장을 선택할 것인가, 선거에서 어떤 후보에 표를 찍을 것인가 등등에서부터 오늘 반찬은 무엇으로 할까 무슨 옷을 입고 나갈 것인가 등등 하루에도 여러 차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선택이 있는 반면에 선택을 잘못 했다가 두고두고 후회하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그 피해가 아주 오래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후회 없는 선택, 두고두고 기쁨을 주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회를 선택하고, 어느 목장, 어느 부서, 어느 사역을 선택하고 등등.


본문을 보니 대조를 이루는 개념들이 여러 개 나옵니다. 영생과 멸망, 구원과 심판, 빛과 어두움. 이들은 현재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들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쉬운 선택 같은데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고 빛 가운데 행하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믿지 않는 자들은 대부분 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고 그냥 지나칠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는 무엇을 선택할지 분명한데 그들에게는 쉽지 않을까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주님의 뜻대로 바른 선택을 하면서 열매를 많이 거두어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거둔 열매로 주님의 칭찬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영생이냐 멸망이냐(3:9-15)
세상에서 존경받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선 그의 모습은 한없이 초라했습니다. 구약성경에 대한 지식은 많았으나 그 지식이 그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당시 니고데모도 보통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이 거듭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니고데모가 가졌던 구원관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니고데모를 지탱해온 권력, 명예, 학문, 부귀 등은 모두 이 땅에서 온 것이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지키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애를 써도 그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거듭남의 의미는 ‘다시 난다’는 것과 더불어 ‘위로부터 난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니고데모도 위로부터 온 것으로 채워져야만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일하시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회개와 성령을 통한 거듭남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기에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예수님께 반문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선생인데 성령으로 거듭남을 알지 못하는가’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는 말은 그가 랍비 교육을 잘 받고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존경받는 사람임을 뜻합니다. 선생인 그가 메시아 시대에 나타날 회개와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면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아나이다’(2절)라고 고백한 것은 인간적 지식에 근거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에서 나온 영원한 구원의 지식에 근거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늘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바람과 성령의 비교 등 땅의 소재를 들어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는데, 그 비밀을 직접 가르치면 더욱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땅의 일’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하늘의 일’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뜻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만이 하늘에 있는 일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가 본 경험이 있는 분일 뿐 아니라 원래부터 하늘에 계시던 분입니다. 그렇기에 하늘의 일, 즉 인자의 죽으심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직접 그리고 유일하게 증거하실 수 있습니다. 위에서 왔기에 위로 올라갈 수 있는데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 뱀을 든 것 같이 들려 올려져야만 가능합니다. ‘들린다’라는 동사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아래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땅에서 들려 올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위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한편으로는 이 땅에서 처형되어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 하늘에 올리워 만물 위에 뛰어난 존재로 높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옵니다.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니고데모조차 아래에 있는 것들로부터 구원을 얻으려 한다면 실패합니다. 니고데모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영생을 얻습니다. 구원은 위에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오르심으로 가능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해를 돕기 위해 민수기 21장에 나온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지나면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다고 불평하였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 불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셔서 물게 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죽은 자들이 많았습니다.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를 뉘우치고 모세에게 기도를 부탁하니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 뱀에 물린 자가 그것을 보고 고침을 받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놋뱀을 쳐다본 자는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길을 분명히 알려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의심하고 땅만 바라본 자들은 다 죽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리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놋뱀을 본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듯이 장차 십자가에 달리시게 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죄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느냐 아니냐가 구원의 기준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그 의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했습니까? 단지 죄가 많아서라기보다 그들을 구원할 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의인 열 명만 있으면 멸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라보지 않는 자들은 멸망을 당합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생은 단지 육체적으로 죽지 않고 계속해서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생'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장차 올 세상의 삶' ("life of the world to come")입니다. 이 세상을 떠난 후의 삶입니다. 우리가 누릴 영생은 영원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육체적으로 죽어도 우리는 주 안에서 영원히 삽니다. 그러나 육신이 살아 있어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앞에 영생과 멸망이 있습니다. 믿으면 영생을 받고 믿지 않으면 멸망을 당합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선택에 따른 책임을 우리 각자가 져야 합니다.


구원이냐 심판이냐(3:16-17)
영어에서 선을 뜻하는 ‘good’이라는 단어와 하나님을 뜻하는 ‘God’이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모든 선은 하나님께 속한다는 의미입니다. 선을 잘 표현하는 단어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주심으로 잘 표현이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도 없는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반역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10에서 이 세상이 하나님과 원수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동기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은 구원의 대상이자 돌보심의 대상인 온 인류를 가리킵니다. 곧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미 창세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보이셨습니까?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 아들의 생명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롬 5:7-8,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사랑의 극치입니다.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은 아들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큰 선물을 주십니다. 그 선물이 바로 영생입니다. 누구든지 이 아들을 믿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Highway Patrol car가 다리 밑이나 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가 과속으로 달리는 차량을 보면 쏜살같이 나타나 티켓을 줍니다. 교통법규를 위반하여 티켓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굳이 이런 식으로 치사하게 단속을 해야 하는가 하면서 잡히는 사람 쪽에서 볼 때는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나 경찰 쪽에서 볼 때는 그렇게 해야 사람들에도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잠복하거나 함정수사를 하여 우리를 잡으려고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심은 심판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낱낱이 기억했다가 그것에 합당한 벌을 내리려고 준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으신 분이기에 누구보다도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에게 심판의 무서움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잘못 이해하면 심판만 생각하는 고약한 하나님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교회사를 보더라도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요 신약의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이라 하면서 신구약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런 자들의 생각이 잘못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고후 6:2) 이라고 선포합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때가 끝나면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복음서 전체의 주제선언과도 같은 핵심구절이요 구원의 보편적인 원리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요, 믿는 자들에게는 누구든지 구원이 열려져 있음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만을 사랑하셔서 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만을 사랑하셔서 오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릇된 고립주의 또는 배타주의를 피해야 합니다. 구원은 모든 시대와 지역, 인종을 초월하여 빈부․귀천․남녀․노소의 차이가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선택에 따른 책임을 우리 각자가 져야 합니다.

빛이냐 어두움이냐(3:18-21)
본문은 구원과 심판의 현재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지 죽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미 현재에 영생을 경험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성화의 삶이라고 합니다. 날마다 거룩하여져 가는 삶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부터 천국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믿는 사람으로, 빛의 자녀로서 살아야 합니다.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최후의 심판날이 이르기 전에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를 영접하지 않습니까? 왜 복음을 듣고서도 믿지 않습니까? 복음이 삶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죄악된 삶을 청산하여 새로운 삶을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좋아하지만 회개하고 죄악을 버리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다른 사람은 달라져야겠다고 하면서 자신은 달라지기 싫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죄악된 삶을 버리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저질러온 죄악들과 숨겨온 죄악들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 어두움에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도리어 어두움을 사랑한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자와 심판 받을 자를 구분하는 좋은 방법은 그들이 빛을 좋아하는가, 어둠을 좋아하는 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자신의 악함을 숨깁니다. 반면에 빛은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합니다. 그런데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만물은 그 본질을 드러냅니다. 죄악이 아무리 아름답고 선하게 자신을 포장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앞에서 모든 것이 벗겨져 본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죄 많은 인생일지라도 자기 죄를 회개하고 진리로 나아온다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죄에서 자유함과 온전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빛과 거룩을 따라갈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믿으면 빛 가운데 있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어둠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빛이냐 어두움이냐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선택에 따른 책임을 우리 각자가 져야 합니다.

우리의 자세
-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분명한 구원의 도리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거듭남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이며 하늘에 속한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자신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대에 들린 뱀을 쳐다본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과 죄에 빠져 사는 삶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삶이 빛 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그분께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는 세상적인 것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지, 그분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인데도 내가 반복해서 저지르는 죄는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빛 되신 예수님 앞에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고백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용서 받지 못할 만한 죄는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을 주신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구원의 대상은 세상이며, 구원의 이유는 사랑입니다. 구원의 방법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이고,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구원의 결과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복음이 복된 소식인 까닭은 심판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효험이 좋은 약일지라도 믿고 복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듯이, 복음은 믿고 영접하는 사람에게만 복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으로 초청하십니다. 아직도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믿어지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을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바른 선택을 하셔서 구원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그분의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가 죄 용서를 받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택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서 주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여러 차례 말씀을 전하신 박원철 선교사님이 지난 9일 중국 연길에서 중국 공안원들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북한에도 여러 차례 방문하셔서 그곳에 있는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탈북자들을 지원하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육신적으로 연약한 가운데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그 사역을 계속 감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얼어붙은 땅에 주님의 피 묻은 복음을 전하기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선교의 현장에 나갈 수는 없지만 우리 이웃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 지 알 수 없습니다. 초림 때는 구원을 위하여 오셨지만 재림 때는 심판하러 오십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영혼 구원에 대하여 급한 마음이 생깁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롬 13:11)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왜 늦어집니까? 베드로 사도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교회당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 직장, 학교, 시장 모두가 믿음을 나타내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주일뿐만 아니라 일주일 내내 소금과 빛이 되는 Everyday Christian 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대에 참여하고 회계 업무를 보고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고 부엌에서 섬기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입니다. Food Bank Drive를 통하여 저소득층을 섬기는 것도 선한 일입니다. 선교회에서 Care enter를 방문하여 연약한 자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도 선한 일입니다.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보면 안타까워하며 그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하는 것도 선한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소금은 짠맛을 내어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하고 빛과 같이 어두움을 환히 비추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세상의 빛을 비추는 믿음의 주역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