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지금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여행을 하고 계십니다. 이제 가시면 체포당하시고, 재판받으시고, 채찍질과 조롱을 당하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었습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은 크게 가지 루트가 있었습니다. 빠른 길은 능선을 타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는 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노선을 타고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을 구원하고자 일부러 그 노선을 택하셨던 같습니다.

하나의 노선은 약간 우회하는 코스인데, 갈리리에서 요단강 쪽을 따라서 내려왔다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코스입니다. 코스가 일반적인 코스였던 같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노선을 따라 여리고를 통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는 본문에서 여리고에서 있었던 하나의 기적 사건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적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기적이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의도적으로 사건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리고를 지날 ,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사건은 도시 길에서 일어난 일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 사람이 없는 일들을 하시는 분이심은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 왕국보다 강한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무리가 나름대로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가에 있던 맹인 사람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소리질러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짧지만 능력 있는 기도문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무리가 꾸짖었습니다. “조용히 하세요. 소란 피우지 마세요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소리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반복하였습니다.

맹인의 간절함 속에 그들의 지난 날의 아픔, 고통, 외로움이 묻어나 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체 일부가 고장난 정도가 아닙니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 동반됩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없을 아니라 존경하는 부모님의 얼굴을 수도 없으며, 먹고 살길이 없으니, 걸인이 밖에 없으며, 공부도 어렵고, 결혼하기도 어렵고, 결혼하여 아이를 갖는다해도 사랑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번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여행도 어렵습니다. (이야기) 제가 신학교 공부할 때에, 친구 중에 맹인이 있었습니다. 졸업 여행 때에 제주 한라산 꼭대기까지 함께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정상에 올라서, 감격해 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요즘 시대는 그래도 점자도 발명되고, 공부도 가능하여 직업을 가질 수도 있지만, 2000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가족이 돌보지 않으면 거지가 밖에 없는 신세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본문에서 맹인이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가만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 외친 것입니다. 주변에서 조용히 하세요. 소란피우지 마세요라고 방해해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찬스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신앙 생활을 시작하려고 하면 주위에 방해 세력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느냐? 그럴 시간이 있으면 다른 것을 하자 ) 그러나 어떤 방해에도 굴하지 말고 굳굳하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맹인들의 외침이 예수님께 전해진 것은 소리가 컸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그들의 형편을 아셨고, 그리로 지날 때에 이미 그들의 외침을 듣고 계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귀는 아주 예민하십니다. 죄인들의 외침, 고통당하는 자의 외침,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의 귀와 눈은 항상 주님을 찾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향하십니다.

성경에 우리 하나님의 눈과 귀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증거는 많습니다.

(출애굽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학대를 받을 , 하나님은 모습을 보셨고, 신음 소리를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3:7, 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근심을 알고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사사기)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의 압제에 시달리며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은 거듭거듭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사사들을 보내서 건져 주셨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하나님을 떠나 것을 알면서도 부르짖음을 듣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복음서) 신약에서 예수님은, 주님을 갈망하고 자비를 구하는 영혼들을 외면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선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셔서 구원하셨고, 19장에 보면, 주님 보기를 갈망하여 뽕나무에 올랐던 키가 작은 여리고 세리장 삭개오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가장 밝은 귀로써, 당신의 백성들의 부르짖음,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밝은 눈으로써, 인간의 멍든 가슴 속까지 꿰뚫어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군중 소리에 가려 들리지 않았던 맹인의 외침을 정확히 들으시고, 가던 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러다 놓고 중요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맹인들의 대답은 엄청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길 원하느냐?” 쉽게 표현하면 너희의 소원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지금 시점에서 여러분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 , 영주권, 좋은 직장, 건강과 같은 것들인가요?

사람들의 소원은 크게 가지가 있습니다. 외적 소원과 내적 소원입니다. 피상적인 소원과 근본적인(본질적인) 소원입니다. 여리고의 맹인들에게 당장의 소원은 걸인으로서, 많은 적선을 받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며칠만이라도 구걸하러 가지 않았으면 했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바랄수 있는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소원은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수십 년간 보지 못했고,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바랄 없었지만 본질적인 소원은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조정민목사-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20 이상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정치에 대한 야먕을 갖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신앙을 갖기 전에 누가 당신의 소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면 아마 주저함없이 정치의 이루는 것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높이 올라가는 , 권력을 쥐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근본적인 소원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꿈이나 야망, 권력 욕구를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어제 새벽에 베드로의 소명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소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어부로서 많은 물고기를 잡아보는 , 만선을 경험하는 ,  부자가 되는 등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보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고백은 정말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보니 인생을 같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주님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새로운 소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본질적인 소원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이루어주셨으면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의 맹인은 주여 우리 뜨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맹인들의 모든 문제는 뜨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있습니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할 없었고, 보지 못해서 걸인이 것입니다. 그리고 맹인이 후로는 다시 볼수 있다는 소망조차 가지지 못하는 절망(패배감) 심각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이 그들의 내면적인 소망, 꿈을 꿈틀거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 원하느냐?”

다른 사람은 없지만, 주님께서 물으셨기 때문에 주님은 하실 있다는 믿음으로 주여 우리의 뜨기를 원합니다라고 담대히 말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이시라면 눈을 뜨게 주실 있을 것이란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들의 소원을 듣는 순간 우리 주님의 마음이 뭉클해 졌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셨습니다. “스프랑크니스떼이스” –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묘사할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이면 다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일하십니다. 단어는 영어로 Compassion입니다. ‘고통을 함께 느낀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20:34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여러분, 보통 눈은 종류의 눈이 있습니다. 육안, 지안, 영안입니다. 육안은 신체의 눈이고, 지안은 공부하면 밝아지는 지적인 눈이고, 영안은 영적인 눈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심각한 경우는 육안이 것이 아니라 영안이 , 영적 맹인이 가장 심각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을 치유해 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사람이 맹인이 것은 부모의 때문도 아니고, 본인의 때문도 아니라고 예수님이 제자들의 질문에 답을 주셨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사건으로 인해 바리새인들과 맹인이었던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서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사건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누가 맹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주시고 계십니다. 나면서부터 맹인된 자인가 아니면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인가?

바리새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분명한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맹인이었던 것입니다.

정말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부모를 불러오게 했습니다. 또한 맹인이었다가 눈을 사람을 번이나 불러 확인하였습니다. 하도 답답해서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합니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펄쩍 뛰면서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맹인이었다가 눈을 사람이 말합니다. “ 이상합니다. 사람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을 듣는 우리가 압니다.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것이 틀림 없습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는 바리새인보다 훨씬 통찰력있는 발언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예수님께서 맹인되었던 자를 만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9: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그러자 함께 듣고 있던 눈치 빠른 바리새인이 그렇다면 우리도 맹인인가?라고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9:41,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말씀은, 맹인들은 죄가 없고, 눈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은 육안이 닫혀 있는 것보다 영적으로 닫혀 있고, 영적으로 눈이 상태로 사는 것이 위험하고 치명적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영적 교만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죄요, 영적인 맹인임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맹인인가? 육체적 맹인이 맹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자가 진정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은 죄인이며, 거듭나야 하는 존재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3:10)  누구든지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영적인 맹인들이요, 멸망받을 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1)      인간이 언제 영적으로 맹인이 되었나?

3장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가 악한 사탄의 유혹에 속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이후 그렇게 되었습니다.

뱀이 하와를 어떻게 유혹했는가?

뱀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오해하게 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으며, 철처히 속였습니다.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고 물었습니다.

하와는 그건 아니라고 하면서 다른 열매들을 먹을 있지만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죽을까 하노라하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뱀은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새빨간 거짓말로 하와를 속였고, 하와는 속임수에 넘어진 것입니다.

이후 어떻게 되었나요?  그들이 선악과를 먹은  눈이 밝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영의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사람들의 영의 눈을 어둡게 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고후4:4절을 보세요. “ 중에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전도가 어려운 이유입니다. 세상 신이 전도를 막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영적인 눈을 있는가?

인간은 스스로 눈을 없습니다. 인간의 영의 눈을 뜨게 하실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여리고의 맹인이 예수님을 간절히 부르면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눈을 만져 주시며 뜨게 하신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 사도 바울만큼 정확하게 설명할 있는 사람을 없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사실을 직접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눈이 멀어 보았으며,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눈이 뜨여지는 경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바울의 원래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의 이름으로 , 예수님을 몰랐으며, 예수님에 대해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미워해서 죽이기도 하고, 외국에 까지 가서 체포해서 끌고 오는 종교 경찰 노릇까지 하였습니다.

하루는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정오 쯤에 다메섹에 거의 도착했을 , 해보다도 밝은 빛을 보게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나는 예수라

사울은 밝은 빛으로 인해 눈을 멀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식음을 전폐하고 금식하며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결국 다메섹에 사는 주님의 제자인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눈이 다시 뜨게 되는 경험을 것입니다.

9:17-19, “아나니아가 떠나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경험이 사도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눈을 뜨는 ,”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옮겨 가는 것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죄로 인해 영적인 맹인일 밖에 없음을 알게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끼어 있어서 어둠 속에 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움의 비늘, 아집과 편견의 비늘이 눈에 끼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날 때에, 비로소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26:18절을 보세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의 전도로)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없느니라”(3:5)

(사도 바울의 기도)  1:17=19,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성령으로 영의 눈이 뜨여질 , 하나님의 존재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하늘의 기업의 풍성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소망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눈이라도 같은 눈은 아닙니다. 귀라고 같은 귀는 아닙니다. 매의 눈은 수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쥐까지 있다고 합니다. 시력이 최소6.0에서 최고 9.0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눈은 좋아야 2.0입니다. 개의 귀와 코는 사람의 귀나 후각에 비해 월등히 발달되어 있습니다.

영의 눈이 뜨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같은 환경 속에서도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영의 , 또는 믿음의 눈이 뜨인 사람은 환경(현실) 보지 않습니다. 환경 가운데 함께 계시는 주님을 보고,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 번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항해할 풍랑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여 뒷편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풍랑이 일자 제자들을 온갖 힘을 동원하여 보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면서 불평하였습니다. “주님, 우리가 죽게 것을 모르십니까? 주무시기만 하십니까? 일어나서 어떻게 해보세요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어떻게 말씀하셨나요?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나요? 풍랑을 만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제자들의 문제는 현실 때문에 두려움에 빠지고,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 예수님이 계신 , 환경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믿음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환경에 짓눌려 진리되신 예수님을 잊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 계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환경만 보지 마세요. 주님을 보세요.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현실만 보았습니다. 현실적으로 들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마리로 오천 이상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최소한 2000데나리온 떡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걱정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창조주 예수님이 함께 계신 , 주님께서 하실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고 계십니까? 육안으로만 보고 계신가요? 인간적인 이성이나 경험에 근거한 눈으로 보고 항상 안된다, 없다 하며 좌절하고 낙심하고, 불평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영의 , 믿음의 눈으로 보며, 주님은 하실 있다고 믿으며 소망 가운데 살고 있나요?

 

마지막으로 우리가 떠야 중에는 사명의 눈이 있습니다. 이것을 비전이라고 수도 있습니다. 비전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여주시는 그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떠야 중요한 눈이 바로 비전의 눈인 것입니다. 비전의 눈이 뜨여지기 전에는, 사람은 무의미한 삶을 있습니다.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지 못하는 사람은 목적지를 정해놓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부르실 , 심심해서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사명을 주시기 위해 부르십니다.

(a)    아브라함에게 주신 비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엔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나라를 세우고자 하셔서 부르신 것입니다.

(b)    요셉에게 주신 비전 하나님께서 청소년기에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신 것은 세계적인 기근이 때에 민족을 보존하고, 기근에 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셉은 꿈을 순간도 잊은 적이 없으며, 결국 꿈이 성취되었습니다.

(c)     모세에게 주신 비전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430년간 노예생활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셔서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불러,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세를 부르실 하나님은 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시길 원하셨습니다.

(d)    베드로와 사도 바울에게 주신 비전 신약 시대에 시몬을 불러 베드로라는이름을 주시고, 사울을 불러서 사도 바울이 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복음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맡기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날 청소년, 청년들이 방황하는가?  삶이 옛날보다 어려워져서 그런가요? 아닙니다. 청소년, 청년들이 방황하는 이유는 인생을 이끌고 비전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명의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살아야 하고, 공부해야 하고, 무엇을 위해 인생을 바쳐야 지를 발견한 사람은 방황할 이유도, 시간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중에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직 이뤄야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아직 최고의 순간은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비전을 붙잡고 나아가십시오.

 

오늘 본문의 맹인이 눈을 다음에 어떻게 했나요?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나요? 계속 구걸하는 인생을 살았을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20: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보게된 이후 그들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제 삶의 목표를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게 것입니다.

어제 새벽에도 나눴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진정을 만나면, 만나기 이전의 인생과 같은 인생을 없습니다. 많은 것이 달라질 밖에 없습니다. 영의 눈이 멀었을 때와,눈이 뜨였을 때가 어떻게 같을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표, 가치관, 삶의 방식이 달라질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리고의 명의 맹인이 눈을 뜨고 나서도 계속 구걸하며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영의 눈이 뜨이지 않은 분은 오늘 눈이 떠질 있기를 바랍니다. 이미 영적으로 거듭난 분들은  영의 눈이 더욱 밝게 되길 축원합니다.

특히 분명한 목적 없이 살던 사람들은 오늘 아침에 사명의 눈이 뜨여지길 축원합니다.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분명한 목적을 발견할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sight) 위한 기도

 

주님, 어둠에 갇히지 않고 앞을 있는 눈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육안뿐 아니라 영안도 열어 주시어, 신령한 세계를 있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하오나, 날마다 탐욕과 이기심, 허영심으로 눈이 멀어가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하였나이다.

자기 눈에 들보가 들어 있으면서 남의 눈의 티를 빼려고 했던 자만을 용서하소서

주님의 손으로 우리 눈을 만져 주셔서 밝히 보게 하소서.

 

주님, 앞만 보지 않고 멀리 있는 매의 눈을 갖게 하소서. 아래만 보지 않고 위를 보게 하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있게 하소서.

보아야 것은 보고, 보지 말아야 것은 보지 않는 정결한 눈을 주소서.

중의 책인 성경에서 진리를 보게 하시고, 진리를 따라 살게 하소서.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기 보다는 덮어주는 따뜻한 , 사랑의 눈을 갖게 하소서.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영혼들을 바라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