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설교에서 우리는 섭리적 준비(sovereign foundations)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불러서 사용하시고자 하실 때, 어느 날 갑자기 불러서 쓰시는 것이 아니라 그 오래 전부터 섭리적 준비를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우연은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고, 어떤 성장 과정을 겪든지, 심지어 불행한 환경까지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해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모세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기 이전에,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며칠 전에 뉴스를 보니, 2030년이 되면 한국이 세계에서 제일 장수 국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성의 경우, 2030년에 태어나는 여자는 평균 수명이 무려 80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교육열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국인의 교육열은 못말릴 정도입니다. 우리 교인들의 자녀들도- 거의 전부 대학 이상을 공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도 누구보다도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인데,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학교 교육만 많이 받은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육 방법 중에는 학교 교육보다 더 중요한 차원의 교육이 있습니다.
모세는 크게 세 종류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우선 모세는 어머니로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습니다. 민족 교육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양아들이 되었지만, 젖을 뗄 때까지는 친어머니의 품에서 자랐습니다. 아마 3-4년의 이 기간동안 어머니로부터 신앙 교육, 민족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장성한 후에 자신의 정체성을 애굽인이 아닌 히브리인과 동일시 하여, 히브리인이 이집트인에 매맞는 것을 보고 의분을 느껴 그를 죽이기까지 한 것을 보면, 모세가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얼마나 철처히 민족 교육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받은 교육이 그 이후 20년 이상 왕궁에서 이집트인으로 받은 학교 교육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쳤던 것입니다.
교육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는 아이가 태어나서 말을 배울 때까지의 유아기라고 합니다. 청소년기도 중요하고, 청년기도 중요하지만, 사람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시기는 유아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낳아서 사랑으로, 믿음으로, 소망으로 양육하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영아기, 유아기(유치원 가기 전에)에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우리 말을 아직 할 줄 모르는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유아 교육에서 영재학원이나 영어보다 더 중요한 교육이 신앙 교육입니다. 무슨 성경을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기초적인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가르쳐야 합니다. 누가 세상을 만들었는지, 누가 인간을 만드셨는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 하나님이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시며, 알고 계시며,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을 좋은 분으로, 인격적이신 분으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 그리고 옳고 그름의 개념(정직)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기 때문에 어렸을 때, 올바른 습관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모세가 받은 교육은 이집트 왕궁에서 받는 일반 교육입니다. 오늘날의 하교 교육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7:22에 보면, 스데반의 설교 중에 모세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학문을 배워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고, 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세상의 학문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책임을 맡을 사람으로서, 이집트의 학문과 지혜를 익혀야 했습니다.
일반 학교에서 언어를 비롯하여 여러 전문 분야의 지식을 배우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배울 수 있으면 열심히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런데 모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학교는 광야 학교였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민족 교육을 받고, 이집트에서 세상의 학문을 배웠다고 아직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아직 받아야 할 훈련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집트 왕궁에서 받는 당대 최고의 학문과 익힌 무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왕궁에서 이집트의 학문을 배웠지만, 자신의 정체성은 히브리인으로 생각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제 뭔가 히브리인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 사명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온갖 고된 일로 고생하는 히브리인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야 하겠다는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출2:11) 그리고 거기서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을 모질게 때리는 것을 보았고, 결국엔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었다고 했습니다.(출2:11-12)
이 사건이 우발적인 사건처럼 묘사되어 있지만(물론 살인은 우발적이었음), 모세의 마음 속에 같은 히브리 민족에 대한 부담감, 사명감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자기 민족에 대한 마음이 없었다면 노예들의 노동 현장을 방문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일에 관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강제 노역 현장에 이틀에 걸쳐 나간 것은 다분히 의도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청년기를 지나면서 자신의 할 일은 히브리민족을 돕고 인도하는 일이라고 깨달았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히브리 민족을 위해 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모세가 깨닫게 된 것은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도 아직 모세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출2:13-14절에 보니, 모세가 이집트인을 쳐 죽인 다음 날 다시 강제 노동 현장에 나가보니, 이제는 히브리인들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중에 잘못한 사람에게 모세가 책망을 하였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그러자 그가 대답하길,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장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라고 했습니다.
결국 모세는 일이 탄로된 것을 알고 왕궁에서 도망쳐 미디안 광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 길은 쉽게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무려 미디안 광야에서 약 40년간 살다가, 나이 80이 되었을 때, 먼 훗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집트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간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핵심적인 사건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디안에서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건은 그의 결혼이었습니다. 우물가에서 미디안의 제사장 르우엘의 딸들을 도와서 양떼에게 물을 마시게 도운 것이 계기가 되어, 십보라를 아내로 얻고, 처가집에서 데릴 사위가 되어 양떼를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려 몇 년간요? 40년 간 광야에서 양떼를 돌보는 단순한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20년간 처가살이를 했는데, 모세는 더불(double)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은 결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에게 꼭 필요한 광야 학교였습니다. 철저히 낮아지고, 온유하고 겸손한 지도자로 만들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
모세의 비전이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젊어서 품었던 비전, 즉 동족 히브리인을 섬기고 인도하는 비전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었습니다. 계속 품어야 할 비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시기와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때와 방법은 모세가 생각한 때와 방법과 많이 달랐습니다.
모세는 젊었을 때, 이집트의 학문과 무예를 배우고 나서 이만하면 이제 민족의 리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히브리인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일은 인간적인 힘이나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무려 약 40년간 광야 학교에 보내서 철저히 낮아지는 훈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왜 모세는 ‘이제 됐다, 이제 자신의 힘과 지혜로 히브리인들을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아직은 아니라’고 하셨을까요? 모세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들도 때때로 모세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30-40대 때에 젊은 패기와 혈기로 모든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른들이 하는 것이 시시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막상 사역을 하려고 하면 잘 되지 않고 여러 문제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나중에야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했음을 깨닫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이것은 우리와 하나님의 생각과 관점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하나님의 생각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힘과 지혜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집트 왕궁에서 배운 학문과 무예를 통해 충분히 히브리 사람들을 잘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 일을 잘 할 수 있느냐에 대한 관심보다 그의 신앙 인격의 성숙에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학문이나 실력 면에서는 갖추어졌다고 해도, 인격적인 면에서는 아직 덜 갖추어졌기 때문에 모세가 광야 학교에서 더 훈련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광야 학교의 특징)
하나님이 계획하신 광야 학교는 이집트 왕궁의 학교와 얼마나 다를까요? 어떻게 다를까요? 왕궁학교는 커리큘럼이 있었던 공식적이었다면, 광야학교는 일정한 교실도, 교사도, 기간도, 커리큘럼도 없었습니다. 광야 학교의 목적은 겸손, 믿음과 인격의 성숙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광야보다 좋은 곳은 없습니다. 광야는 시끄러운 곳이 아니라 조용한 곳입니다. 인간의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곳,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들을 수 있는 곳입니다. 오로지 하나님께만 귀를 기울여야 하는 곳입니다.
또한 광야는 위험한 곳입니다. 불편한 곳입니다. 인간이 의지할 것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해야 하는 곳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기 전에 광야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가정을 갖고 인도하고 돌보는 훈련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목자가 되어 양떼를 돌보고 인도하는 훈련이었습니다. 이 일들이 작은 일 같이 보이지만, 모세가 한 민족을 섬기는 데 있어서 반드시 경험해야 할 일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는 일은 가정을 돌보는 일과 비슷하고, 또한 목자로서 양떼를 돌보는 일과 비슷합니다.
지난 중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결코 소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만약에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십보라를 만나지 못하고, 가정을 가지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광야 생활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어렵고 힘든 광야 학교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따뜻한 가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으면, 아들 이름을 게르솜(객)이라고 지었겠습니까?
가정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힘든 때에도 가정이 있기에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은 훈련의 장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잘 돌보고 섬길 때, 더 큰 일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신앙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모세가 젊었을 때 실수한 것처럼, 우리는 때때로 성급하게 지도자가 되고, 성급하게 하나님이 주신 꿈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하시며, 더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지도자에게 있어서 기능보다 인격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 가령 목사를 예로 든다면, 목사(pastor)로서의 기능이 있고, 목사 이전에 인간(person)으로서의 인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 자신도 그렇고, 성도들도 목사로서의 기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목사로서의 기능을 개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하게 되고, 기도를 유창하게 하고, 잘 가르치는 목사가 될 수 있을까를 걱정합니다. 그리고 목사로서의 기능을 잘 하면 훌륭한 목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둘의 균형을 갖는 것이요, 어떤 면에서는 기능보다 인격의 성장, 성숙에 더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모세가 더 성숙하게 되도록 광야 학교로 보내신 것처럼, 젊은 목사에게는 사역보다는 인격, 인품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서 훈련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생각지 않았던 연단을 받게 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더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최대 약점 중에 하나는 잘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75세 때에 아들을 갖게 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10년이 흘러도 이뤄지지 않자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들을 얻었습니다. 애굽 여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은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아브라함 가정과 이스라엘 민족에 는 견디기 어려운 시험 거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항상 일이나 사역보다 관계, 성품의 성숙에 더 관심을 갖고 계심을 이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Doing 보다 Being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Function보다 Person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우리말에도 먼저 사람이 되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운동선수이든, 어떤 전문가이든 기술이나 실력을 갖추는 것보다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인격이 잘 갖춰지지 않는 것은 깨진 바가지와 같습니다. 물을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격이 준비되지 않은 리더는 결코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잘 하는 것 같은데 열매는 좋지 않은 것이죠.
지난 금요일 새벽에 나눈 말씀입니다만,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르다 자매의 집에 초대를 받고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환영하는 태도는 서로 확연히 달랐습니다.
마르다 – 예수님을 초대하여 잘 대접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로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일로(사역으로) 바빴던 마르다는 자기를 돕지 않은 동생에 대해 원망이 생겼고, 또한 그런 마리야게에 언니를 도우라고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에게도 원망이 생겼습니다.
눅10:40, “마리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 조용히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소홀히 하고 여러 가지 사역들로 분주하게 되면, 자기처럼 열심히 봉사하지 않는 다른 사람에게 원망을 하게 되고 급기야 주님에게까지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이 오히려 짐이 되고, 신앙 성장을 방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기 위해 사역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사역이 주님과의 관계,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에 우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어떻게 말했나요?
눅10:41-42절을 보세요.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을 위한 사역과 주님과의 관계, 이 둘의 균형이 필요합니다만, 무엇이 우선적이고 좋은 편이냐 정해야 한다면,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우선적이요 좋은 편인 것입니다.
그래야 주의 일을 할 때,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할 수 있고, 또한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때로는 고난 가운데 두시고 , 광야 학교에서 훈련받게 하시는 것은 기능적으로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인격의 성숙을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모세의 믿음의 특징)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모세가 이집트 왕궁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고난을 겪은 것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고난 받은 것을 믿음의 결단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의하면, 모세가 광야 학교에 가게 된 것이 우발적 상황에 의해 가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것이지만, 히브리서에서는 모세의 믿음의 결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11:24-26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의 믿음은 ‘거절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이 거절이 결코 쉬운 거절이 아니었습니다. 유대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로서 바로왕에 이어서 왕위에 오를 수도 있는 위치였다고 합니다. 그가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권력을 추구했다면 왕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아더 핑크, 출애굽기 강해, p. 33)
모세의 믿음은 어려운 선택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좋아했다”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누군가의 강요로 어려운 선택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안락보다는 역경을, 명성이나 명예보다는 부끄러움과 비난을, 즐거움보다는 고난을, 궁전보다는 광야를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위대함이라고 믿습니다.
모세의 믿음은 그의 가치관 속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새번역에서는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다”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왕자로서 출세와 부귀가 보장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노예였던 히브리인들과 동일시하고 히브리인들을 위해 살게 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무엇이 더 가치있는 삶인지 알았기에, 그리스도를 위한 모욕을 달게 받았던 것입니다.
모세의 믿음은 그가 어떤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살았는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이 땅의 상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바라며 믿음으로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모세는 로마서8:17-18절을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임이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장차 받을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현재의 고난은 ‘잠시 잠깐’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고난도, 광야 학교도 다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영원에 비하면 40년은 긴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면서 무엇을 거절했나요? 어떤 것을 선택했나요? 무엇에 더 가치를 두고, 무엇에서 만족을 얻고 있나요? 무엇에 목표를 두고 살고 있나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닌 영원한 것, 영원한 영광을 목표로 하고 살고 있나요?
모세의 영성은 오늘날의 누구와 견줄 수 있을까요? 선교사의 영성과 비교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교사들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고국에서의 평안한 삶을 뒤로 하고, 자발적으로 불편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위험하고, 외롭고, 힘들어도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견디며 충성하고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평생 선교지에서 헌신하다가 늙어서 본국으로 귀국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마침 미국 대통령이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배에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항구에 몰려 나와서 대통령을 환영하였지만, 일평생을 선교지에서 보낸 노선교사를 환영하기 위해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약간 마음에 언잖은 마음(자기 연민과 분노)이 들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 사람ㅇ하는 아들아, 너는 아직 하늘의 집에 돌아온 것은 아니잖니? 네가 하늘에 당도할 때, 어떤 일이 있을지를 생가해 보렴”(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인용)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의 삶의 성공이 인생의 최종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잠시 누릴 영광을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주의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더 기다리라고 하시며 광야 학교에서 훈련 받게도 하십니다. 사역보다 주님과의 관계, 인격의 성숙을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한 하나님의 관심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잠시 광야 학교에 보내셨다면 원망과 불평하지 마시고 달게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광야 학교에서 기꺼이 훈련 받으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품으로 빚어지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들로 빚어지시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했습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니, 내가 이로 말미암아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야고보 사도도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 광야 학교를 나오지 않은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그 학교의 알럼나이(alumni)들입니다. 하나님의 광야 학교에서 더욱 성숙해 지고 주님 닮아갈 줄 믿습니다. 아멘.
전능하신 주님, 주님의 생각이 항상 우리 생각보다 크십니다. 주님의 때가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때보다 정확합니다. 주님의 방법이 우리의 방법보다 옳습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며 주의 뜻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주님, 지금 우리 중에 하나님의 광야 학교에서 훈련 중인 분이 있다면 불평이나 원망보다 인내로서 주님 닮은 성품으로 빚어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시대 주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